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죽음

바람의 아들, 활을 당기다에서 드러난 궁수이자 음유시인 아넬리아드 아프 아위르의 비장한 죽음은 당대에 그랬듯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최근 발굴된 옛 제국 문서 중에 그가 전투 중에 죽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눈길을 끈다. 다음은 루오르 아마란타의 서기관이 남긴 글이다.

우리 앞에 끌려나온 사내의 모습은 비참했다. 지쳐서 축 늘어뜨린 검은 머리에는 피가 엉겼고, 온몸에 아로새긴 크고작은 부상은 붙잡히기 전에 격렬하게 저항한 과정을 웅변해주었다. 포박당한 채 무릎꿇린 그는 순전히 의지력으로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것 같았다.

“이 자가 그 아넬리아드 아프 아위르인가?”

아마란타 장군께서는 언제나 그렇듯 냉정했지만, 장군의 목소리에 숨은 차가운 분노를 나는 알아챌 수 있었다. 요정 살해자 자비에르와 그자의 총기가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느닷없이 쏟아지는 화살 때문에 애꿎은 부하만 잃으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때부터 장군의 표정에는 냉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나 허비한 후 마침내 수십 명의 희생을 내면서 병사들이 절벽을 올라 궁수들을 처리한 후, 자비에르와 그 일당이 칼라누스의 군대와 무사히 합류했다는 정찰대의 보고에 장군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그리고 그 굴욕을 안겨준 자, 그 유명한 바람의 아들 아넬리아드와 대면한 지금 장군은 감히 범접할 수도 없을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아프 아위르가 맞다는 병사들의 확인에 장군은 다시 명령하셨다.

“얼굴을 보이게.”

누구에게 하는 명령인지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아위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뒤에 선 병사가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 억지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지치고 창백한 얼굴을 한 포로는 천천히 눈을 뜨고 장군을 마주보았다.

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넬리아드 아프 아위르는 외모가 특별히 잘생기거나 못생기거나 눈에 띄는 데가 있는 사내는 아니었다. 고통과 피로에 허옇게 질린 얼굴은 흙과 땀, 피가 얼룩졌고, 창백한 피부는 지쳐서 힘없이 늘어졌다. 평상시에는 그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사내였을 것이다. 이제는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전쟁 포로일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눈을 떼기 어려웠던 것은 그 평온한 눈빛 때문이었을까? 이 상황에서 그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포로가 되어 적에게 둘러싸인 그에게는 어떤 거대하고 확고한 기운이 있었다. 겉모습은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사내였지만, 나는 이 자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넬리아드요.”

그래… 그 목소리였다, 화살비 속에 전우가 죽어나가던 그 격렬했던 몇 시간 동안 지시하고, 독려하고, 때로는 노래하며 이 골짜기 위 하늘로 울려퍼지던 그 청량하고 강인한 음성이었다. 엘레할의 축복을 받았다는 바드의…

“아프 아위르가 맞다는 말이지.”

장군은 병사를 손짓으로 물리며 천천히 다가서셨다. 아프 아위르의 머리를 잡고 있던 병사는 피묻은 손을 포로의 옷에 슥 닦고 물러섰다.

“배덕자 칼라누스와 학살자 자비에르의 뒤를 핥기에 정신없는 그 가수가.”

“그분들이 들으면 그렇게 말 잘 듣는 놈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할 것 같지만.”

바드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묻어났다.

“어쨌든 내가 그가 맞소.”

“그래? 말을 잘 안 듣는다는 말인가.”

장군은 바로 말을 받으며 포로 오른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다면 엘레할의 신탁이 내려졌을 때 그대는 어디에 있었는가?”1)

장군은 이번에는 그의 뒤편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칼라누스가 엘레할에게 등을 돌리고 붉은머리 해적 계집과 결혼하였을 때는?”2)

장군은 포로의 왼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머니 엘레할에게 노래의 축복이자 특권을 받은 그대가…”

장군은 이제 포로의 앞으로 돌아와 그를 내려보았다.

“자비에르가 아르베스의 신림(神林)을 범했을 때 어찌했는가?”3)

아넬리아드 아프 아위르는 고통스럽게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장군께서는 어찌하셨소?”

아마란타 장군이 무슨 말인지 되묻기 전에 아넬리아드는 말을 이었다.

“그 신탁이 죄없는 사람을 짐승처럼 사냥하고 불쌍한 아이를 숲에 내몰아 죽일 것을 요구했을 때 장군은 어쩌셨냐는 말이오.”

