적과의 동침

작성자: 레라 네자트

시길에서 함께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도 마라켄과 라이잔은 가끔 행동을 같이하는 협력 관계였다는 것은 그들을 다룬 많은 글에서 알 수 있다.1) 무슨 연유로 기스양키와 기스져라이가 함께 움직이게 되었는가? 필자는 이 문제를 조사하던 중 라이잔과 마라켄을 언급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오래된 하모니움 사건사고 보고서를 발견했다.

하모니움 대원X월 X일 하모니움 순찰대원 바키시 오그렉 사건 보고서

저는 안티피크 4시간 전 시장 구역에 있는 주점 '퀼의 소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는 제보를 듣고 달려갔습니다. 현장에 있던 자들은 하모니움 대원들이 도착한 것을 보고 도주에 여념이 없었으나, 그중 하플링 퍼들미어 플리트의 신변을 확보하여 증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참고인 퍼들미어 F. 플리트 취조록

나…난 아무 잘못도 없어요! 내가 아니라 그 미친 기쓰들이었다니까! 아얏! 때린 데 또 때리지 마요! 옆머리도 있고 뒷머리도 있는데 왜 정수리만 또 때려! 아야!

알았어요, 알았어, 씨. 정말 얘기하면 보내주는 거죠? 참나, 아무 상관도 없는데 별 일에 다 휘말려서…

난 하루 일 끝나고 그저 친구들하고 편안하게 한 잔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건 죄가 아니잖아요? 그랬는데 문이 열리면서 기스양키 하나가 척 들어오더라고요. 아, 거 분위기 한 번 살벌하던데요. 손님들이 하나씩 일어나서 나갔지만, 나하고 내 친구들은 그냥 앉아있었죠. 기스양키 무섭다고 술도 못 마시면 그게 어디 사내입니까? 겁쟁이 타멘 녀석은 아내가 일찍 들어오라고 했다면서 주춤주춤 나갔지만, 이 퍼들미어 F. 플리트는 그렇게 뱃심없는 남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혼잣말로) 제길, 나도 그때 나갈걸.

어쨌든 이 기스양키 여자는 나가는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거만한 눈빛으로 술집을 한 번 훑더니, 술 생각 따위는 전혀 없는 태도로 걸어들어오더군요. 주인장 벨이 그 앞을 가로막았어요.

“테이블이 필요하십니까?”

하면서 말입니다. 조금도 기가 죽지 않더구만요! 하긴, 벨은 왕년에 칼깨나 잡았던 모험가니까 기스양키는 그다지 무섭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난 무서워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벌벌… 아니, 언제 어디서 일격이 날아올지 모르니 바짝 긴장하고 대비하고 있었죠!

여자는 자기보다 머리 둘은 큰 벨을 마치 벌레가 앵앵거린 것처럼 무시해 버렸어요. 그리고서는 주점 안쪽에 대고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더라고요. 고함을 치는 건 아니었지만 목소리는 높고 맑아서 주점 구석구석까지 울렸죠.

“기스져라이! 언제까지나 날 피할 수는 없을 텐데?”

역시 기스져라이를 쫓아왔다니,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였지요. 기스져라이가 어딨나 나도 휘휘 봤지만, 벨네 주점은 어둑어둑해서 잘 알 수가 없죠. 기스양키는 계속해서 말하더군요.

“얘기 좀 해! 도움이 필요하다!”

퀼주점은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어요. 벨은 억지로라도 쫓아내려는 듯 여자에게 한 발짝 다가섰죠. 기스양키는 마치 나가려는 것처럼 돌아서다가 갑자기 돌아보더라고요. 그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에 이글거리는 눈빛은 잊혀지지도 않아요.

“저서몬의 타락한 아들! 비굴한 노예놈! 기쓰의 아들이 두려워 벌벌 떠는 비겁자! 림보의 더러운 진흙 속에 짐승처럼 숨어 사는 네 동족에게 돌아가버려!”

소름이 쫙 끼쳤어요. 증오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난 평생 몰랐던 겁니다. 그 악의에 찬 저주를 듣는 순간까지는요. 그 말에 가득한 증오는 진심이었습니다. 나서부터, 아니 조상 때부터 핏줄 속에 흐르는 그런 미움 말이죠.

