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투쟁

우리의 건국사는 위대한 칼라인 듀리온 전하와 영광스러운 우리 선조들의 투쟁기일 뿐 아니라, 대제국의 작은 제후국에 불과하였던 제이피리스1)가 오늘날의 듀리온 왕국이 되기까지의 고난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듀리온 왕국이 거둔 승리들은 그야말로 “기적의 승리” 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돈울프 공이 남긴 다음 수기는 당시 건국왕 전하의 세력이 얼마나 미약한 것이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전격적인 정권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제이피리스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영주의 실정을 기회로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며, 제이피리스와 그곳의 새로운 지배자, 칼라인 듀리온도 그 흔한 존재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특히나 제이피리스의 주변에는 여러 대영주들이 포진해 있었고, 이들이 곧 “무엄한 반란군” 을 향해 엘레할의 징벌을 휘두를 것임은 어린 아이라도 쉽게 짐작할만한 일이었다.

칼라인 듀리온은 쿠테타 이후의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고 군비를 갖추는 등 보기 드문 명군의 자질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 재능으로도 열 배가 넘는 적을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유능한 관료였던 돈울프 공조차 당시의 제이피리스가 듀리온 왕국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예측은 차마 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제이피리스는 적의 침략을 막아내고, 주위 영지들을 빠르게 흡수해 나가면서 왕국으로 성장했고, 돈울프 공은 건국공신이 되었지요.

당시 제이피리스의 전력을 언급하기 위해, 건국왕 전하의 수기의 일부를 다시 개재합니다.

1월 8일.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다섯 배에 달하는 적을 격멸한 공을 높이 사, 세렌에게 웨스트랜드 공작이 쓰던 명마를 하사하였다.

필자는 이 두 수기에서 드러나는 피-아간의 전력에 대한 인식 차이를 줄곧 의문스럽게 생각해 왔습니다.

여러 다른 문헌들에서 알 수 있듯, 칼라인 전하의 수기는 간결 정확함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한편 돈울프 공은 유능한 명 관료로, 비록 수기를 쓰는 시점에서는 일개 평민의 신분이었지만 추후 그가 정계에 진출하여 보여준 수완을 생각해 볼 때, 마찬가지로 그의 현실 인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극히 낮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 수기 사이에 존재하는 극히 짧은 시차 동안, 제이피리스의 병력이 두 배 가까이 증강되었다는 것 이외에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 원인을 짐작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와중, 크리소스토무스 수사님께서 역사의 섭리를 발표하셨습니다.

지면을 통해서나마 수사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해당 기사를 통해, 왕국 건국의 큰 축을 담당한 우노스 정교회와 그 일원, 자비에르 대주교에 대한 이야기가 상세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필자는 자비에르 대주교와 관련된 기록을 검토하여, 그 중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하였습니다.

건국왕 칼라인 전하께서 제이피리스의 통치권을 확보하신 그 주, 제이피리스 광장에서 행해진 대주교의 연설문입니다.

“친애하는 여러 형제 자매 여러분께, 우리 주 데오스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금 우리의 주위에는 수많은 적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당당한 위세로 이곳 제이피리스를 향해 진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 강성하고, 또 그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금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러분도, 이곳을 침노하는 적군들도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요, 우리의 형제 자매들로 하여금 우리를 치게 획책하는 무리들은 엘레할을 섬기는 요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제이피리스는 또 무엇이며 웨스트랜드는 또 무엇입니까.

어찌하여 인간이 요정의 지배를 받으며 같은 인간을 쳐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 간단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적군은 창을 거꾸로 들고 항복해 올 것이니 수십, 수백만의 병사가 온다 하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정녕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이곳 제이피리스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인간의 역사를, 미몽에 사로잡혀 우리들 스스로의 손으로 꺼 버리는 것입니다.

