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길의 날

축제의 환호성이 벌통 구역을 가득 메우고 있다. 악사들과 무용수들의 화려한 퍼레이드를 구경하기 위해 집집마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놨다.1) 철없는 아이들이 까불대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부모한테 걸려 울며 불며 끌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돌파 사건 이후 시길 구석구석에 가라 앉아 있던 음습한 기운도 지금은 청명한 가을 하늘마냥 깔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오늘만큼은 사람들의 활기와 생명력이 이 거리를 지배하고 있다. 행렬을 따라 이 곳으로 발길을 옮기게 된 변덕도 이 열기에 혹해서 일지도 모른다. 벌통 구역에 득실댄다는 건달들도 티본과 함께 있으니 콧배기도 보이지 않았다. 좋은 산책길이었다.

잠시 후 정오가 되면 행렬이 하부 구역 쪽으로 향한다. 올해는 라이잔과 마라켄의 업적을 기려 그들이 라반투스를 쓰러뜨린 그 광장에서 기념행사가 시작될 것이다. 순국선열들에 대한 추도, 참전용사의 소감문 낭독, '올해의 시길인' 상 수상식, 기타 공연 등등. 공식적으로 승리가 선언된 자정 무렵이 되면 시길의 날은 절정으로 치닿겠지.

“올해의 시길인 후보에는 알 모르트 씨도 포함될 것입니다. 마라켄과 라이잔을 재조명하여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도취시킨 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공이니까요”

어제 버네이가 웃으면서 귀띔해줬다. 영광이군, 이라고 대답했지만 당연히 '후보'로만 그칠 것이 뻔하다. 네크로맨서는 세금 징수인 만큼이나 인기 없는 사람들이니. 그래도 자리에는 참석할 것이다. 후보 발표 때 자리에 없으면 버네이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게다.

“*공허한* 자기위안일 뿐이오.”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들려오는 목소리. 뒤를 돌아보니 늙은 기스제라이가 서 있었다.

더스트맨의 쥐색 망토라… 아하, 쟈'하르라는 사람이었지. 시신 수습 문제로 시체안치소에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최근 도시 홍보부에서 일하느라 그 쪽은 많이 들르지 못했었다.

“아, 쟈'하르 씨군요. 안녕하십니까. 오늘 날씨가 참-”

“그대는 왜.”

날씨 이야기를 하려는 내 말을 가로막고, 쟈'하르는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침묵과 정숙함이 있어야 할 자리에 왜 *소음*과 *혼란*을 가져오는 건가. 그날의 고통과 폐허를 기억하며, 이미 사라진 이들과 아직도 고통을 버리지 못한채 헤메이는 이들을 추도해야 할 사람들을 *거짓 기쁨*과 *헛된 영광* 으로 스스로를 기만하도록 만들었는가.”

분명히 저건 날 비난하는 말인데 목소리는 평온하고 담담하기 그지 없다. 그 부조화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고 있을때, 쟈'하르는 말을 끝맺었다.

”……누구보다도 죽음을 깊숙히 이해하고, 죽음에 가까운 *네크로맨서*라는 길을 걷고 있는 이가.”

아아. 그것 때문에 날 불러 세운 것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 만큼 경박한 행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따 보시면 알겠지만 순국선열들에 대한 추도식과 유가족들에 대한 위로도 준비되어 있더군요.”

쟈'하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나를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다. 아무래도 전혀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닌가 보다.

할 수 없지. 성의있게 대답해 주는 게 예의일 것이다. 좀 더 깊은 오해가 생기기 전에.

“아무래도 당신은 저에 대해서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더스트맨들과 시신 가격 흥정하기는 글렀다.

“검을 쓴다고 해서 모두가 이념을 위한 전쟁에 참여하고 검의 도를 논하는 건 아닙니다. 어떤 이는 푸줏간 주인이 될 수 있고, 어떤 이는 주방장의 길을 걸을 수도 있지요. 제게 있어서도 '죽음'은 제 생활을 위한 직업수단일 뿐입니다.”

늙은 기스의 눈에서 언뜻 경멸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확실히 더스트맨들에게는 천박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저는 유령들과 대화를 나누며 잊혀져가는 지식을 복구하고, 새롭게 밝힙니다. 시체를 해부하면서 질병과 부패, 그 외 신체적 죽음에 대한 요소를 탐구하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망자들과 산 사람들간의 갈등을 조정하면서 사례를 받기도 하지요. 확실히 저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죽음을 더 가깝게 느끼고, 산 자들보다 망자들과 이야기하는 데에 더 익숙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절대적인 소멸이니, 영영 깨어나지 않을 고요니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할 의무가 있겠습니까.”

쟈'하르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한 때는 죽음에 대해 당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점점 더 죽음에 대해 연구할수록, 죽음이라는 것이 종말이 아니라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되더군요.”

“이해되지 않는 말이오.”

“쟈'햐르 씨. 당신이 죽으면 당신은 어떻게 됩니까?”

