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빚진 우정

작성자: 레라 네자트

'돌파 사건 (The Breakthrough)' '시길 전투 (The Battle of Sigil)' '1일 전쟁 (The One-Day War)' 등으로 불리는, 시길이 블러드 워의 비할 데 없는 파괴적 위력을 맛본 날에 대해서는 이미 책 수십 수백 권 분량의 글이 나왔다. (엔트로피를 향한 우주의 부단한 행진 앞에서는 모두 먼지로 스러질 것들에 불구하지만, 그렇게 믿는 필자 역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역설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날 하루에는 수없이 많은 사건이 벌어졌으며, 그 사건들은 또 셀 수 없이 많은 파급 효과를 낳았다. 하지만 그날 벌어진 많은 일 중에서도 가장 묘한 사건 중 하나라면 아마도 '철천지 원수'의 대명사와 같은 기스져라이와 기스양키의 우정이 아닐까. 수천 년 전부터 원수였던 이 두 종족 사이에 어떻게 우정이 싹틀 수 있었는가? 그런 일이 가능하기는 했는가? 그런 일이 과연 있었는가?

최근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이 불가능한 우정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증거를 발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단, 그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우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상호 이해'였으며, 이 이해의 기반은 바로 두 종족간의 격렬한 원한 관계 그 자체, 그리고 모든 유한자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죽어가는 멀티버스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공감대인 죽음이었다.

다음은 모험가 브로드릭 스틸송의 회고록 '늙은 대장장이의 플레인 탐험기' (브로드릭 스틸송 구술, 마르니 스틸송 기록)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뭐 하여튼 내가 플레인을 돌아다니면서 별별 걸 다 봤다만 말이다, 그놈의 기스만큼 묘한 친구들도 잘 없지. 어느 기스냐고? 아 글쎄, 기스져라이건 기스양키건 못 알아먹을 것들이라니까. 그래도 그나마 내가 아는 건 기스져라이긴 하지. 기스양키야 잘못 보였다간 목이 날라가기 딱 좋고, 기스져라이야 못 알아먹겠는 소리나 좀 하니까. 누가 기스져라이를 정말 안다고 할 수 있겠냐만.

게헨나

그치들이 얼마나 정신나간 녀석들이냐면 말이다, 그때 게헨나에서 있었던 일 내가 얘기했던가, 아가? 게헨나에는 왜 가긴, 유골로스가 득시글거리는 지옥구덩이긴 하다만 블링크 메탈이 나오는 곳은 그 휙휙 날라다니는 화산밖에 없으니 말이다. 아, 수익을 나누기로 하고 우릴 들여보내준 유골로스야 우리가 채굴에 성공하자마자 당연히 배신했지. 숨만 붙어있으면 배신하는 게 유골로스이니. 그래서 다른 대(大) 유골로스한테도 미리 귀띔을 해놨지. 놈들끼리 블링크 메탈을 두고 서로 싸우는 틈에 도망칠 수 있을까 했지만… 뭐 이런 때 늘 그렇지만,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 꼭 벌어지더구나. 놈들끼리 힘을 합쳐서 우리가 채굴한 블링크 메탈을 뺏기로 작당을 한 게지. 그래서 그 두꺼비랑 벌레 놈들하고 죽을 힘을 다해 싸우게 됐지. 우릴 죽이고 나면 이번에는 우리 시체를 밟고 서로 블링크 메탈을 두고 죽일 게 뻔한 놈들하고 말이다.

이게 기스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조금만 기다려봐, 다 나온다. 하여튼 요즘 젊은 것들은 참을성이라곤…

호위로 고용한 용병 중에서 기스져라이가 있었는데 말이다, 뭐 그런 식으로 외부인하고 모험하고 다니는 기스져라이가 다 그렇지만 아마 동족한테 쫓겨난 것 같더구나. 자세한 사정이야 물론 모르지. 모험가들은 과거를 묻지 않고, 기스져라이들은 그중에서도 유독 말이 없으니 말이다. 이름? 글쎄, 뭐였더라… 마크? 마렉? 뭐 그런 비슷한 거였던 것 같은데.

어쨌든 기스져라이는 평소에는 조용해 보이지만, 일단 싸우기 시작하면 뭐에 쓰인 것처럼 날뛰게 마련이지. 그 기스도 입 꾹 다물고 눈만 번득이면서 정말 유골로스한테 원한 있는 사람처럼 싸우더구나. 게다가 몸은 얼마나 날랜지 아주 보이질 않더라, 보이질 않어. 그랬는데도 용병들도 하나둘 쓰러지고, 놈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우리 운도 여기까지구나 했지.

그런데 바로 그때 뭔가 허연 게 번쩍한다 싶더니만 눈앞에서 더골로스 하나가 두 동강이 나버리는 거야!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주변에는 유골로스 녀석들이 막 죽어 자빠지고, 그 틈에 용병들도 다시 미친 것처럼 싸워서 유골로스들을 해치웠어. 그리고 좀 정신을 차려서 누가 죽고 누가 다쳤나 챙기고 있는데 그제서야 누가 갑자기 우릴 구해줬나 눈에 들어오더구나.

믿을 수 있겠느냐? 그 기스져라이 용병하고 마주서서 쳐다보고 있는 건 기스양키였단다. 나참, 기스양키한테 목숨을 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 넓은 우주에 몇이나 되겠냐! 그것도 일행 중에는 기스져라이가 있었는데 말이다.

