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이었다?

필자가 언제나 자료 출처로 감각석을 애용하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역시 첫번째로 이용하기 편하며 두번째로 감각석에 담긴 경험은 그 자체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세상의 모든 경험이 자동으로 감각석에 기록되는 것은 아니다. (혹은 다행히도,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 일은 사라지거나 거의 없어질 것이다) 때문에 감각석 외의 자료도 필요하다면 활용해야 할 것이다.

서두가 길었는데, 이는 물론 이번 글에서 활용할 자료가 조금 특이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우연찮게 발견한 «익명의 증언자 제 42권: 부제 우주의 비밀>> (타리어스 밋헬 지음)이라는 연구집인데, 이쪽에선 비교적 유명하지만 약간 설명하자면, 모험가이자 아마추어 연구자인 타리어스 밋헬이란 자가 '현재의 이슈'와 연관된 증인을 찾아내어 정보를 모으는 것으로, 다만 제목처럼 그 증인은 어디까지나 익명을 보장한다. (본래는 이것이 안전을 위한 것이었던 거 같지만, 이제 와선 별 다른 이유가 없는 느낌도 든다.1)) 이번 역시 '돌파 사건'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증인을 찾아낸 저자의 탐색 능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이 증인 역시 익명이며 단지 그 발언의 방식 -공통어임에도 저자가 많은 교정을 했어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같은 걸로 볼 때 휴머노이드라기보다는 아웃사이더나 변이체일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한다. 통례에 따라 책의 저자 주석은 괄호로, 필자의 주석은 통상의 주석으로 썼다.

42. 증언자 S의 경우

나는 이렇게 들었다.2)

증언자 S는 기스저라이 마라켄과 오래도록 아는 사이였으며, 특히 이번에 같이 죽은 기스양키 라이잔과의 첫 만남에 동행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되도록 모두 옮기려 했으나, 그의 언어는 문학적 재능과 기괴한 취향을 가진 자들을 제외하면 그의 이야기는 알아듣기 힘든 수준, 아니 견뎌내기 힘든 수준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많은 부분 각색을 했으나 내용은 최대한 본래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도대체가, 별 외계어를 다 공통어로 번역해봤지만 공통어를 옮기는 데 이런 어려움이 있을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젠장..)

개별적인 논평, 질문 등은 밑줄로 처리했다.

1. 첫 만남

나는 언제나처럼 마라켄과 함께 여행을 갔었지. 나야 어기적 어기적 따라갔지만 그놈은 뭐였더라? 무슨 임무가 있었을 거야. 어비스는 꽤나 따시더군. ㄲㄲㄲ

둘이서 방해하는 잡것을 몇 마리 처치하곤 쉬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지더군. 또 다른 잡것인가 보니까 기쓰였어. 난 그냥 마라켄 동족인 줄 알았지. 솔직히 그 두 종족, 비슷해 보이지 않아? 그래갖고 맨날 싸우잖아. (잠시 화제 전환이 있었다.) 그래서 저쪽의 둘과 마라켄이 적대 관계가 된 뒤에야 그놈들인 줄 알았지.

아무튼 분위기는 팽팽해졌고 나도 꽤나 팽팽해졌지. 잡것들하곤 수준이 달라보였으니까.. 근데 한 놈이 말을 걸더군. 우리가 아니라 자기 일행에게.

기스양키A: “라이잔, 잠깐 지금은 저것들하고 싸울 때가 아니다.”

뭐야, 저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혹시 양키가 아니라 변장한 남부놈인가? 싶은데 그놈이 우리에게 말하더군.

“마음같아서는 네놈들을 갈아버리고 싶지만, 지금 힘을 뺄 때가 아니라서 참지. Illithid 떼가 이 근처에 있다.”

마라켄 놈도 그 말엔 움찔하더군. 뭐 나도 그 문어대가리들이 쟤들하고 제일 사이 나쁘다는 건 들었으니까..근데 그놈들은 어비스엔 잘 안 오지 않았던가? 아무튼 마라켄 녀석은 긴장은 풀지 않았지만 그것들을 쳐죽인다는 데 있어서 역사적인 협력을(여기서 다시 역겹게 웃었다 젠장) 가지는 데 동의했지.

아 그런데, 저 기스양키 A란 놈 이름은 뭐냐고? 가르바그라던가?

그러고보니, 확실히 일리시드들과 왜 거기서 마주쳤답니까? 일리시드, 기스양키, 기스저라이가 어비스에서 마주친다는 건 좀 이상한 일인데.

아아, 나중에 그 둘이 친해진 다음 들은 건데 말이지. 라이잔은 누군가를 추적하고 있었다더군. 자기 아버지가 먹혔기 떄문에 그녀석들을 계속 쫓는 중이었다고 하더라고.3)

2. 만남 이후

뭐 일리시드란 놈들은 생각보다 쉽더군. 아니 기쓰들이야 그놈들 죽이려고 별 짓을 다 하는 놈들이니 당연한가? 싸우고 나서 어정쩡한 건 마라켄과 그놈들이더군. 뭐랄까, 그래도 한번 같이 싸웠는데 지금 싸우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안 싸우기는 상대를 믿기 좀 난해했으니. 한동안 뚱해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오늘은 싸우지 않겠다” 어찌어찌 해대면서 가버리더군. 쯔즛

그러고 나서 한참이 지나고..나도 마라켄 녀석과 잠시 떨어져 있었지. 그녀석은 라크마라던가? 아무튼 그 문어대가리 척살대에 참가한답시고 자리를 비웠고. 난 설렁설렁 놀고 있었는데 그놈들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할 수 없이 쫓아갔지.

