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왕의 진의

“비록 그 육신 땅 아래 잠들었으나,

그 영혼 노래에 살아 지금도 속삭이네.”

– 전통적인 음유시의 도입부.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정처없이 좌충우돌하며 걸어온 여정도, 돌아보면 마치 처음부터 모든 것이 아귀가 맞게 예정된 것처럼 보이곤 한다는 것을.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을 직접 걸어왔기에, 그 여정이 우리가 일일히 의도한 것은 아님을 알고 있다. 오히려 많은 부분, 우연을 가장한 운명과 섭리가 인간의 길을 인도하는 것이 아닐까.

역사가들 역시 비슷한 실수를 하기 쉬운 형편에 놓여있다. 우리는 늘 흘러간 과거를 되돌아 살필 수 밖에 없기에, 결과적으로 드러난 것들에 비추어 모든 것이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되었다고 넘겨짚기 쉽다. 그러나 역사를 살아간 영웅들 역시, 한치 뒤를 알 수 없던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음을 잊어선 안된다. 미래를 예언하고 운명을 좌우하던 엘레할의 사제들도 제국의 멸망을 막지 못했을진대, 요정의 지혜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이야 말해 무엇이랴.

영웅왕 칼라인 듀리온과 그 나라의 탄생 역시 그러하였다. 최근 젊은 사학자 루디스 런포스 경이 제이피리스에서 밝혀낸 영웅왕 칼라인 듀리온의 행적에 따르면, 그는 제국의 붕괴 후 이어진 영주의 폭정에 일어난 젊은 영웅이었다. 그에게 과연 왕국을 세우고 제국의 영향력에 항거하여 인간들의 시대를 열겠다는 야심이 있었을까. 그것은 후세 사람이 붙인 잘못된 꼬리표에 가깝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이곳 시작의 도시 제이피리스에 이르러, 영웅왕 칼라인 듀리온의 혁명 이후에 관한 전승을 수집했다. 아래는 혁명 직후 제이피리스에서 일어난 일들을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자유해방 만세! 영웅 칼라인 만세!!”

광장에 터질듯이 모인 시민들의 함성은, 마치 암벽을 깎아내는 거센 파도소리와 같은 기세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칼라인은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듯 친우 마그누스와 동료들을 연신 돌아보다가 마침내 단에 올랐다. 어디선가로부터 새로운 함성이 퍼져나갔다.

“새 영주 칼라인 만세!! 새 영주 칼라인 만세!!”

칼라인은 당혹스러워하며, 손을 들어 함성을 진정시켰다.

“저는 왕이 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불의와 압제를 참을 수 없어, 칼을 뽑은 한 무인일 뿐. 해방된 이 도시는… 존경받고 연륜있는 분들이 다스림이 보다 합당할 것입니다.”

그는 말을 끝맺고 곧바로 동료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실망과 거부를 담은 아우성을 토해냈지만, 그는 애써 사람들을 헤치고 자리를 피했다.

누가 제이피리스를 다스리기 합당한가를 두고 격론 끝에, 선별된 존경받는 귀족과 시민들을 중심으로 공의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공의회는 구성되자마자 절대절명의 도전에 부딪쳤는데, 바로 제이피리스 주변 대영주들의 선전포고였다.

공의회는 귀족과 구 관료를 비롯한 주화파와 평민 대표를 주축으로 결사항전을 부르짖는 주전파로 나뉘어 치열히 다투었다. 민심은 흉흉해져 갔고 어느샌가 사람들 틈에 일부 귀족들이 혁명영웅 칼라인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비밀리에 강화교섭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주전파는 이러한 여론의 기세를 타고 단번에 주화파를 반역세력으로 몰아 처단하고, 칼라인을 찾아왔다. 제이피리스 모든 민중의 마음은 오직 우리의 영웅왕 칼라인을 향하고 있었다.

건국왕 칼라인 듀리온은 이토록 사심 없는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폭군의 압정에 시달리면서도 모두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력할 때 분연히 일어난 용기와 기백만이 아니라, 이기적인 야심이 아니라 오직 무고한 시민들을 지켜 구하기 위해 싸운 투사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진실된 성품이 그를 제국 붕괴 후 난세 가운데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한데 모은 에레모스의 통일왕으로 세운 것이다.

교회를 주축으로 한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영웅왕 칼라인 듀리온의 이러한 행적이 요정들의 제국에 대한 독립운동으로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듯 하나, 이는 무리한 주장이다. 실제로 요정들의 제국은 제이피리스의 혁명 이전에 실질적으로 붕괴해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잃은 상태였다.1) 그랬기에 제이피리스 영주가 그토록 살인적인 폭정으로 파멸을 자초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유력 귀족 출신도 아닌 칼라인 듀리온이 영웅으로서 제이피리스의 군주에 오를 수 있었던 것 역시, 당시 제국의 지배질서 붕괴를 시사한다.

제국의 붕괴로 에레모스 반도 전역은 각지 군웅들 간의 무자비한 각축장으로 변했고, 탐욕스런 군왕들의 야심은 민중의 고혈을 짜내어 정복욕을 충족시키기에 급급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옛 요정제국의 계승을 기치로 올리기도 했고, 일부는 구 제국질서의 타파와 신세계 건설을 표방했으나 이 모두가 헛된 대의명분이었음은 두말할 나위없는 것이다. 그들의 전쟁은 그 어떤 찬란한 대의를 노래했을지라도, 실상 더 많은 권력과 영토를 손에 넣으려는 아귀다툼에 불과했다.

그토록 왕과 황제가 되기를 꿈꾼 야심가들은 스러지고, 오히려 사심 없던 무명의 영웅이 통일왕으로 세워진 것은 운명의 놀라운 섭리이다. 우리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소도시 제이피리스의 젊은 영웅이 이룩한 기적적인 위업 위에 살아있음을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영웅왕 칼라인 듀리온, 그는 동시대를 살아간 무수한 군왕들처럼 ‘반도의 평화’나 ‘구 제국의 타파와 신세계 건설’ 같은 허망한 구호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전쟁은 오직 압제와 전란에 신음하는 민중들을 구하기 위한 싸움이었고, 바로 그랬기에 그가 온 백성의 마음을 한데 얻은 왕국의 통일왕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이다.

1) 루디스 런포스 경이 운명과 왕에 인용한 촌로의 말 및 주석에서 제국의 붕괴가 건국 이전임을 밝히고 있다.

댓글

정석한, %2007/%10/%21 %23:%Oct:

드디어 고대하던 글이 올라왔군요. 잘 읽었습니다.

그동안 광열님의 부재로 요정파가 당한 핍박의 나날들을 생각하면…. 실로 웃음이 나오는 반요정파의 1인입니 실로 반도 요정들의 기구한 운명이 아쉽습니다. (웃음)

기존 기사들에 대해 절묘한 견제를 던지셨군요. 어쩌면 이런 시각 쪽이야말로 민중주의의 복스 포풀리가 좋아할 만한 시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로키, %2007/%10/%22 %10:%Oct:

호.. 요정파의 도전장인 것입니까! 다른 기사 내용을 멋지게 엮으신 솜씨가 돋보입니다. 서두의 싯귀하고 말덴씨의 여행가다운 풍모가 두드러지는 서론 부분도 잔잔한 감동이 있네요.

 
_엔, %2007/%10/%22 %16:%Oct:

기다리고 기다리던 요정파의 기사 ;ㅁ; 부드러운 어조로 여태까지 누구도 생각지 않았던 주장을 던져주셨군요. 이 기사에서 그려진 칼라인의 소탈한 풍모가 마음에 듭니다. 앞으로도 기사 기다리고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