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하 전투

아홉 번 말을 달려 적진을 종횡하니

이름난 용장 호걸도 따르지 못하더라

검이 부러지고 방패가 깨어져도

그 기상만은 최후까지 꺾이지 아니함이니

배신자여, 그대 가슴에 수치심이 있었다면

어찌 이날 붉은 깃발이 찢겼겠는가1)

서문

제이피리스를 시초로 하여, 라인부르크에 이르기까지 듀리온 왕국의 발길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라겐하임이 무너졌고, 듀리온 왕국이 에레모스의 패자가 되는 것은 마치 시간 문제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듀리온 왕국의 행보는 일순 주춤하게 됩니다. 남은 에레모스 반도의 세력을 건국왕 전하에 못지않은 속도로 규합하고, “황정 복고” 의 기치를 높이 든 일세의 호걸, 루오르 아마란타 경의 존재가 그랬습니다. 많은 제후국들이 “제국의 진정한 후예” 를 자처하면서도 황제 테르시야누스에게는 충성을 다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제국의 정통성은 인정하고 이용하려 하면서도 정작 땅에 실추된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거나, 신하로서의 의무를 다하기는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황제에 충성을 맹세하고 황제의 이름 앞에 여러 제후들을 규합한 루오르 아마란타 경은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실제로 황제의 칙명이라는 명분을 적절하게 사용해 가면서,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계책으로 주위 제후국들을 병탄해 간 그 수완은, 건국왕 전하의 “최후의 숙적” 으로 불리기에 조금의 손색도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루오르 아마란타는 병력을 이끌고, “무엄한 반란군” 을 징벌한다는 명분 아래 듀리온 왕국을 향했고, 건국왕 전하 역시 그에 맞섰습니다. 양 군이 격돌한 것은 지금의 이라하 지방이었고, 그 때의 결전에서 루오르 아마란타는 후세에 길이 남을 용맹을 과시하지만 결국 패배하고 맙니다.

당시의 전투를 조명하기 위해 필자는 여러 자료를 수집하였습니다. 결전을 앞둔, 브레넌 장군의 일지의 일부입니다.

루오르 아마란타는 총 7만 3천의 군사를 이끌었다. 이에 대항하는 왕국군은 6만 6천으로, 다소간의 병력 차이는 있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라하에 먼저 도착한 쪽은 아마란타군으로, 도착하자마자 진을 쳤다. 포진 만으로도 그 군사적 재능을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그 자신은 가도를 제압한 후, 길을 끼고 본진을 두었다. 본진에서 떨어진 오포스 산에 2만의 병력을 두었는데, 이라하에 진군한 아군은 이들을 측면에 두게 되어, 반포위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니 실로 불리했다.

아군은 세렌 장군을 좌익에 두고, 아스파 엔듀리온을 우익에 두기로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오포스의 적군이 좌익의 아군을 강하게 공격할 것으로 본 때문이다.

보통은 선봉을 맡는 것이 무인의 영광이라 하지만, 이번 경우는 좌익을 맡는 것이 그러함이다.

늦게 전장에 도착한 왕국군은, 산기슭을 끼고 반원 형태로 완벽한 포위진을 갖춘 아마란타군2)의 포위망 안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서 진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왕국군은 최대한 진지를 좁게 구성하여 밀도를 높이고, 오포스의 별동대로부터 협공을 받는 좌익에 불패의 명장 세렌을 포진시켜, 한치도 물러섬이 없는 진지를 구축한 상태로 결전의 날을 맞이하였습니다.

개전 - 전장을 수놓은 꽃의 마법사

브레넌 장군의 일지에는 당시의 전황이 드러나 있지 못합니다. 이는 결전 당일, 브레넌 장군이 안타깝게 전사했기 때문입니다. 개전 상황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진 뤠이신의 일지를 대신 개재하였습니다.

