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작불 위에서의 연설

진실을 탐구하는 모든 연구원분들에게 우리 주, 데오스의 축복이 있기를!

오늘은 지난번 저의 졸저 세 가지 보배에 이어 자비에르 대주교께서 어떻게 건국왕과 만나게 되었는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난번 왕실사록을 찾아낸 후, 이에 관련된 추가자료를 찾기 위해 사흘 밤낮을 수도원 장서를 샅샅히 뒤져보았습니다.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옛 문서 중 하나에서 자비에르 대주교 밑에서 독립전쟁을 치룬 어느 형제분의 수기를 발견하셨습니다.

왕실사록에서도 나왔듯, 왕의 사자로서 자비에르 대주교를 만나러 간 사람은 바로 건국공신 중 하나 ,진 뤠이신이었습니다. 이 수기에는 진 뤠이신 공의 세치 혀가 '칼보다 강한' 위력을 발휘하여 자비에르 대주교의 마음을 설복시키는 과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안키아 산성 앞에 나타난 그 남자는 기묘한 이국의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얼굴 또한 에레모스에 살고 있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좀 더 지켜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겼으나, 우리의 임무는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것이었다.

“이 곳은 우리 영주님께서 다스리는 산이니, 외부인은 들어올 수 없소. 돌아가시오.”

“나는 영주님을 뵈러 온 것이오.”

“영주님은 출타 중이오. 여기에 계시지 않소.”

그러나 그 자는 물러서지 않고 한층 더 큰 목소리로 외쳤고, 그 말은 산성의 사람들을 모골송연하게 만들기 충분하였다.

“칼라인 듀리온 폐하의 사자(使者) 진 뤠이신이 예언자를 만나러 왔다 전하시오!”

모든 사람들은 대경실색하여 “어떻게 저 자가 우리의 숨겨진 장소를 알았다는 것인가? 칼라인 듀리온이라는 작자가 곧 우리를 공격하러 온다는 것인가?” 라며 불안해하였다. 예언자의 사제자(四弟子)이자 산성의 경비대장인 세바스틴 형제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당장 저자를 죽이자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예언자의 오제자(五弟子) 키릴 형제는 “저 자가 이렇게 태연히 비밀을 입에 올린 것은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은 사자로서 대접을 하자. 저자가 딴 마음을 먹는다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만류했다. 짧고 격렬한 논쟁 끝에 '사자로 온 사람을 심증만으로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사자를 산성 안으로 들였다.

산성 내 집회장 한 켠에는 화형대로 쓰이는 쇠기둥과 장작더미가 놓여 있었고, 칼과 창을 든 형제들이 공터를 가득 메웠다. 그러나 왕의 사자, 진 뤠이신이라는 자는 얼굴하나 변하지 않고 싱글벙글 미소를 띌 뿐이었다. 비록 신뢰할 수 없는 자였지만 그 담력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보고를 받은 예언자께서 나오셨다. 진 뤠이신은 그 자리에서 간단히 읍을 하고는 왕의 친서를 펼쳤다. 그때 예언자께서 입을 여셨다.

“왕의 사자라는 작자가 예를 보이지 않으니, 그 왕의 심성이 어떤지 알만하구나.”

“왕의 사자가 정식 벼슬이 없는 자에게 절을 하는 것은 그 어떤 나라에도 없는 예법이오. 내 고향의 예법에 의하면, 왕의 친서를 받는 사람이 무릎을 꿇게 되어 있소.”

진 뤠이신의 대꾸에 순식간에 주위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예언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진 뤠이신에게 친서를 읽도록 허가하셨다. 친서의 내용은 무척 길고 지루했으나, 결론만 말하자면 - 무척 무례하게도 - 우리 교단에게 듀리온 왕국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글이었다.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예언자께서 주위를 진정시킨 후, 다시 사자에게 물었다.

“우리 형제들은 사기가 높고 잘 훈련되어 있으며, 총과 대포를 가지고 있다. 너희 왕과 우리가 싸우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 같은가?”