이야, 꽤 고생해서 찾았더니 의외의 얼굴들이 보이더군. 예상했던대로 라이잔과 가르바그라는 놈들이야. 그리고 이야기 들으니까 더 웃기던데. 아니 어비스 갔다가 문어 대가리 만나더니 여기 와선 왜 타나리 로드를 만난대?

마라켄도, 그리고 그놈들도 꽤 일행이 있었던 거 같지만 악마 떼거지들이었으니, 거의 죽고 걔네들만 살아는 있더군. 생명의 피해 뿐 아니라 영혼, 정신에도 꽤 피해가 있어서 사원에 돌아가면 되겠지만 그럼 양키들은 죽을 거 아냐? 나야 기쓰도 아니니 그럴 이유도 없고 해서 마라켄 목숨은 일단 살려주고 물어봤지. 그놈 대답이 걸작이더군.

“그들을 살려주길 바라네. (삐익) 그들은 내 손에 죽이기로 맹세했네.” 4) 그들이라고요? 허나 가르바그는.. 아아 나도 그 이야긴 들었네. 아니 나중에 차근차근 이야기해주지. 아무튼 간에 말이지. 그 당시엔 분명 세 명이서 '죽음의 맹세'를 나누었어. 난 그렇게 들었다네. 아무튼 당시엔 이상한 놈이라면서 일단 회복시켜주었지. 나중에 사원에 돌아오면서 이야기해주더군. (다시 잠시 오프 더 레코드가 있었다) 그래, 고난을 겪으면서 서로 이해했다랄까 뭐랄까, 요상한 방식의 이해같았지만 아무튼 그렇게 되었다더군. 그렇게 한동안은 꽤 잘 나갔어. 한동안이래도 기쓰들 감각으론 꽤 오래 되었나?

3. 파국

그런데 가르바그는 어째서 그들을 공격한 겁니까? 그건 맹세의 배신 아닙니까? 음? 죽음의 맹세인 이상, 그걸 가장 잘 지킨 건 그녀석 아닐까? 아아 농담일세. 본인끼리 지키는 맹세에 그런 무리를 이끌고 공격한 이상,5) 그건 좀 무리가 있겠지. 사실 아까 말한 대로 그 뒤에 대해서는 나도 계속 지켜보진 못 했네. 그는 나를 종종 찾아오긴 했지만, 종족 내에서 이야기 못 하는 문제니까 이야기했을 뿐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으니까. 본래도 그런 성격이었고..

아, 하지만 정말 웃겼던 순간이 있었지. 그녀석이 찾아와선 나한테 '연정'이 어쩌고 그 문제로 고민한다더군. 너 혹시 미쳤냐고 반문하니까 자기가 아니라면서 그 양키 중 한 명이라더군. 이야 정말 걸작이었어. 아무리 동족들한테 의논 못 한다 해도, (삐익-)인 나한테 (삐익)을 하고 있는데 사랑 문제 고민까지 이야기하나 보통?

뭐 그래도 내가 제법 오래 살았으니 말이지. 물어봤지. 성적 긴장감6)이 느껴지냐고. 마라켄은 담담히 전혀 아니라고 하더군. 뭐 그럼 할 수 없다고 그냥 거절하라고 했지. 응? 이상하다고? 뭐가?

아무튼 그 이후는 나도 잘 몰라. 그 뒤 가르바그가 맹세를 깨고 그 둘을 떠나 버렸다란 소식만 들었지.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런 일이 있었지…

4. 결론

많은 독자들이 눈치챘겠지만, (S가 눈치 못 챈 건 그의 종족 탓일거다.) 가르바그가 '죽음의 맹세'를 깨고, 그 둘을 고발해서 죽이려 했던 것은 그 '연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가르바그(성별이 이야기되지 않은 것은 S의 종족 문제다 역시)는 마라켄을 좋아했지만, 그가 거부했고 그러기에 그 관계를 거부하고 떠난 것이 아닐까? 결국 사랑이 모든 것을 일으킨 것이다.

그의 증언 기록은 유익했지만, 그 결론은 조금 조악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설로 불가능한 게 아니긴 한데, 또 다른 좀 더 확실한 가설이 있다. 마라켄에게 연정을 품었던 것이 라이잔이고 또한 라이잔을 가르바그가 좋아했다고 하자. (요새는 소설에서도 안 나올 삼각관계긴 하지만, 현실에선 가능하다.) 마라켄이 라이잔을 거부했건 어쨋건 간에, 그 광경을 본 가르바그에겐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가설 역시 사실이라 확답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마라켄은 사랑을 거부했고 가르바그는 사랑으로 인해 맹세를 깼다는 것일 것이다.

1)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안전은 여러 이유 중 하나일 뿐이라고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다.
2) 언제나 이렇게 시작한다
5) 본인의 In Part Of(1) 참조
6) 이른바 이야기에서 남주와 여주 사이에 튕기는 불꽃. 물론 불꽃이 튕기지만 안 맺어지는 경우도 있고, 이게 튕겨서 괜히 불편해지는 이성 심지어 동성도 있다. 필자 동족들은 속칭 업계 용어로 플래그라고 한다. (…)

댓글

소년H, %2007/%08/%29 %00:%Aug:

이거 패러디 다 알아보는 사람은 용자 (…) (사실 간접 출처로 하려 했는데 실패하는 바람에 연구자금이 줄지 않..(..))

 
로키, %2007/%08/%29 %06:%Aug:

휴머노이드도 아닌 종족에게 연애 고민을 상담하다니 마라켄 심히 안습이군요..(..) 그 운명적인(?) 맹세의 시작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글인 것 같습니다.

 
성큼이, %2007/%09/%02 %17:%Sep:

나는 이렇게 들었다… 로 시작하는 건 불경 아니던가요 […]

 
소년H, %2007/%09/%04 %17:%Sep:

맞아요 것도 패러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