이윽고 새벽 안개가 걷히니, 청량한 바람이 불어옴이라. 이제 결전을 목전에 두고 대적을 맞이하니 감회가 무량하다. 이제 주상의 군령 한 마디에 장졸들이 노도처럼 진군할 것이나, 적병의 세력 또한 크고 넓으니 승패는 짐작키 어려움이라. 많은 장졸들이 분주하게 경계를 갖추고, 싸울 채비를 마련하는 와중에 군진이 소란하였다. 돈울프가 “적습인가?” 하고 부르짖자 초병이 달려와 “아니올시다. 마그누스 경이 적정을 시찰하러 가신다 하여 브레넌 장군과 잠시 언쟁하였나이다.” 라 답하였다. 돈울프가 사색이 되어 “주상의 장령 없이 적정 시찰이라니 불가하다!” 라고 부르짖었으나 이미 때가 늦었음이라. 뒤이어 일성 포화와 함께 빛이 난무하였고, 군졸들의 함성 소리가 천하를 진동하더라.

당시 왕국군의 선봉은 브레넌 장군이었으나, 개전은 마그누스의 손으로 행해진 것입니다. 정찰을 구실로 브레넌 장군의 진지를 통과한 마그누스 경은 그대로 적진에 선제 공격을 가하였고, 뒤늦게 마그누스의 의도를 눈치챈 브레넌 장군 역시 공격을 개시하였고, 아마란타군 역시 이에 응전하여 이라하 전투가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일설에는 세렌 장군을 가장 위험한 장소에 “총알받이” 로 보낸 것에 반감을 품은 마그누스가, 선제 공격의 명예를 브레넌 장군으로부터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만. 그에 관련된 상세한 사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전투가 끝나고 전과를 계산할 때, 적의 선봉을 궤멸시킨 공훈은 마그누스에게 돌아갔으니, “꽃의 마법사” 의 위용을 짐작하게 합니다.

서전 - 공훈을 다툰 왕국군의 고전

그 당시까지 많은 장군들이 공을 세웠으나, 세렌 장군만한 공을 세운 이는 없습니다. 굳이 비견하자면 브레넌 장군 정도이지만, 세렌 장군과 비교하면 그 전공은 확연히 뒤지는 감이 있었습니다. 그 외의 다른 장군들은 그들과 비교하면 전공다운 전공을 갖지 못한 상태였으며, 이제 제국군의 총력이 집결한 이상, 이번 이라하 전투 이후로는 큰 전공을 세울 기회도 얼마 없음이 확실하였습니다. 이에 각 부대 지휘관들은 “루오르 아마란타의 목을 친다.” 며 진군을 서둘렀습니다.

당시 왕국군이 그 포진 면에서 우위를 점하는 점이 있다면 이는 오로지 포진의 밀도 뿐으로, 전체적으로는 크게 불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터운 종심진을 편 이상 아마란타 군의 공격을 방어하여 예봉을 꺾은 뒤에 그 두터운 밀도로 역습을 가하는 쪽이 용병학의 이치에 맞는 일입니다. 실제로 당시 세렌, 브레넌을 비롯한 왕국군의 주요 명장들은 적극적 공세를 피하고 시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일부 일선 지휘관들이 공을 다투어 폭주하여 그 진열을 흐트러트리니, 이는 아마란타군에게 좋은 반격의 빌미를 제공하였을 뿐입니다. 아래의 수기가 당시의 전황을 잘 알려준다 하겠습니다. 당시 종군한 신하중 한 사람의 수기로 보이지만, 그 신분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실로 지리멸렬하구나! 브레넌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국왕께서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으셨다. 이미 중군의 선두는 혼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전열은 붕괴되었다. 광기가 전염병처럼 번져, 중군의 각 부대는 성난 황소처럼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기세에 아마란타군이 물러났으나, 일시적인 것으로 곧 통렬한 반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각 지휘관들이 폭주하여 공을 다투니 브레넌 장군도 통제하지 못하는 줄 아뢰오.”

전하께선 발을 동동 구르셨는데, 전하께서 감정을 드러내는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즉시 아스파에게 전령을 보내라. 우군을 진군하게 하라! 적의 주의를 돌려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어야 한다!”

