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 활을 당기다

복스 포풀리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논객이 검은 철이라는 훌륭한 기사에서 다루었듯 듀리온 왕국이 총기를 폭넓게 사용한 것은 전쟁의 양상을 획기적으로 바꾸었고, 건국의 공헌 요소 중 하나였다. 그 글에서 나왔듯 당대의 총기는 매우 고가의 물건이었던 반면 다루기는 쉬웠으므로 어떻게 보면 사람보다 무기가 더 귀중한 자원이 되는 역설이 생기기도 했다. 총기가 얼마나 중요한 물품이었는지는 당대의 실록에 나온 다름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메르크 구릉지대에서 제국의 기습으로 많은 병사를 잃고 총기를 탈취당할 뻔하였으나, 자비에르 대주교가 이끄는 총병대의 잔여 인원이 수레에 총기를 실어 겔레안 협곡과 드위그 늪지대를 지나 강행군하여 무사히 수도로 귀환하니, 왕께서 대주교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셨다. 그러나 자비에르 대주교는 산 사람보다는 목숨을 바친 이들의 공이 더욱 크다고 하였다.

과거에 묻혀살다 보면 때로 과거의 인물들을 살아 숨쉬는 사람처럼 친근하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마치 잘 아는 사람이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때처럼 작은 부정합을 크게 느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대주교의 답변이 다소 '그답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신심깊은 설교가답게 언제나 데오스의 이름을 찬양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 그가 데오스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는 답변을 한 것은 조금 의외였다. 어쩌면 실록 기록자가 빼놓았을 수도 있고, 평탄하지 않은 경로로 쫓기는 여정 끝에 아마도 신앙의 형제를 다수 잃고 심적, 신체적으로 지친 반응이었을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필자는 그 생각을 일단 밀어놓았었다.

그러던 중, 얼마 전 성당과 수도원 비치 문서들을 대대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새로 빛을 본 기록 중 겔레안 협곡 철수 사건을 다룬 개인 수기를 찾았을 때 필자는 위의 기록을 보며 느꼈던 어색함을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시대가 바뀌면서 필연적으로 사라져가는 것들의 상실감을, 그리고 종교나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는 헌신과 희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은 '천의 성기사' 중 하나였던 에델버트 형제가 안셀모 수사라는 수도승에게 구술한 회상이다.

언덕에서 전투가 끝나고 추적당해 겔레안 협곡으로 피하면서 우리 꼴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형제님. 형제들이 수없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본 데다가 싸우고 또 후퇴하느라 몸은 너무 지쳐서 발 하나 떼기도 어려웠지요. 루오르 아마란타라는 자의 교활함에 이를 갈면서, 적에게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총을 가득 쌓은 무거운 수레를 끌면서… 죽은 노새 대신 형제들이 직접 수레를 몸에 매고 끌었으니, 그 전투와 후퇴길에서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그려.

협곡을 따라 오르막길을 계속 오르다가 쉬지 않으면 더는 갈 수 없게 되자 자비에르 대주교님이 잠시 휴식을 명하셨습니다. 궁수이며 척후 책임자였던 아넬리아드 아프 아위르가 우리의 후위를 지키며 적의 움직임을 살피던 척후병들에게 보고를 받고는 말없이 근처 언덕으로 올라갔지요. 자비에르 대주교와 저와 몇몇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바드언덕 위에 올라서자 지금까지 지나온 협곡 전체가 입구까지 확 눈에 들어왔습니다. 새벽의 어스름 속에서 저 멀리 협곡으로 들어오고 있는 적의 모습까지도. 추격해 오는 적병의 모습에 우리는 그저 데오스의 구원을 바라며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열을 정비해서 여기서 그들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형제 중 하나가 말했습니다.

“계곡이 좁으니 수가 적어도 데오스의 축복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대주교님!”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인 총병대와 약간 남은 궁수대만으로?”

아넬리아드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코웃음을 쳤습니다.

“다 도륙당하고 나서는 적한테 저 시커멓고 흉물스러운 물건들을 통째로 넘길 생각인가.”

그의 불손한 태도를 몇몇 형제들이 꾸짖으려 했으나, 자비에르 대주교님은 한 손을 들어 저지하셨습니다.

“그만! 말다툼할 시간이 없다. 도망갈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다면 제국의 손에 넘겨주느니 여기서 총기를 모두 못쓰게 만드는 것이 낫다.”

“루오르 아마란타가 손에 넣지 못하는 건 마음에 들지만, 그렇게 하면 폐하도 조금은 아쉽겠지.”

아프 아위르는 메고 있던 활을 손에 들고는 느슨하게 풀었던 활시위를 다시 재었습니다.

“이곳이라면… 숙련된 궁수 몇으로 군대라도 발목을 잡을 수 있소.”

“그것이 무슨 뜻인가?”

우리가 경악하여 쳐다보는 동안 자비에르 대주교께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으셨습니다.