“처음 한 두번의 전투에서는 예언자가 이길 지도 모르오. 그러나 결국에는 병력과 보급의 차이로 인해 우리 왕이 이길 것이오. 그것이 국가와 사병(私兵)집단의 차이오.”

이 말을 듣자 예언자는 분개한 얼굴로 외쳤다. “내 칼라인 듀리온이라는 자를 모를 줄 아느냐. 그 자는 위험한 마법사를 수하로 두고, 요정의 피를 이었다고 소문난 여장군을 첩으로 데리고 제국이 혼란한 틈을 타 이 땅을 통일하려는 야심가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가 제국과 요정을 한 하늘에 이고 살 수 없다는 건 세상이 모두 아는 사실. 오늘 네 놈이 사지에 들어 온 줄 알아라.”

예언자가 호통을 치자 두 명의 형제가 진 뤠이신의 팔을 잡아 끌고 쇠기둥에 묶었다. 그러나 진 뤠이신은 자기 주위에 장작더미가 쌓이고, 사람들이 불을 피울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면서도 크게 웃으면서 예언자를 꾸짖었다. “내 이전부터 예언자 자비에르의 덕망과 의기를 흠모하고 반드시 한 번 뵙기를 바랬으나, 오늘 보니 한 치의 앞날도 못 보는 산적 두목에 불과하구나!”

예언자는 손을 들어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는 진 뤠이신에게 물어보았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어디 한 번 말해 보거라.”

“예언자가 우리 왕에게 충성을 바친다면 세 가지 이유로 인해 흥할 것이오, 이 몸을 죽인다면 세 가지 이유로 후회할 것이외다.”

“그 것이 무엇이냐.”

“예언자가 우리 왕을 따르면 흥할 이유부터 말하겠소.

첫째, 우리 왕께서는 덕이 무척 높으신 분이오. 이 반도내에서 유일하게 데오스를 믿는 이들을 탄압하고 죽이지 않는 곳이오.1) 예언자가 우리 왕을 따르면 예언자와 형제 여러분들은 안전한 거처를 얻을 수 있소.

둘째, 우리 왕께서는 학식과 무력이 뛰어난 평민들을 중용하고 있소. 평민 출신의 관리들은 옛 제국의 사상을 부인하고 있으며, 그중 상당수가 예언자의 말씀에 감화를 받았소.2) 예언자께서 우리 나라로 가신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더 많은 관리들을 예언자의 편으로 끌어들려 나라 안 마법사들과 요정의 세력을 누를 수 있소.

셋째, 우리 왕은 비록 덕이 높고 그 뜻이 크다 하나, 아직 반도 전체를 통일하기에는 그 조력자가 부족하신 상태이오. 예언자의 군대와 반도 전체에 퍼진 첩보망은 우리 왕에게 더할 나위 없는 도움이 될 것이오. 예언자가 만일 왕의 신임을 얻고 평민 관리들과 힘을 합친다면, 통일 후에 반도 전체를 데오스의 가르침 아래 둘 수 있을 것이오.”

“후회할 이유는 무엇이냐.”

“후회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겠소.

첫째, 앞에서도 말했듯이 예언자의 군대는 사병 집단에 불과하오. 아무리 그 뜻이 고귀하다 할지라도 국가를 상대로는 이길 수 없소. 나를 죽인다 한들 우리 왕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겠소?

둘째, 예언자가 나를 죽인다면 우리 왕국에서도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될 것이오. 하찮은 자존심으로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이를 죽일 셈이오?

셋째, 나는 냄새가 심하오. 나를 불태운다면 그 악취가 천지를 진동할 것이오.”

진 뤠이신의 말을 듣자, 예언자는 크게 파안대소하며 손수 진뤠이신을 풀어주고는, 술과 고기를 준비하여 그를 높은 자리에 앉혔다.