전개 - 부동의 검은 백조

중군의 예기치 못한 고전에 비해, 좌우 양익의 전세는 비교적 쉽게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적의 주된 공격을 방어해야 하는 좌군에 비해, 우군은 온존될 수 있었는데, 이는 아마란타군이 병력을 떼네어 오포스에 별동대를 둠으로 인해, 주 전장에 투입된 병력은 오히려 왕국군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듀아라르크, 아스파 엔듀리온3)이 이끄는 천 오백의 기병대는 그 기동성이나 파괴력 면에서 왕국군 제일의 전력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아라르크는 진군을 거부합니다. 그가 여러 성을 함락시킴에 있어서, 대군으로 성을 포위하고 항복받는 전법을 즐겨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아스파는 살생을 병적으로 싫어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많이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아스파가 진군을 주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이 주요하였고, 특히 아스파를 시기하는 무리들은 이 일을 “피를 두려워하는 겁쟁이” 라고 두고 두고 비웃게 됩니다. 저는 그러한 기존 관점과 다른 이유에서 진군 거부의 이유를 알려주는 문서를 발견하였습니다. 단순히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진군 거부는 현명한 판단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오포스의 적진이 궤멸한 이후 좌, 우익이 일제히 아마란타군을 공격하여 단번에 전황을 결정짓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아스파는 건국왕 전하의 눈 밖에 나게 됩니다.

“지금은 진군할 때가 아니야.”

왕자님은 그 단정한 얼굴에 조금의 표정 변화도 드러내지 않으셨다.

“하오나.”

“전장에 나서면 일선 지휘관의 판단이 우선하는 법이다. 군령을 어긴 죄를 묻는다면, 지금 전열을 흐트러트리고 있는 자들부터 끌어다 벌해야 할 것이 아닌가.”

나를 돌아보며, 왕자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피아간에 병사들이 뒤섞여 있으니, 지금 기병대가 출진하는 것은 소득이 없는 일이다. 중군에 전령을 보내, 지금은 아직 시기가 아니라 전하라. 비록 전열이 흐트러져 적의 반격을 허용하고는 있으나 아군은 적보다 병력이 많고 또 달려드는 기세가 있으니 반드시 지금의 혼란은 수습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왕자님은 새와 같은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셨다. 그 모습을 본 동료 하나가 몸을 떨며, “왕자님의 군략은 가히 빼어나시다. 보라, 지금도 적의 빈틈을 찾고 계시지 아니한가.” 라고 중얼거렸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분의 시선은 줄곧 오포스 산에, 그곳에 진을 친 적군에, 그리고 두 배에 달하는 그들에 맞서야 하는 세렌 장군의 아군 좌익에 못박혀 있다는 것을. 왕자님께선 “신호와 함께 일제히 출진할 수 있도록 채비를 늦추지 말라.” 하셨는데, 오포스의 적군이 움직이는 순간 이름 높은 듀아라르크의 날개는 그곳을 향해 펼쳐질 것임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전개 - 오포스 군, 붕괴

그 시점에서 루오르는 승리를 확신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중군의 혼전이 그대로 계속되는 동안, 오포스의 별동대가 왕국군을 덮치면 그대로 끝나는 것이었으니까요. 중군에서는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서전에서의 무모한 진군으로 인해 왕국군은 그 진형이 흐트러져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고 있었으나, 브레넌 장군의 노련한 지휘로 차츰 전열을 정비해 나갔습니다. 그럼에도 중군에서의 왕국군의 열세는 변함없는 사실이었습니다. 한편 오포스의 별동대는, 세렌이 이끄는 왕국군 좌익의 두 배에 달하는 병력이었고, 또 높은 곳에 진을 치고 돌격해 내려가는 기세를 살리게 되니 대단히 유리하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루오르가 별동대로 하여금 맹공을 가하게 지시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어느 지휘관이나 지루한 소모전은 원치 않는 법이고, 또 왕국군 중군의 혼란이 수습되면 때를 놓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봉화를 보고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던 오포스 별동대가 크게 혼란해진 것은, 별동대 최 후미에 위치하였던 베르트랑 부대가 진군하던 아군을 습격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르트랑이 분연히 일어나 말하길