아, 알았어요! 빨리 얘기하면 될 거 아냐. 어쨌든 그 말만 하고 기스양키는 나가려는 것 같았는데… 그때 시야에 뭔가 스쳐갔어요. 그림자인가 했는데 그 순간 기스양키가 돌아서면서 칼을 뽑더라고요. 문가에 있던 화병이 넘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어요. 그제서야 누가 기스양키 여자를 공격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죠. 마른 몸과 변발한 머리를 보니까 기스져라이였어요. 놀랄 일도 아니죠, 그렇게까지 모욕을 당했으니. 언제 그렇게 빨리, 소리없이 튀어나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여자는 번득이는 단검을 허리를 숙여 피하면서 밑에서 검을 올려쳤고, 기스져라이는 마치 녹아 없어지는 것처럼 피하면서 보이지도 않도록 빠르게 발을 날렸죠! 얼굴을 정통으로 맞은 기스양키가 뒤로 날아가면서 문이 부서졌고, 문짝과 함께 계단을 굴러떨어진 기스양키에게 기스져라이는 단검을 찍어내렸지만 어느새 기스양키는 튀듯 일어서서 다시 검을 휘둘렀어요. 기스져라이는 그녀의 머리 위로 도약하더니 공중제비를 해서 밖으로 완전히 벗어났고, 기스양키는 몸을 돌려서 그쪽을 향했어요. 기물 부서지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가고, 세상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죠.

세레몰포시스에 드러난 라이잔 부친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라든지, 기스져라이 무승과 기스양키 여기사를 가리키는 두 사람의 전투 모습 등 많은 정황상 이 증언 속의 기스양키와 기스져라이는 라이잔과 마라켄이 틀림없어 보인다.

저는 이때다 하고 도망- 아니, 선량한 시민들이 싸움에 휘말리는 것을 막으려고 달려나갔지만, 싸움이 너무 크게 벌어져서 지나갈 수도 없었어요. 기스져라이는 몸을 웅크려서 착지했다가도 기스양키의 검이 날아오면 다시 빙글 뛰어오르고, 공중에서 단검으로 내리치면 기스양키는 검으로 쳐내고, 기스져라이는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을 뒤로 날리고… 두 사람이서 싸운다기보다는 꼭 두 개의 폭풍이 부딪치는 것 같았어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연의 힘처럼 말이죠. 아니면 숨막히도록 빠르고 치명적인 춤을 추듯.

어느 순간 기스양키는 방어를 포기하고 기스져라이에게 몸을 날리더라고요. 기스져라이가 놀랐는지 아주 잠깐 망설이는 동안 기스양키는 그의 손목을 비틀어서 단검을 놓치게 하고는, 검을 그의 목에 댄 채로 둘이서 함께 땅으로 쓰러졌죠. 이걸로 끝났나 싶었는데 기스져라이가 넘어지는 와중에 팔을 쳐들더니, 손목 보호대에서 칼날이 튀어나와서 기스양키의 목을 찔러들어갔어요. 기스양키가 몸을 세우지 않았으면 그대로 목이 날아갔을 겁니다.

주변은 개미 기어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어요. 땅에 길게 누운 기스져라이를 기스양키가 깔고앉은 자세가 되었고, 양쪽 다 서로의 목에 칼을 대고 있었죠. 둘 다 피를 흘리고 지쳐서 숨을 몰아쉬면서도 눈빛만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라고요. 여자가 헐떡이면서 먼저 입을 열었죠.

“이제… 내 말을… 들을 마음이 생겼어?”

“서로 목에 칼을 대지 않으면 대화라는 걸 나눌 수 없는 게 우리 두 종족의 현실이겠지.”

남자의 목소리는 담담하더라고요.

“하지만 같이 위협을 받는다면 그 칼을 공통의 원수에게 돌릴 수 있는 거잖아.”

“네 말의 의미를 나는 '알지' 못한다.”

기스져라이는 눈을 돌려버리더라고요.