항복은 곧, 엘레할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두려움 없이 맞서십시오. 거룩하신 하늘의 왕께서 이미 이 땅을 인간의 것으로 점지하셨으니, 비록 우리가 오늘 죽더라도, 우리의 자손은 이 땅의 주인이 되어 당당한 데오스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 짧은 연설이 제이피리스의 민중을 일치 단결케 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장으로 향하게 했고, 연합군의 병사들을 항복하게 하여 건국왕 전하의 충성스러운 병사로 만든 것입니다. 당시 우노스 정교회는 엘레할 신앙에 대항하는 새로운 종교로 등장하였지만 그 세력은 미미하였고, 특히나 그 신도들은 당시 기득권층이었던 엘레할 신도들에 의해 강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실질적으로 제이피리스의 민중들 역시 우노스 정교회의 신자로서 궐기하였다기보다, 지배계층과 피 지배계층 사이의 차이를 강조한 자비에르의 연설에 고취되어 봉기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편 당시의 건국왕 전하의 세력에 자비에르 대주교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세렌 경이나 마그누스 경이 건국 초기에서부터 줄곧 중용된 점에서 알 수 있듯, 건국왕 전하 역시 당시의 많은 지배자들과 마찬가지로 엘레할 신앙을 신봉하였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대주교의 “제이피리스 연설문” 이 건국왕 전하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건국왕 전하와 대주교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가 형성되기까지는 조금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설문은, 듀리온의 건국전쟁을 “인간 대 요정” 의 구도로 표현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서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건국전쟁이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의 전쟁이라는 거룩한 선포이자, 처음으로 민중이 역사의 전면으로 부각한 시발점이기도 한 것입니다.

추후 왕국이 기틀을 잡아가면서 우노스 정교회가 왕국의 국교가 되고, 자비에르 대주교가 주창한 “인간 대 요정” 의 기치를 공식적으로 내걸게 되면서, 듀리온 왕국은 본격적으로 제국의 최대 적수로 등극하게 된 것입니다.

1) 제이피리스에서의 쿠테타를 통해 건국의 기틀이 마련되었다는 관점은 운명과 왕의 견해를 따름.

댓글

_엔, %2007/%10/%20 %15:%Oct:

제이피리스 시절부터 자비에르 대주교는 칼라인과 함께 했고, 아직 국교로 선포되기 전인 시절부터 우노스 정교회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거군요. (흑. 건국 역사 굉장히 헷갈리기 시작했어요.) 마그누스나 세렌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칼라인은 어떤 입장이었을지 그런 것도 써보고 싶네요 ^^

 
정석한, %2007/%10/%20 %20:%Oct:

사실 윗글에서는 "칼라인과 자비에르가 함께했다." 는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습니다. "자비에르는 제이피리스 광장에서 연설을 행했다." 일 뿐이죠. 자비에르가 이미 칼라인과 함께했는지, 아니면 서로간에 일면식도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부분입니다. 어쩌면 연설을 계기로 두 사람이 서로 알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 점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원들의 나이스 아이디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종교사에 대해서는 그닥 밝지 않기 때문에 제가 그러한 부분을 자세히 다루기는 조금 그렇고. 또 설정상 제 연구원인 복스 양은 민중의 역할에 초점을 두고 있는만큼 자비에르가 당시 칼라인의 수하였는지, 원수였는지, 남남이었는지에는 일미리그램의 관심도 없겠지요. 그저 "자비에르가 한마디 했더니 민중이 일치단결해서 적을 몰아냈더라." 에는 관심이 많겠지만요. ^^;;

말씀하신대로 칼라인, 자비에르와의 관계에 관련해서 세렌이나 마그누스가 얽히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법 한데, 사실 제 글은 건조하고 재미가 없기 때문에 [비극의 히로인] 세렌양이 얽혀들면서 생기는 낭만적(?) 인 이야기를 잘 쓸 자신은 없습니다.

_엔님께서 이번 기회에 이쁘고 참한 이야기 하나 써 주시는건 어떠신가요? +_+

 
_엔, %2007/%10/%21 %19:%Oct:

앗. 그렇군요. 제가 충분히 꼼꼼히 읽지 않았나보네요. 그들간의 삼각관계에 관련된 낭만적인 이야기… 써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습니다 ;ㅁ;

 
정석한, %2007/%10/%21 %20:%Oct:

제 글이 부족한 때문이죠. 수정했습니다. ^^;

낭만적인 이야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_+

 
정석한, %2007/%10/%21 %01:%Oct:

제가 글을 집필한 의도와 다르게, 많은 분들께서 칼라인 - 자비에르가 저 당시부터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쪽으로 받아들이셨기에, 의도를 명확하게 밝히는 방향으로 글을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