폐하께서 나이 어리어 스스로 정무를 돌보지 못하심에

이 틈을 노려 각지에서 도적이 일어나니

이는 비열한 생쥐의 소행이라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뒤로 나가 떨어지니

벽력 같은 노성이 따르더라

네 요망한 혀가 폐하를 능멸하니

어찌 내일 해를 보길 원하는가

문무대신이 모두 만류하며

도적들이 그렇게 생각함이지

결코 베르트랑의 죄가 아니라 고하나

대장군은 한치도 망설임이 없더라

위의 노래가 말해주듯, 아마란타는 황제에 대해 불경한 말을 행했다 하여 베르트랑을 심하게 꾸짖은 적이 있습니다. 베르트랑의 말이 황제를 모욕하려는 뜻이 전혀 없었음은 후세의 우리가 보기에도 분명하나, “나이 어리어 정무를 스스로 돌보지 못함” 이라는 표현을 추궁받은 것입니다. “뒤로 나가 떨어지니” 로 미루어 보아, 폭행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니 베르트랑이 앙심을 품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베르트랑을 중용하였으니 이는 아마란타의 실책이라 하겠습니다. 베르트랑의 배신을 계기로 아마란타군에서 배신자가 속출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아마란타군의 장군들 중 많은 수가 아마란타에 의해 심한 처우를 받은 적이 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어쩌면, 그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신과 같아서 황제에게 무한의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 황제께 불경죄를 지은 자의 목숨을 살려 두었으니 “은혜” 를 베풀었다고 생각한게 아닌지 싶습니다. 정말로 그랬다면 그 현실 인식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음이 아닐까요.

베르트랑의 배신은 전세를 결정적으로 뒤집었고, 오포스 별동대는 혼란에 빠진 틈을 노린 세렌의 좌익 부대에 궤멸됩니다. 이후, 세렌은 반전하여 역으로 아마란타군의 측면을 공격합니다. 잇따른 배신과, 측면 공격으로 아마란타군의 본진은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결사의 돌격

이에 전세가 기운 것을 직감한 아마란타는 직속 병력을 집결하여 왕국군의 본진으로 돌격합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그의 용맹은 지금까지도 이라하 지방에서 노래로 전승되어 찬탄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당시 종군한 아라드 공의 수기가 그 때의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도대체 무엇들 하고 있는가! 이제 적군은 붕괴되어 전투 능력조차 상실한 잡병들이 아닌가!”

돈울프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 언변도, 행정 능력도 나무랄 데가 없고, 정세 판단에도 능한 돈울프지만 군략에 대해서는 나와 마찬가지로 문외한이나 다름없다. 그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었으리라.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말을 타고 뛰쳐나갔을테니. 진 뤠이신은 태연해 보였으나 소매 아래의 손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명예를 위해 덧붙이자면, 결코 두려움 같은 감정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쇠기둥에 매달려도 태연했다고 하는 진 뤠이신이 아니던가. 그 떨림은 전율에 가까운 것이리라.

이미 승패는 결정되었다. 오포스에 진을 친 적군은 궤멸. 적의 본진도 궤멸 단계에 이르러, 이젠 그 지휘 계통조차 흐트러진 각 부대들이 산발적으로 저항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적장의 활약을 냉정하게 감상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나는 마치, 철창 안에 사로잡힌 맹수를 바라보는 듯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상대의 압도적인 힘에 대한 경외감과, 불운한 처지에 대한 동정심. 강한 상대를 포획하여 내려다보는 우월감이 뒤섞인 것이었다.

아아, 그 순간 전열이 크게 흔들렸다. 적장은 이제 막 일곱 번째의 돌격을 감행하는 참이었다. 그동안, 광기에 휩싸여 “날뛰는” 적군을 상대한 것은 브레넌 장군이 지휘하는 중군인데, 지켜보던 뤠이신의 말로는 “성난 맷돼지를 다루는 몰이꾼” 같다 하였다. 비록 적의 기세가 흉흉하여 그를 제압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유연한 포진으로 적의 기세를 막아내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투우사를 떠올렸었는데. 적을 상처입은 맹수로 바라보는 점은 누구나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결과적으로, 중군 전위에 브레넌 장군을 둔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세렌 장군이었다면 호랑이와 맷돼지가 서로 다투는 형국이 되었겠지. 그것은 그것대로 재미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순간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이번 흔들림은 묘하게 길군요.”

뤠이신의 중얼거림에, 비로소 나는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전열의 흔들림은 마치 허공에 펼쳐진 천에다 돌을 던지는 것과 같아서, 아군의 전열은 비록 흔들리고 밀려나더라도 돌파되지 않고, 줄곧 적군을 포위하며 그 태세를 가다듬어 왔다. 그런데, 그런데?