“나는 남겠소. 적어도 몇 시간은 벌 수 있으니 데오스의 이름을 부르든 뭘 하든 꽁무니에 불 붙은 것처럼 튀도록 하시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넬리아드 아프 아위르는 이교도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일 뿐 아니라 언제나 데오스의 사제들을 조롱했으며, 화기를 가리켜 '추악하고 비겁한 무기'라고 말하기 주저하지 않은 자였기에. 불손한 이교도의 마음조차 움직이신 데오스를 찬양하라! 잠시 침묵하던 대주교님이 마침내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그대의 영혼에 데오스의 축복이 있기를 바라겠네, 아넬리아드 아프 아위르.”

전통에서 화살을 뽑아 땅에 꽂던 아넬리아드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죄스러운 노래를 궁성에서 부르면 안 된다고 떠들던 때하고는 사뭇 말투가 다르군. 아르베스의 신성한 숲을 베어넘길 때하고도 말이오.”

주교님은 그 말에는 답하지 않으시고, 대신 물으셨습니다.

“전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가?”

“폐하께… 바람의 아들은 신의를 지켰다고 전해주시오. 시대가 어떻게 변해도 내가 한 충성의 맹세는 변하지 않는다고.”

대주교님은 끄덕이며 돌아섰습니다.

“어서 출발합시다, 형제들이여. 시간이 급합니다.”

하지만 저는 잠시 뒤에 남아 아넬리아드 아프 아위르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비록 그는 옛 신앙을 믿는 이교도였으나 용감하고 숭고한 희생을 하려 하고 있었고, 그의 영혼이 저주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아넬리아드, 데오스 앞에 서기 전에 교회와 신앙에 대한 죄를 참회하시오. 그래야..”

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땅에 침을 뱉었습니다.

“착각하지 마시오. 노래를 미워하는 당신들의 신이나 불을 뿜는 저 흉물스러운 장난감이 예뻐서 그런 건 아니니까. 우리 목숨으로 벌 시간을 헛소리로 낭비할 셈이면 당신 배때기부터 화살을 박아줄까?”

“에델버트 형제!”

언덕을 내려가시던 대주교님이 엄격하게 부르시자 저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이교도에게 등을 돌린 채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천히 동이 터오는 하늘을 배경으로 활을 들고 언덕 꼭대기에 서서 협곡을 내려다보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의 얼굴에 가득한 것은 분노도, 두려움도 아닌 깊은 평온이었으니까요.

궁수대는 대부분 지휘관과 함께 남겠다고 했지만, 우리에게는 척후도 필요했으므로 아넬리아드는 아내나 아이가 있는 사람들은 귀환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결국 시간도 없었고, 할 말도 많지 않았기에 우리는 서둘러 출발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많다 해도 우리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려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궁수우리가 협곡을 따라 서둘러 이동하는 동안 궁수대가 목숨으로 시간을 벌려고 준비하는 언덕 위에서는 맑고 강인한 목소리가 차가운 새벽 바람을 따라 들려왔습니다. 지금도 그 노래는 기억에 선합니다.

나의 맹세는
계절마다 갈아입는 옷이 아니며
나의 맹세는
찬바람에 스러지는 꽃이 아닐지니.

나의 맹세는
발 밑의 대지이니 변하지 않으며
나의 맹세는
거목이니 뿌리가 흔들리지 않으리.

나의 맹세가 나의 명예가 아니라면
나의 이름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의 맹세가 나의 생명이 아니라면
나의 호흡에 무슨 유익이 있는가?

마지막으로 한 번 돌아보았으나 이제는 떠오르는 해가 눈부셔서 궁수들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데오스의 광휘가 그들을 삼킨 것처럼… 그런데도 이동하면서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어, 내 곁에서 걸음을 옮기는 대주교님에게 여쭐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주교님… 끝까지 데오스와 교회를 배척한 아넬리아드 아프 아위르의 영혼은 저주받는 것입니까?”

저는 그렇다고 배워왔지만, 왠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저주한 교회의 가장 열렬한 신도들의 목숨과 그가 저주한 무기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아프 아위르의 모습 앞에서는. 대주교님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영혼에 대한 판단은 내가 아니라 데오스의 몫입니다.”

우리는 아넬리아드 아프 아위르의 마지막 노래를 들으며 지친 몸과 귀중한 화기를 끌고 겔레안 협곡을 따라 후퇴했습니다. 그만한 목소리와 재능은 데오스께 속한 것이라고, 그런 순수한 희생을 그분께서 내치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싶습니다만, 어리석은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저 데오스께서 그들의, 그의 영혼에 자비를 베푸시길.

꽃은 지고 사랑은 죽고 세월은 변해가나
나의 맹세는 저 산처럼 시간의 증인이 되어
달콤하던 모든 것이 재와 먼지로 스러져도
나의 맹세는 나 살아간 증거가 되리라.

나의 맹세는
편의와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며
나의 맹세는
사랑보다 깊고 죽음보다 강하리.

