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千)의 성기사

위풍당당한 깃발
찬란히 빛나는 갑옷
주의 이름 드높게 부르며 나아가니
그 용맹 전장을 뒤흔드는구나.
아, 그 모습 늠름하다.
천의 성기사, 용사 중의 용사들이여!

- 천의 성기사 찬가 中 -


진실을 탐구하는 모든 연구원들에게 진실의 보호자이신 주, 데오스의 인도가 있기를!

흔히 알려진 역사 상식 중 잘못된 것의 대표적인 사례는 '천의 성기사1)'에 관한 인식일 것입니다.

음유시인 로렐이 천의 성기사에 대한 노래를 부른 후, 사람들은 이 성기사들에 대해 '빛나는 갑옷을 입고 전장에서 신의 이름을 찬송하며 적군을 물리치는 기사들'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천의 성기사들은 빛나는 갑옷 같은 것은 입지도 않았을 뿐더러, 단 한번의 공식적인 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로렐이 노래의 영감을 얻었던 에우세비오 교부의 <건국사>에서도 그들에 대해서는 '자비에르의 명에 따라 제국과의 전쟁에 참가하였다' 라고 서술된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독립전쟁에서 빛나는 수훈을 세웠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사실입니다.


에니,
사과 하나, 빵 반 쪽, 물 한 통. 오늘 먹은 것들이야. 당신의 사과 파이가 그리워.
밤이 무척 싸늘해. 이 곳은 적들의 숲 속. 귓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하나에 잠이 깨고,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 한줄기에 온 몸이 오그라들어.
우리 고향은 여기서 보이지 않네. 북쪽으로 너무 멀리 왔나 봐.
집이 그리워.

최근 공개된 천의 성기사 중 하나인 커스버트의 일기 중 일부입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 성기사들이 독립전쟁 당시 제국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활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인의 성기사들은 원래 듀리온 왕국에 오기 전, 자비에르와 함께 리베르타 반도 각지에서 마법사들과 요정들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던 이들이었습니다. 후대에 알려진 세련된 이미지와는 달리 그들 대다수는 '더럽고 천한 야만인'이라고 멸시당하던 북부의 야인(野人)들이었으며, 커스버트와 같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이름도 쓰지 못하는 문맹들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후대에 알려진 모습 중 오히려 더 약소평가된 것이 있다면, 바로 그들의 대담함과 용기일 것입니다.


에니.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었어. 저들의 물자보급부대가 우리 구역으로 왔던 거야!
즉시 연락을 보내 주위의 동료들을 모아서 마차를 습격했지.
이번에 얻은 것은 마른 고기와 과일. 당신의 요리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배는 채울 수 있을 것 같아.

천의 성기사들은 독립전쟁 당시 위험을 무릅쓰고 왕국의 국경에서부터 제국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적들의 물자를 강탈하고, 후방을 급습하였습니다.2) 이로 인한 적들의 피해는 막심하여, 그 당시 제국의 수괴인 아마란타는 “저 저주받을 늑대들을 어떻게 할 수 있다면, 십만 명의 군대라도 산 제물로 바치겠다.” 라고 울분을 토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라하 전투 전투 당시 제국군은 신출귀몰한 성기사들의 활약으로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해 극도의 육체적ㆍ심리적 피로에 지친 상태였다고 하며, 최근 밝혀진 외교문서에 따르면 전투 당시 적장 베르트랑이 투항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3) 듀리온 왕의 은밀한 설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왕의 편지를 적진 내로 전달한 것은 바로 천의 성기사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커다란 업적은 유격전이 아니었습니다.


에니,
어제 숲 저편에 정찰을 나갔던 우리 전우들이 모두 죽었어. 요정들의 손에 걸려 아주 처참하게 살해당했지.
하지만 전우들은 죽기 전에 요정들의 위치를 우리에게 알려주었어. 잠시 후면 주변의 모든 동료들이 총집결할거야.

저들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답고, 끔찍하게 무서워. 불경스러운 생각이지만 데오스의 사자들이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면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어.
예전에 싸웠을 때는 단 몇 명의 요정기사들을 당하지 못해 수십명의 전우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했어. 어떤 이들은 그들의 불타는 검에 잘려 죽고, 어떤 이들은 요정들이 탄 사슴의 뿔에 찔려 죽고, 어떤 이들은 단지 요정들의 분노한 얼굴을 쳐다본 것으로 미쳐버리더라. 그때는 정말 악몽이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야.
우리에게는 한철의 검과 총이 있어. 이번에는 요정들을 위해 특별 제작한 '진천뢰(震天雷)'라는 선물도 있지. 불을 붙이고 던지면 쾅! 하고 터져서 한철 조각들을 선물할 아주 멋진 장난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 데오스의 가호가 우리를 지켜주고 있어.

에니,
만약 네가 지금 내 앞에 있었다면 위험한 짓 같은 건 하지 말라고 말렸겠지. 자신을 좀 생각해 달라고, 가족들을 생각하라고 울먹이며 내 가슴에 매달렸겠지. 나도 어쩔 줄 모르다가 결국 당신의 눈물에 두 손을 들었을 거야.

하지만 에니,
이건 바로 당신을 위한 것이고, 우리 가족들을 위한 거야.
만약 내가 여기에서 싸우지 않는다면, 저들은 이 땅에서 또다시 우리의 가족들을 희롱하고 욕보이며 죽이겠지.
그 때, 내 눈앞에서 당신을 빼앗아간 요정들처럼.

이상한 소리라고 하겠지만 지금 나는 정말 기뻐. 정말 두근거려.
만일 이 싸움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생존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신 것에 대한 기쁨으로 데오스를 찬양할 거야.
만일 그 반대의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데오스 곁에서 나를 기다리는 당신과 재회할 수 있을테니,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을 장사잖아?