“돌파당했다!”

누군가가 절규했다. 순간 주위가 소란해졌다. 철창 안의 맹수가 기어이 철창을 비집고 튀어나온 것이다. 나조차 당황하여 “전하! 일시 뒤로 피하시옵소서!” 라고 외쳤다. 그 혼란을 수습하신 것은 전하셨다.

“경들은 모두 당당한 왕국의 중신이거늘, 적병을 보고 이토록 겁을 내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지금 본진을 뒤로 물리게 되면 군심이 동요되어 적에게 살아날 기회를 주는 것이다. 흔들림 없이 위치를 고수하되, 적습에 대비해 맞아 싸울 준비를 갖추라!”

적장은 여덞 번째 돌격으로 전위를 완전히 돌파해, 아군 본진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갑옷을 선두로, 방추형 진을 짠 적의 기마대는 하나의 거대한 짐승처럼 움직였다. 그 모습에 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 일사분란한 지휘, 그 용맹이란!

아마란타는 총 아홉 차례 돌격하여, 비로소 그 일곱 번째 돌격에 왕국군의 전열을 붕괴시켰고, 그대로 건국왕 전하를 향해 두 차례의 돌격을 감행합니다. 그 과정에서 명장 브레넌이 전사한 것은 듀리온 왕국에, 그리고 아데프치오 세력에 뼈아픈 타격이었습니다. 왕국은 자랑하는 명장을 잃었고, 아데프치오는 군부의 중핵을 잃었으니까요. 어쩌면 구 제국파의 입장에서도 브레넌의 전사는 불운했다고 볼 수 있겠으니, 추후 왕국군은 ”세렌 외에 적임이 없는” 상황이 되어 그 군권이 세렌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고, 이를 경계한 아데프치오 세력이 세렌을 탄핵하여 제거하기에 이르기 때문입니다.4)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나, 브레넌이 살아남아 군부의 제 2인자가 되었다면 세렌의 탄핵으로 시작된 피의 숙청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마란타의 돌격은 실로 매서웠으니, 왕국군의 중군을 돌파하고 건국왕 전하께서 자리하신 본진에 돌입하기에 이릅니다. 서전에서의 혼전과, 우익의 침묵으로 전세가 불리하자, 건국왕 전하께서는 스스로 본진을 전방으로 옮기라 명하시어, 일선 병사들의 사기를 고무하는 한편 각 지휘관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하셨습니다. 이렇게 본진을 전진시킴으로 인해 서전에서의 혼란은 쉽게 수습할 수 있었으나, 후반부에 와서는 도리어 아마란타에게 좋은 표적이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아마란타는 세 번 검을 부러트리고, 병사들의 검을 빼앗아 다시 돌격하였으며 곳곳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합니다. 그러한 용맹이 아마란타군 병사들의 사기를 극적으로 끌어올려, 건국왕 전하의 본진에까지 난입하기에 이릅니다. 다시 진 뤠이신의 수기를 인용합니다.

이에 적은 맹수와 같은 형국으로 돌입하니,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더라. 루오르 아마란타는 온 몸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한 시도 멈추지 아니하니 그 용맹이 천하를 진동함이라. 이에 좌익의 세렌 장군이 황급히 주상을 구원하러 단기로 말을 달렸으나, 장군은 멀리 있고 아마란타는 가까이 있으니 실로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지 못함이라. 다만 이 과정에도 흑조의 날개는 시종일관 이 편을 향해 펴지지 아니함이니 반드시 후에 변고를 부를 일이다.

주상께서 가라사대, 진중에 창과 장작이 얼마나 있는가? 하시니 돈울프가 즉시 대답하더라. 이에 주상께서 진지의 출입구에 나무를 놓아 울타리를 삼으시고, 그 뒤에 창을 늘어놓으심이니 이는 내 고향의 '거마창'과 같은 모양새라. 달려드는 기마병을 방비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방책이 없으나, 머나먼 이국의 방법을 즉석에서 고안하신5) 주상의 밝으신 지혜를 범인이 어찌 헤아릴 바 있으랴!