“마인드 플레이어는 플레이어일 뿐이다. 무의미한 집착을 정히 버릴 수 없다면-”2)

“이 바보 자식! '그마나트스키'할 '제피 챠켈' 놈!”3)

그렇다면 라이잔은 아버지가 변이한 일리시드 수끌리어를 추적하다가 기스져라이와 기스양키 모두에게 위협이 되는 모종의 사실을 발견하였고, 마라켄을 설득해 둘이서 함께 조사하면서 행동을 같이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문의 도시 시길은 그런 그들이 만나기 좋은 장소에 속했을 것이다.

저렇게 들렸어요. 무슨 소린지, 참나. 어쨌든 여자는 칼로 기스져라이의 목을 썰기라도 할 것처럼 꽉 누르더라고요. 마찬가지로 기스져라이도 팔에 힘을 주니까 기스양키의 목에서 그의 얼굴로 피가 뚝뚝 떨어졌죠.

이곳 시길에 거주하는 마르니 스틸송에게 문의한 결과 그녀의 할아버지 브로드릭 스틸송이 게헨나에 갔던 것은 이 취조의 연도보다 반 년쯤 후의 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처음에는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의 뒤를 밟으면서 내가 발견한 위험은 사사로운 감정을 훨씬 넘어서는 일이야! 어째서 아무도 믿어주지 않지?”

칼날을 사이에 두고 두 기스는 서로 뚫어져라 쳐다보았죠. 마치 말없이 의지와 의지의 싸움을 하듯.

그때 하드헤드… 아니, 하모니움이 온다고 누가 경고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주변에서 다들 도망가느라 정신이 없는 동안 그 소동을 일으킨 녀석들을 돌아보니까 아니 대체 뭐야, 둘이서 멀쩡하게 서로 부축해서 일어나는 거 아닙니까!

“네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듣고 싶다.”

남자 쪽이 조용히 말하는 소리가 소란 중에도 똑똑히 들렸죠.

“내가 당신을 찾아낼게.”

여자는 터진 입술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말하더라고요.

“언제나 그렇듯이.”

“언제나 그렇듯이.”

기스져라이 무승은 몸을 웅크려 땅에 떨어뜨린 단검을 집더니 그 자세 그대로 도약해서 지붕 위로 사라졌죠. 기스양키 여자는 마치 경례하듯 은빛 나는 검을 들어보이고서는 골목으로 뛰어들어갔고요. 나도 도망치려고 그랬는데 이리 부대끼고 저리 부대끼다가 하모니움 양반한테 그대로 덜미를 채인 건 뭐 아시는 그대로고.

이렇게까지 얘기했으니 난 아무 죄 없는 건 아시겠죠? 다 그 기스 녀석들 짓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난 좀 놓아주면 안되겠습니까?

어째서 동족조차도 믿어주지 않았던 라이잔의 주장을 마라켄이 신뢰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증언에서도 똑똑히 드러나는 거의 본능적인 살의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기묘한 이해심 혹은 동질감이 그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동기가 무엇이었든지간에, 두 종족의 절대적인 적의마저 잠시 제쳐두고 협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인 생존의 위협 앞에서 라이잔과 마라켄은 적과의 동침을 시작한 것이다. 이곳 시길, 문의 도시에서.

3) 라이잔으로 추정되는 기스양키는 마라켄으로 추정되는 기스져라이를 '그마'나흐크-트'스쿠히 제'푸히 챠'켈', 즉 '이 튀겨죽일 골빈 반(半)트롤'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댓글

소년H, %2007/%08/%30 %08:%Aug:

음모론? (…) 제 것이 링크되는 일도 다 있군요. 그런데 좀 헷갈리는 게.. 이게 돌파 사건 당일이라는 것? 이라면 말이 안 되겠지만 논평 보면 꼭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어서..

 
로키, %2007/%08/%30 %10:%Aug:

사실 그쪽으로 결론이 연결되는 게 애매하긴 하지만, 이때 시작해서 계속 시길에서 만났고, 돌파 사건날에 둘 다 시길에 있었던 것도 관련이 있다는 식이죠. 사실 시길에 그날 왜 있었는가 하는 얘기는 여기 나온 근거에서는 잘 이어지지 않는 결론이라 빼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이후 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