“육체는 썩어서 *흙과 재*로 돌아가고, 영혼은 *고요함* 속에서 영원한 *평안*을 찾을 것이오.”

“천만에요. 당신의 영혼은 어딘가의 청원자가 될 것이고, 당신을 이용해야 하는 저 같은 네크로맨서에게 여기저기 불려다니겠죠.”

쟈'하르의 얼굴이 미미하게 떨렸다. 틀림없이 분노일 것이다.

“한 사람의 영혼이 다원우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건 죽음의 신이 개입해도 될까 말까하는 어려운 일입니다. 육체요? 돈과 시간과 지식만 있으면 얼마든지 되살릴 수 있습니다. 그럴 필요를 느끼면서까지 살려야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안식이 뭐고, 종말이 무엇입니까. 죽음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끝은 아닙니다. 반대로 당신들 말마따나 진짜 끝이 오면, 그 이후는 아무것도 없을 텐데 그러한 불가항력인 일을 앞두고 미리 죽는 시늉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살아서 최선을 다해 만족스럽게 사는 게 더 낫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

옛날부터 당신처럼 종말, 종말 외치는 사람은 차고 넘치지만 도대체 종말이 언제 오는거냐라고 심술을 부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본론으로 돌아가지요. 오늘, 망자들을 추모하며 아픔과 비탄을 느껴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계속 그 날만을 생각하면서 울며 지낼 수는 없고, '쟤는 죽었는데 나만 살았어' 라고 한탄하면서 평생 죄의식을 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돈이 없으면 일을 해야 할텐데 전쟁의 고통 때문에 울면서 살아가는 것보다, 전쟁의 승리 덕분에 웃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어느 쪽에서 보나 낫겠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걸 이해하고 있고, 그래서 이 날을 즐기고 있는 겁니다. 저는 그걸 도와준 것이고요.”

“내 친구는.”

처음으로 쟈'하르의 말에 뜨거운 감정의 격류가 흘렀다. 그의 눈빛에 살기가 감돌자 티본이 꿈틀거리며 반월도를 치켜올렸다. 나는 손을 올려 티본을 제지하고는, 쟈'하르가 대화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내 친구는 그 날 어머니의 시신에 탯줄로 연결된 채 거의 죽어간 채로 발견되었소.2) 생일이 곧 부모의 기일이 된 친구요. 그녀는 평생을 그 날 비롯된 죽음과 파괴에 대한 강박관념에 잡혀 살아가고 있소. 그 친구 앞에서도 '돌파둥이니까 축하한다'라고 말할 수 있겠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쟈'하르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그날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사람도 있고, 그 고통을 직접 경험한 채 평생 잊혀지지 않는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오늘 웃고 즐기고 있습니다. 전쟁은 끝났고, 우리가 승리했으니까요.”

”……”

“생일이 곧 기일이 된 돌파둥이들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나는 곧바로 돌아섰다. 쟈'하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나를 보내주었다. 절대 승복했을 리가 없다. 더 이상 말해봤자 소용없을 거라고 느낀 것이겠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티본을 앞세우고 하부 구역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두려운 얼굴을 한 채 슬금슬금 물러났다. 저들은 아마 나를 죽음을 탐닉하는 마법사라고 여길 것이다. 반대로, 진짜 죽음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나를 죽음을 모욕하고 가볍게 여기는 이들이라 생각할 테지.

그 것이 내가 평생 달고 다녀야 할 꼬리표이자 숙명.

이 어찌 재미있는 세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랴.

1) 시길의 날 테마곡으로 선정한 노래 :
2) 레라 네자트가 쓴 시길의 날을 읽어 보시라

댓글

로키, %2007/%09/%09 %07:%Sep:

죽음과 슬픔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입장이라, 흥미롭군요. 시길의 날을 반대되는 시선으로 본 점도 그렇고요. 낙관적이고 생에 긍정적인 네크로맨서라는 존재는 어떻게 보면 역설적이면서도 알 모르트가 말하는 이유를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지네요. 무감정을 추구하면서도 역시 모든 감정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 쟈'하르도 멋지고요. 플레인스케이프 세계는 역시 사상과 사상의 충돌이 정수라는 점이 잘 드러납니다. 죽음에 대해 어떤 입장에 서든 외부인일 수밖에 없는 알 모르트의 관조적이면서도 냉소적이거나 적대적이지 않은 시선에서 드러나는 성격도 재밌군요. 어떻게 보면 티플링과도 닮은 모습에 역시 반감은 닮은 사람 사이에서 제일 심하다는 원칙을 재확인하게 되는..(..)

 
오승한, %2007/%09/%09 %23:%Sep:

본 글보다 멋진 해석 감사합니다. 레라가 알 모르트에게 느끼는 것은 동족 혐오라는 거군요(…)

앞으로 레라와 알 모르트가 여기저기에서 많이 충돌하는 것이 나타나는 것도 무척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