주상께서 다시 영을 내려 적이 다가오면 총을 쏘되 마구잡이로 쏘지 말고, 반드시 적이 목책 앞에 멈출 것이니 그 때를 노려 움직이지 아니하는 표적을 쏘면 백발 백중이라 하시었다. 또한 병졸을 두 무리로 나누어, 교대로 쏘게 하심이니 제 아무리 용맹한들, 날개가 없고서야 어찌 진중에 난입할 것이며 목숨이 하나이거늘 어찌 살아남을 수 있으랴!

이에 적병이 하나 둘씩 쓰러짐에, 붉은 갑주를 걸친 적장은 총포에 맞고도 굳건하니 그 용맹만은 실로 산을 빼어 뒤흔들만 한 것이다.

주상께서도 찬탄하여 “저 자를 사로잡을 길이 없겠는가.” 라 하시니. 돈울프가 말하기로 “저 자의 충의가 깊어 항복하지 아니함이라. 죽여 후환을 없앰만 같지 않소이다.” 라 하니 세 차례 큰 한숨을 쉬시더라. 이윽고 주상께서 가라사대. “적장이 피를 많이 흘려 고통스러워하니. 집중 포화를 가하여 절명시키라. 무사의 명예를 온전케 해 주는 것이 옳다.” 하시었다.

마침내 적장이 총알에 맞아 나자빠지니 그제서야 적병들이 하나 둘씩 투항하더라. 피아간의 시신을 수습하는 와중에 적장의 시신이 운반되어 왔는데, 크고 작은 상처가 여든 군데에 달하고 총상만도 스무 군데임에도 절명하는 순간까지 맞섰으니 비록 적장이나, 그 용맹 충의에 찬탄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더라.

루오르 아마란타는 그 능력적인 면에 있어서는 실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당대의 영웅이었습니다. 흩어진 제국의 제후국들을 복속시킨 정치적 수완이나, 이라하의 완벽한 포진에서 알 수 있는 전략적 식견. 그리고 최후의 돌격에서 보여준 용맹을 한 몸에 두루 갖춘 점이 그렇습니다. 베르트랑을 위시한 여러 무장들의 배신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이라하의 승자는 아마란타였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그 넘치는 재능에도 불구하고 부하를 혹독하게 다루어 배신의 빌미를 제공한 점, 무너져가는 제국의 실상을 외면한 점은 엄연한 그의 실책임에 틀림없습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선장이라도 구멍이 난 배를 몰고 바다를 건널 수는 없는 법인데. 그는 자신이 탄 배에 구멍이 났다는 사실을 줄곧 외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국을 부정하고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제창하신 건국왕 전하, 그리고 어린 황제를 기점으로 세력을 집결한 루오르 아마란타. 두 사람은 모두 당시 난립하던 여러 군웅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정치적 식견을 가졌음에 틀림없습니다만, 끝내 무너져가는 “제국” 의 옛 영광과 권위에서 눈을 돌리지 못한 점에서 아마란타는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한계가 결국 승패를 가른 것이겠지요.

이라하에서의 승리로, 반도 내에서 건국왕 전하에 대적할만한 세력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 이라하 지방에 전해지는 음유시
2) 루오르 아마란타는 공식적으로 “제국군” 이라는 통칭을 이용한 것으로 보이나, 브레넌 장군의 일지를 비롯한 왕국군의 주요 기록에는 “아마란타군” 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표현의 일관성을 위해, 본 기사에서는 “아마란타군” 과 “왕국군” 이라는 표현으로 양 군세를 지칭하기로 합니다.
3) 아스파의 두 별칭, 엔듀리온과 듀아라르크는 듀아라르크의 견해에 따름.
5) 실제로 목책과 창으로 기병을 방어하는 것은 에레모스 반도에서도 이전부터 잘 알려진 방법입니다.