나의 맹세가 나의 명예가 아니라면
나의 이름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의 맹세가 나의 생명이 아니라면
나의 호흡에 무슨 유익이 있는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이자 무인의 죽음이 그가 살아갔던 시대의 황혼과 겹쳐보이는 것은 필자의 착각일까. 새로운 신앙과 신무기 앞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던 아넬리아드 아프 아위르1)가 바로 그 신앙의 신자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도록, 그리고 그가 혐오했던 무기가 제국에 넘어가지 않도록 목숨을 바친 것은 어떻게 보면 잔혹한 역설이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그래서 그의 희생은 더욱 갚지다. 그가 그렇게 목숨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의견 차이와 상호 반감을 넘어서는 공통 가치, 바로 듀리온 왕국에 대한 충성 때문이었다. 부르는 신의 이름이 데오스이든 엘레할 여신이든 그들은 똑같이 듀리온의 신민이었다. 다문화적 전통과 협력은 건국부터 이미 우리의 역사적 유산이었던 것이다.

아넬리아드와 자비에르의 마지막 대화를 생각하면 필자가 이 글 첫머리에 언급했던 부정합, 즉 자비에르 대주교의 완곡한 답변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자비에르가 보기에 아넬리아드 아프 아위르는 회개하지 않은 이교도였다 해도 그 숭고한 희생의 가치는 조금도 덜해지지 않기에, 아넬리아드의 희생을 아넬리아드가 섬기지 않은 신에게 돌리는 것을 자제한 것은 고집센 이교도에 대한 대주교의 작은 예우였을지도 모른다.

혹자는 신시대에 합류하지 못한 아넬리아드와 같은 인물은 구시대의 유물이요 역사의 패자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나 세렌이나 마그누스 같은 이들의 행적을 오늘날 역사학자들이 활발하게 밝혀내고 있으며 아프 아위르의 작품도 재조명받고 있는 현실 속에서 과연 그를, 그들을 역사의 패자라고 할 수 있을까. 충성의 맹세를 지키고자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그 긍지높은 모습이 패배라면 성공은 무엇이고, 승리는 무엇인가.

1) '활을 당기는 바람의 아들'

댓글

정석한, %2007/%10/%30 %11:%Oct:

와와! 기다리던 내용의 글이 올라왔군요. 마치 뜻밖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입니다. +_+

 
로키, %2007/%10/%30 %11:%Oct:

'검은 철'을 보고 딱 필이 꽂히더라고요. ^^ 말씀대로 여전히 숙련된 전사들은 전쟁에서 큰 활약을 했을 것 같고, 아넬리아드와 휘하 궁수대의 희생도 그들의 전술적 가치를 역설해주고 있죠. 그러면서도 한편 시대의 대세는, 그리고 왕국에 더 절박한 것은 총기인 것을 알고 그런 희생을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수의 궁수가 목숨을 바쳐 적의 움직임을 봉쇄한다는 발상은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따온 것입니다. 바드 그림은 여기, 궁수 그림은 이곳에서 가져왔습니다.

 
_엔, %2007/%10/%31 %11:%Oct:

허억. 로키님. 그 사이트 들어갔다가 정말정말 *흔하지 않은* 보물 같은 핀로드 펠라군드의 일러스트를 발견했습니다. 감사!

 
오승한, %2007/%10/%30 %14:%Oct:

사실 여기에 대해서 좀 더 구세력의 '시대착오적이고, 어리석고, 비참한' 최후를 그리려고 했는데(총기 앞에 무모하게 돌격하는 기사대라든지….) 선수를 빼앗겼군요(쳇!).

쓰려고 했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이지만,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

 
_엔, %2007/%10/%30 %17:%Oct:

으아아. 조연인 줄로만 알았던 아넬라이드가 이런 인물이었다뇨! 처음에 해적여왕과의 만남에서 '궁수 겸 바드'라고 쓰실 때부터 이런 반전을 예상하셨던 것이었나요! 단순히 얌전한 역사의 관찰자가 아닌 스스로 행동하는 영웅이었군요, 우리의 아아아 씨는. 단순하면서 운치 있는 시들이랑 그림이 너무 잘 어울려요 ㅡ 의견이 달라서 공존할 수 없는 세력들이 서로를 존중해주고 인정해주는 모습도 마음에 들고요! 감동했어요 ㅠㅠ

 
로키, %2007/%11/%01 %02:%Nov:

오승한/ 그것도 안 될 거 없겠는데요? 아넬리아드야 뭐 비교적 괜찮게 갔지만 자존심에 못이겨 바보같이 간 사람들도 있겠죠. 재밌게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

엔/ 검은 철까지는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그 글 보고 나니까 아넬리아드가 이런 식으로 죽었으면 재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신의 이념을 위해 죽는 것도 고귀한 일이지만, 싫어하는 사람과 설 자리 없는 새 시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건 그 이상으로 고귀한 희생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감정이 아닌 원칙을 위해 죽은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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