나머지 사람들이 부상을 치료하고 유골로스 시체에서 무기 같은 물건을 챙기는 동안 기스져라이하고 기스양키는 서로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하더구나. 이젠 이것들이 유골로스를 잡았으니 서로 죽이려고 혈안이 되려나, 버려두고 그냥 가야 되나 난 고민하고 있었지. 그리고 기스양키 여자는 다가서서는 은빛이 나는 양손검 끝을 기스져라이의 목에 가볍게 가져다 대더군. 이제는 싸우려나 했는데, 묘하게도 기스져라이는 물러나질 않는 거야. 그놈 몸 날랜 건 내가 직접 봐서 아는데. 대신에 그 속 모를 눈빛으로 기스양키 여자를 내려다보면서 조용히 묻더구나.

기스..(..)기스양키“조사할 것은 끝났는가, 라이잔?1) 내 일에까지 관여할 시간이 있는지는 몰랐군.”

기스양키도 공격은 안하고 칼만 댄 채로 말하더군. 마치 비웃는 것 같은 미소를 띄고…

“유골로스 따위가 당신의 죽음을 가져가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그 약속을 지금 취하겠는가? 나 역시 할 수 있다면 나의 약속을 취할 것이니.”

“아니.”

그리고 기스양키는 검을 거두면서 물러나더구나. 여전히 웃으면서 말이야.

“지금은 시간이 없어. 오늘은 아직 당신이 내 손에 죽는 날이 아냐.”

기스져라이 쪽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기스져라이 녀석들이 그렇듯 말 하나하나가 진심이라는 건 절절할 정도로 느껴졌지.

“그리고 너 역시 나의 손에.”

그때 기스양키 쪽이 갑자기 움직여서 난 깜짝 놀랐지만, 보니까 수정 같은 것을 기스져라이한테 던져줄 뿐이더구나. 기스져라이는 여전히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그 수정을 받았고. 금방 집어넣긴 했지만 맥박치는 빛을 품고 빛나는 모습이 무슨 기록석 비슷한 것 같았어. 기스양키는 인사도 없이 돌아서서 가버렸고, 기스져라이는 묵묵히 그 뒷모습을 쳐다보더구나.

그제서야 그 기스져라이 용병이 게헨나에 온 것은 한 가지 이유가 아니었을 거라는 짐작이 들더구나. 어쩌면 진짜 용무는 그 기스양키 여자를 만나서 조사한 것을 건네받는 것 아니었을까? 블링크 메탈 채굴 여행에 따라온 건 위험한 곳을 함께 여행할 일행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만… 지금 와서는 다 짐작일 뿐이지.

어쨌든 너무 기묘한 일이라 오늘날까지 잊혀지지도 않는구나, 그 대화는. 기스져라이와 기스양키가 만났는데 서로 피를 안 흘리고 끝나다니, 아마 그런 걸 본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게다.

대충 급한 치료하고 시체 수습하고 챙길 물건 챙긴 우리는 또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정신없이 이동해서 시길로 돌아가는 차원문을 탔지. 지크의 그 지저분한 주점이 평생 그렇게 반가워보인 일도 없었어.

나중에 용병들한테 급여를 나눠주면서 마지막으로 그 기스져라이하고 얘기를 했는데, 궁금해서 안 물어볼 수가 있었겠어? 그 기스양키는 누구였냐고, 친구냐고 물어보니까 기스는 아주 정색을 하고 쳐다보면서 그러더군.

“아니, 그녀는 내 최고의 적.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이기로 맹세한 존재요.”

그리고 마치 반대해 보라는 듯 빤히 보는데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냐. 그냥 돈주머니를 주면서 행운을 빈다고 그랬지. 기스져라이는 꾸벅 인사하고 가버리더구나. 다시는 그 용병을 본 적이 없어. 그때 보니까 솜씨가 좋아서 다시 고용할까 수소문도 해봤는데, 시길에서 그 난리가 나서 이제 연락이 안 되는 사람이야 수두룩하지.

어쨌든 그렇게 게헨나에서 살아 돌아오고, 어두워진 후에 동료들하고 거하게 마시다가 묘한 생각이 들더구나.

꼭 자기 손으로 죽이기로 했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자기가 죽이기 전에는 죽게 둘 수 없다는 말 아니냐? 게헨나에서 그 기스양키가 우릴 구해준 것도 그러면…

그러니 내 말 알겠느냐? 기스져라이건 기스양키건, 기스는 속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친구들이라는 것 말이다. 허어 참, 죽이기로 맹세한 원수라서 목숨을 구해준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세상에 참 별일 다 있지…

우정에는 많은 형태가 있다. 어쩌면 수천년 동안 서로를 괴멸시키는 데에 힘을 쏟아온 두 종족 사이에 우정이 존재하려면 이렇듯 적의와 죽음이라는 전제가 요구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죽음과 파괴를 두려워하고 외면하지만, 오히려 마라켄과 라이잔 두 사람에게 서로를 죽이겠다는 맹세는 끔찍한 적대감 속에서도 공감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길의 하(下) 구역이 대부분 파괴된 1일 전쟁의 날, 마치 세계가 부서지는 것 같았던 그 파괴의 와중에 두 사람이 함께 죽은 것은 두 사람이 한 맹세의, 그리고 서로에게 죽음을 맡긴 그 기묘한 우정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1) 라이잔이 남자 이름을 쓰는 여자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타퀄름의 글 의문의 여검사 참조

댓글

오승한, %2007/%08/%21 %12:%Aug:

박스 안의 글씨가 붙어서 보이네요..

 
로키, %2007/%08/%21 %13:%Aug:

박스 속에 주석을 넣으면 인터넷 엑스플로러 6에서 생기는 묘한 현상이네요. 주석 대신 괄호 처리했습니다. (죽어라 엑스플로러..(…))

 
소년H, %2007/%08/%29 %00:%Aug:

참조 링크 납치해요 호호호 (?)

 
로키, %2007/%08/%29 %06:%Aug:

아앗 링크냥!(..) 드디어 참조도 받아보고 좋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