발소리가 들려. 우리 동료들이겠지.
결전의 시간이 왔어. 대장이 말하길 이번에 온 요정들은 진짜 거물들이래.
제발 데오스께 부탁 좀 드려줘, 단 한 번이라도 그 녀석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일수 있는 힘을 내게 내려주시길.
이만 쓸게. 먼 훗날에, 혹은 잠시 후에 다시 만나자, 에니.

성기사들의 알려지지 않은 전쟁 중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전투는 이라하 전투 나흘 전에 벌어진 레스파 계곡의 전투였습니다.

그 당시 아마란타의 후견인이었던 요정군주, 디네 시이(Daoine Sidhe)의 수장 레드리스가 고위 마법사 및 호위병 서른 명과 함께 아마란타에게 합류한다는 첩보를 듣고 이리하 지방에 잠복해 있던 성기사들이 총집결, 무려 오백명의 성기사들이 그 행렬을 급습한 것입니다. 당시 레드리스는 숭배자들 사이에서는 반신(半神)이라고도 불리웠던 초월적인 존재였고, 그를 호위하는 마법사들 하나하나가 대마법사 마그누스와 필적한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 전투에 대해서는 작전 지휘자였던 이라리온 경이 간략하게 적어놓은 기록이 있습니다.

요정들이 계곡의 중간에 다다르자마자 공격명령을 내렸다. 총포를 쏘고 진천뢰를 던진 다음 앞뒤로 포위하고 돌진하였다.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습격에 참가한 이들 중 팔할을 넘는 사백여명의 성기사들이 죽거나 영원히 미쳐버렸습니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원하던 것을 이루었습니다. 희생의 대가로, '필멸자의 손에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졌던 레드리스와 그 일행을 전원 암살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아쉽게도 커스버트의 일기는 여기에서 끝납니다. 그의 최후의 모습 역시 이라리온 경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커스버트가 요정군주에게 달려들었다. 요정군주가 칼을 휘두르자 그의 허리가 잘려나갔다. 하지만 그는 죽기 직전 품 속에서 사용하지 않은 진천뢰를 꺼내 요정군주 앞에 들이대었고, 진천뢰가 폭발하여 요정군주의 눈을 앗아갔다.

지상에 살아 숨쉬던 가장 강대한 요정의 죽음 이후 요정들은 급속하게 몰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훗날 '마녀사냥'이라고 불리웠던 사건이었지만, 이미 레드리스의 죽음에서부터 그들의 쇠퇴는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독립 전쟁이 끝난 후, 무사히 살아남은 성기사들은 삼백이십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후 교회로 복귀하여 모든 명예를 뒤로 한 채 죽은 이들을 추모하며 남은 생을 은둔자로서 지냈다고 합니다.4)

건국의 시기 당시, 건국왕이나 자비에르 대주교, 혹은 돈울프공과 진대인처럼 살아있을 때는 영광을, 죽은 후에는 후세의 찬사를 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천의 성기사처럼 그 모습이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아예 잊혀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들 중 그 어떤 이도 다른 이보다 뒤쳐진 자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역사의 주목을 받는 영웅부터 들풀처럼 스러져간 무명용사까지 모든 이가 왕국의 독립과 인간의 해방을 위해 하나 되어 싸웠고,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모든 이가 승리자이며, 모든 이가 주인공입니다.

이 모든 이들에게 우리 주, 데오스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1) 이들에 대한 언급은 필자의 졸저 장작불 위에서의 연설을 참조하기 바람
2) 커스버트의 일기에 따르면, 성기사들은 소규모 단위로 '늑대 무리'를 조직하여 적 후방 곳곳에 잠복해 있다가 기회가 오면 주위의 무리들과 함께 적을 습격하는 '늑대떼 전술'을 썼다고 한다. 성기사들이 어떻게 부대간 긴밀한 연락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3) 이라하 전투에서 참조
4) '천의 성기사'라는 칭호는 이들 사후에 붙여진 명칭임.

댓글

_엔, %2007/%10/%26 %00:%Oct:

가장 낮은 자들에 의해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요정군주가 끌어내려졌다는 거로군요 결국. 전 귀족주의자(…)라 그런지 끌어내려진 쪽이 너무 안쓰러웠어요.

천의 성기사들의 그야말로 칼날, 잔인할 정도로 끈질긴 칼날 같은 의지가 느껴지는 글이었어요. >_<

 
오승한, %2007/%10/%26 %15:%Oct:

반요정파로서 구세력의 몰락을 그리는 것은 필연적인 일!(…)

요정에 대해서는 아직 여러가지 생각이 혼재하고 있지만, 인간들에 대해서는 자신을 억압했던 요정들에 대한 원한과 분노에 가득 찬 복수자인 동시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소중한 것들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다진 수호자의 모습으로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싶어요. '천의 성기사'는 그런 생각을 듬뿍 담아보았습니다. 자비에르와 우노스 정교회는 이러한 인간들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만들고 싶어요.

 
백광열, %2007/%10/%27 %10:%Oct:

편지가 정말 다급하면서도 절절한 감정을 담고 있네요. 다양한 문체로 다양한 분위기를 표현하시는 능력이 놀라워요. 흑. ;_;

@ 늑대떼 전술은, 2차대전 때 독일 괴링 제독의 잠수함 부대들이 사용했던 그 전술이군요. 실제로 대서양에서 유럽전선으로 넘어가는 보급선을 차단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D

 
오승한, %2007/%10/%27 %15:%Oct:

감사합니다^^

늑대떼 전술은 말씀하신대로 그 전술입니다. 연락수단은 어떻게 취했는지 묻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