“네 이놈!”

장군의 노호에 나는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났다. 주변을 보니 상당수가 마찬가지로 하고 있었지만, 아프 아위르는 태연해 보였다.

“가수 따위가 목숨이 몇 개라고 감히 여신을 모독하느냐!”

“여신을 모욕하는 것은 바로 너다, 텔라르의 아들 루오르여!”

바드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신성한 영감을 받은 시인의 위엄이 깃들었다.

“아름답고 잔혹한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으로 나라를 내어주면서 모독을 논하느냐? 엘레할 대신 요정을 숭배하는 자와 여신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않다!”

스르릉. 장군은 어느새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아까 전투 중이라면 몰라도 포로로 잡은 지금 신의 축복을 받은 음유시인을 죽이는 것은 안 될 일이었지만, 설마 저 냉정한 장군이 그 사실을 잊어버릴 리는 없었다. 그저 포로에게 겁을 주어서 자기 위치를 상기시킬 뿐이겠지. 문제는 전혀 효과가 없어보인다는 점이었지만.

“이놈… 다시 말해보거라.”

포로를 가리키는 검끝이 가볍게 떨렸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장군이 아프 아위르를 굳이 사로잡으라고 명령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장군은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루크두의 신성한 물을 마시고 마엘 산의 동굴에서 수련한 가장 신성한 바드가 어째서 엘레할에게 등을 돌렸는지.

그런데 역으로 그 바드는 돌아선 것은 자신이 아니라 아마란타 장군이라고 질책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바드의 말이 옳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장군은 견딜 수 없었으리라. 그것은 마치 그의 모든 인생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아프 아위르의 말은 절대로, 절대로 옳아서는 안 되었다. 필요하다면 입을 막아서라도.

“엘레할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자비에르 같은 이교도와 그자의 왕, 엘레할의 이름을 이 땅에서 지워버리려는 엘레할의 적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네가! 나에게!”

아넬리아드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표정은 너무나 밝고 평온해서 갑자기 비현실감이 들었다.

“어리석은 자.”

바드는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엘레할의 영광이 신도 수나 교세 같은 것에 달렸다고 정녕 생각하는가?”

그는 천천히 한쪽 다리를, 그리고 다른쪽 다리를 세워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상 때문에 비틀거리며 그는 장군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엘레할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해서 여신의 이름이 지상에서 사라지겠는가, 보되 보이지 않는 불쌍한 자여.”

“그만…”

경고하듯 장군은 칼을 내밀었지만, 아프 아위르는 말을 이으며 다시 한 발짝 다가섰다.

“샘물에 비치는 햇빛을 지울 수 있는가? 처녀가 연인을 돌아보는 눈빛을? 고통스럽도록 아름다운 이 세상을 밤새 노래하는 시인의 마음을? 이들이 바로 엘레할의 이름이다!”

그는 멈춰서서 아마란타 장군을 마주보았다.

“자비에르 그 뻣뻣한 친구는 그 마음을 알고 있어. 생명이 생명을 갈구하는 그 몸짓을 누구보다 처절하게 이해하는 한, 어떤 신을 부르든 그는 엘레할에게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드는 넉넉한 미소를 지었다.

“너희에게 잡히게 둘 수는 없지. 그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지만, 적어도 목숨은 아깝지 않은 사람이다.”

“감상적이구나, 음유시인이여.”

장군은 코웃음을 쳤지만,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고 이마에는 땀이 솟아있었다.

“그런 말로…”

“그런데 말이다. 텔라르의 아들을 위해서는 누가 목숨을 바칠 것 같느냐?”

장군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를 마주보는 음유시인의 눈빛은 형형했다.

“믿음의 외형에 지나지 않는 오래되고 악취나는 껍데기를 꼭 붙들고, 그걸로 모자라 온 세상에 다 덮어씌우려는 자를 위해 누가 죽겠느냐?”

칼을 꽉 쥐는 장군의 손이 떨렸지만, 아넬리아드, 저 어리석은 광인, 저 신성한 시인은 외려 언성을 높였다.

“뱀에게도 껍질을 벗는 지혜는 있는 법이다. 뱀에게 미안해서 독사라고도 부르지 못할 놈아!”