예언자는 “내 이미 칼라인 듀리온 왕께서 우리 형제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으며, 진심으로 고맙게 여기고 있소. 다만 왕의 사자로 온 귀공의 역량을 시험하고 싶어 못된 장난을 쳐본 것이오. 귀공과 같은 이를 부하로 두고 있는 왕은 분명 명군일 것이오. 부디 이 몸을 용서해주기 바라오.” 라고 사과하였다.

진 뤠이신 역시 웃으며 “애초부터 농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예언자의 분노는 마법사와 요정을 향한 것이지, 평범한 사람을 향하지는 않으니까요.”라고 대답하고는, 그제서야 예를 갖춰 정중히 절을 올렸다.

그 뒤 사흘 동안 예언자와 진 뤠이신은 마치 가족처럼 한 자리에서 숙식을 같이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 뤠이신이 떠날 때는 예언자가 산성 밑까지 배웅하면서 무척 아쉬워하였다.

진 뤠이신 경이 돌아간 후, 자비에르 대주교는 리베르타 반도에 흩어져있는 여러 형제들을 소집하여 안키아 산성을 내려오게 되었는데, 식솔과 부녀자를 제외한 장정들의 수는 정확히 일천 명이었습니다. 이후 이 일천 명의 형제들은 칼라인 왕 곁에서 혁혁한 전공을 발휘, 이후 '천(千)의 성기사'라고 불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돈울프 경의 친구였던 아라드 공이 건국왕과 대주교의 첫 만남에 대해 적은 글을 끝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 가슴 벅찬 만남을 이끌어주신 우리 주, 하늘의 왕 데오스에게 영광과 찬미를!

….<전략> 세렌 장군과 마그누스 경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언제든지 장졸들을 움직일 준비를 하였다. 많은 대신들이 자비에르를 보기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으나, 우리 아데프치오 출신의 동료들은 모두가 들뜬 모습으로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중 맨 앞에는 돈울프 공과 진 뤠이신 공이 있었다.

동이 트자, 새벽 안개 저편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모든 사람이 잔뜩 긴장하고 있을 때, 어스름을 뚫고 한 노인이 나타났다.

거인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땅딸막하고 볼품없는 체구,닳아빠진 지저분한 회색 망토. 그러나 덥수룩한 흰 눈썹 사이에서 엿보이는 깊고 강렬한 눈동자를 마주본 이들은 결코 그를 작다 할 수 없었으리라. 그의 새벽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 우리를 덮고 있었다. 세렌 장군과 마그누스 경마저도 한 순간 움츠리고 말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그가 몇 발자국 더 걸어왔다. 팽팽히 조여진 그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누군가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에레모스의 왕, 칼라인 폐하 만세!”

“만세!”

쾅! 쾅! 콰쾅!

자비에르의 만세소리와 동시에 수천의 함성,그리고 정확히 스물 한 번의 천둥이 안개를 찢고 새벽 하늘을 뒤흔들었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 왕은 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은 노인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반갑소. 짐이 바로 칼라인 듀리온이오.”

“자비에르이옵니다, 폐하.”

댓글

로키, %2007/%10/%24 %02:%Oct:

푸하하.. 진대인 기지와 유머감각이 상당한데요. 자비에르 역시 범상치 않은 면모가 드러나고요. 공신 클럽의 제 3축이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오승한, %2007/%10/%24 %18:%Oct:

로키님이 한 번 돈울프-진대인-자비에르 이 세 명이 구제국파와 맞서 싸우는 모습을 적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

 
_엔, %2007/%10/%25 %03:%Oct:

마지막 부분이 액자에 들어있는 옛날 그림 한 폭처럼 마음에 새겨졌어요. 자비에르의 성격과 진 대인의 성격이 둘 다 드러난 점이 좋네요 : )

 
오승한, %2007/%10/%26 %17:%Oct:

아주 신경쓴 부분입니다. 하지만 엔님의 묘사에 비해서는 한참 부족하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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