댓글

로키, %2007/%10/%24 %09:%Oct:

우와아.. 이거 정말 물건인데요. 전투 진행 상황을 도면으로 그린 생생함이라든지 여러 시점에서 조명한 전투의 개인적 관점과 전체적 조망을 교차한 입체감, 전투의 정연한 전개, 대규모 전투 상황 속에서도 생생하게 드러나는 캐릭터성에 감탄했습니다. 전력과 기울어가는 역사, 개인적 허점과 운이 모두 교차해서 귀결이 나는 과정도 너무 멋졌고요. 아무리 뛰어난 인물도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주제는 한편 숙연하기도 하고… 엔님과 셋이서 한 대화에서 나온 무혈 장군 아스파의 면모나 아버지의 눈밖에 난 비극의 시초가 엿보이는 점도 흥미롭네요. 일제 사격과 장전을 번갈아 하는 실제 역사적 전술의 활용도 재밌고요. 한 마디로 감동, 감동! +_+

몇 가지 눈에 띈 점이라면 목책과 창을 세우는 건 전열도 정비해야 하고 시간이 좀 걸리는 작업일 것 같은데, 적어도 아마란타의 돌격에서 받은 인상으로는 상당히 급박한 상황이라는 인상이어서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을까 싶은 점도 있고, 또 기병을 저지하기에 그렇게 효과적인 방법이 타이샨에서만 알려져 있고 에레모스에서는 금시초문이라는 건 좀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물론 에레모스에 이방인이고 군사 전문가는 아닌 진대인이 잘못 알았을 수도 있지만요. 또 하나, 왕국군에 총기가 있다는 건 글 후반에 가서야 상기받았는데, 총기가 전투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한두 문장쯤 더 나오면 더 깔끔한 느낌일 것 같아요. 아니면 총은 많지 않아서 왕의 친위대에게만 있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마지막으로, 흑조의 날개는 시종일관 펴지지 않았다고 나왔는데 네 번째 도면에서 보면 아스파의 계산대로 우익도 일제히 아마란타군을 공격해서 결국 승리를 끌어낸 것 같아보였거든요. 어쩌면 네 번째 도면은 저 말이 나온 후였던 걸까요?

어쨌든 너무 잘 읽었어요~ 건국 2시기를 맺기에 딱 완벽한 글인건요. +_+d

 
정석한, %2007/%10/%24 %11:%Oct:

지적하신 몇 가지 부분을 수정하였습니다.

칼라인의 목책과 창의 부분은, 기본적으로 칼라인은 본진에 있으므로 병사가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를 틀어막은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오해가 생기기 쉬운 표현 같아서 수정하였습니다.거마창이라고 부르는 이름은 타이샨의 것이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울타리와 창으로 기병을 저지하는 것은 잘 알려진 것이니 에레모스에서도 존재하였을 것이란 점도 추가했구요. 흑조의 날개 역시 "이 편을 향해 펴지지 아니한" 것으로 했습니다. 칼라인의 입장에서는 중군이 혼란에 빠진 상황이나, 적장이 돌격하여, 부친이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도 구원의 의지를 보이지 않은 부분에 화가 났을 것이고, 그 병력의 운용도 위험한 시기나 장소를 피해 가며 했으니 겁쟁이로 보였을 것이다. 라는 설정으로 들어갔습니다.

총기가 전쟁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살짝 다른 글을 준비중이오니, 너그럽게 보아 주시길 ^^;

과분한 칭찬과, 예리한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__)

 
_엔, %2007/%10/%25 %03:%Oct:

이라하 전투! 정독했습니다. 그림들도 잘 봤고요! +_+ 전투 하나를 이렇게 리얼하고 멋지게 구상해내셨다는게 감탄스럽습니다. 전 마그누스가 멋지게 개전한 부분이랑 돈울프가 감정을 마구마구 드러내는 부분이 마음에 드네요.

 
백광열, %2007/%10/%25 %21:%Oct:

… 무릎 꿇었습니다. 전장의 전개 상황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교차하는 인물상 하나하나를 생생히 그려내셔서 더욱 훌륭한 듯. 게다가 이 방대한 분량과 정성은 차마 따라갈 엄두를 못 내겠네요. 대작입니다, 진짜;

@ 암튼 저도 이라하 전투에서 총포의 효력이 입증되었다..는 식으로 나가서, 향후 전쟁 양상의 변화를 다루고 싶네요. 이미 엔님이 [재앙의 꽃다발]에서 암시한 것과 같은 입장에서요. 제 입장이야, 대강 아시겠지만, 전쟁은 전사들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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