장군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분노한 맹수의 포효였다. 이를 드러내고 눈을 하얗게 번득이며 그는 검을 쳐들었다. 나는 막으려고 달려갔지만, 두 발짝 떼기도 전에 검은 음유시인을 내리치고 있었다. 붉은 피가 탄원하는 손처럼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나는 마치 내가 칼에 맞은 것처럼 우뚝 멈춰선 채, 고목처럼 쓰러진 시인을 내려다보았다. 어깨에서 가슴까지 검이 내리친 상처에서, 코와 입에서 피가 솟으며 땅을 적셨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빛은 점점 빛이 꺼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입술만은 아직 희미하게 달싹거리고 있었다.

따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귀를 기울였다. 그는 웃고 있었다… 미소지으며 여신께 속삭이고 있었다.

“흐려지는 일 없는… 눈빛이여… 밝히 살피소서! 별빛… 그림자로… 들어가니, 나…를… 용납하소서…”

작게 한숨을 쉬며 그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바드의 마지막 노래였다.

“죽었는가?”

올려다보자 장군의 그림자가 내 위에 드리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의 눈을 감겨주려고 손을 뻗었지만, 장군의 목소리가 더 빨랐다.

“그만두게.”

그리고 장군은 옆에 선 병사에게 명령했다.

“목을 베어서 창대에 효수하라. 몸은 이곳에 버리고 간다.”

병사는 입을 멍청하게 벌린 채 장군을 쳐다보았다. 나는 차가운 공포가 가슴을 스쳤고, 같은 공포가 병사들 사이로 파문이 되어 일었다.

저주받는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엘레할의 축복을 받은 음유시인을 죽인 것만으로도 이미 죄를 지었는데, 시체를 잘 수습해 돌려주고 배상금을 낸 후 속죄의 제물을 여신께 바쳐도 될까말까한 상황에 시체를 훼손하고 까마귀밥이 되게 내버려둔다고?

“무엇하고 있는가?”

장군이 검을 떨치자 음유시인의 피가 흩날렸다. 주변에서 모두 핏방울을 피해 흠칫 물러났다.

결국 장군의 명령은 이행되었고, 우리는 그 골짜기에서 나와 파르데인 성의 거점으로 귀환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효시했던 머리는 어느날 아침 사라져 있었다. 아넬리아드 아프 아위르가 죽은 바로 그날부터 병사들이 줄줄이 탈영하기 시작했을 때 장군이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는 모르겠다. 하물며 장군의 명령을 따라 음유시인의 목을 베었던 병사가 손가락이 잘린 채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에는…

음유시인의 머리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행군하는 길목에 있었던 케니다드라는 마을을 굽어보는 언덕에 마을 사람들과 순례자들이 꽃을 바치는 작은 사당이 생겼다고 듣기는 했다. 그 마을이 언젠가부터 원래 이름보다는 카델파르드, 시인의 마을이라고 불린다는 이야기도.

극과 극은 맞닿는다고 하였던가. 죽어가는 순간까지 엘레할의 신성한 노래를 한 시인이 엘레할을 부정하는 자비에르 대주교를 오히려 신앙의 형제로 여기고, 엘레할을 섬기는 루오르 아마란타를 꾸짖은 것은 어떻게 보면 역설이다. 그러나 엘레할의 바드인 그가 어째서 목숨까지 바쳐가며 듀리온 왕국의 기치를 따랐는지 우리는 그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껍질을 벗고 새로워지는 뱀처럼, 그는 신앙 역시 형식이 아닌 그 정신이 끝없이 갱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설사 그 결과 이 땅에서 요정과 엘레할의 이름이 사라지더라도 그 역시 그에게는 벗어야 할 껍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오래 전에 죽은 이교도의 신앙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을까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한편 역사적으로는 아넬리아드가 자신과 부하들을 희생해 자비에르와 천의 성기사, 그리고 그들의 총기를 지켰기에 이후에 레드리스의 죽음과4) 이라하 전투5) 같은 승리가 가능했던 것은 이미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루오르 아마란타의 손에 죽음으로써 적장에게 치명타를 가한 것일지도 모른다. 서기의 기록에서 나타나듯이 아마란타의 신성모독은 부하들의 신망을 잃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말이다.

물론 이것은 아마란타 자신의 성격적 결함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결과였다. 이라하 전투에도 나온 베르트랑의 일화에서도 드러나듯, 아마란타는 분노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허점이 있는 인물이었다. 아넬리아드는 그 결점을 이용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시인의 본업 아니었을까? 사람을 자신의 진실과 끝없이 대면시키는 것이 바로 시(詩)의 역할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