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겐하임 해전

이라하에서의 전투가 듀리온 왕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싸움이었다면, 라겐하임 함락은, 루오르 아마란타를 이라하로 몰아낸 사건이었습니다.

사료의 소실로 전성기 제국의 규모나 전력은 짐작이 어렵습니다만, 에레모스 반도 내의 절반 정도를 지배하던 당시의 듀리온 왕국과 비교하면 루오르 아마란타가 집결한 구 제국 세력은 그보다 더 큰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조급하게 단기 결전에 나섰고, 결과는 참패, 그 자신은 전사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듀리온 왕국은 북방의 아킬라니 지방을 비롯, 그 일대의 제후국을 차지하고 남진하여 반도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였고, 구 제국 세력은 반도 너머의 대륙 일부와, 반도의 남단으로 분단된 상태였습니다. 이 시점에서 아마란타는 필시, 양면 협공으로 듀리온 왕국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겠다고 결심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 중심에는 내전으로 전력이 피폐해진 반도 남부의 세력을 해상으로 지원한다는 구상이 있었고, 난공불락이라 불린 라겐하임이야말로 그 대규모 병력과 물자의 해상 수송에 적합한 요충지였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라겐하임이 포위되자 루오르 아마란타는 휘하의 도리아에게 함대를 이끌고 가, 라겐하임을 구원하라는 명을 전달합니다. 한편 제해권을 장악할 능력이 없고, 육로에서의 라겐하임 공략에 몇 차례 실패를 맛본 듀리온 왕국은 벨가스트와의 동맹1)을 통해 국면을 전환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펜너 교수해적 여왕과의 만남에서는 동맹 체결 과정과, 라겐하임 공성 전략이 어떻게 수립되었는지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며칠간의 해상 봉쇄로 상대의 초조감을 부채질한 이후, 달이 없는 밤에 대선병기를 제압하고 동시에 협만을 통해 진격한다는 이렌가르드 여왕의 전략은 실로 그 재능을 잘 보여준 묘책이었지만, 그 시점의 이렌가르드는 도리아 함대의 이동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해상 봉쇄를 하면서, 달이 지는 어둠을 기다리던 벨가스트 해군에게 그 소식이 알려진 것은 봉쇄를 개시한지 닷새가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아넬리아드 아프 아위르의 수기는 당시의 작전 회의 내용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더 이상 달이 없는 밤을 기다릴 수는 없어요.”

여왕은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첫 만남 이래, 줄곧 내게 새로운 시의 영감을 던져 주던 저 고귀한 여왕도 예기치 못하게 전략이 엉클어진 점에는 당황한 모양이다.

“오늘 밤에라도 당장 대선(對船) 병기를 무력화시키겠습니다. 야습의 효과가 적으니 다소의 피해는 각오해야겠지만 실보다 득이 클 것입니다. 내일 안으로 라겐하임의 성문을 열어 보이겠습니다.”

다닐이 힘을 주어 말했다. 동시에, 그는 그 주먹을 가슴 위에 올려놓았는데 그 당당한 모습에는 나 뿐 아니라 돈울프도 심히 감탄한 모양이었다. 벨가스트의 미노타우르스라 불리는 그의 용맹과, 부대 지휘 능력은 며칠간 머물면서 잘 지켜보았다. 전략의 밑그림을 여왕이 그린다면, 그 그림에 색을 입혀온 것은 분명히 이 사내이다. 병사들을 통솔하는 모습만 보아도 그가 굴지의 명장들에게 뒤지지 않는 전술가라는 점은 확신할 수 있었다. 육전에서라면 또 모를 일이지만.

“그런 피해를 감수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이대로 적함이 도달하면 그들은 먼 바다에서부터 우리를 포위할 것입니다. 때맞추어 라겐하임의 군선이 출항하면 양면으로 협공을 받게 됩니다. 전멸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 제이피리스 전투의 때가 떠올랐다. 돈울프의 계책을 전하가 물리치신 이후 중신들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건국왕 전하는 끝내 기습을 선택하셨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는데, 과연 이 여왕의 선택은 어떨까. 공성을 서두르게 될까? 아니면 일시 철수하여 후일을 도모할까? 재미있는 것은, 전하의 으뜸 가는 무장인 세렌 장군은 협공의 위험을 제기하는 중신들의 의견을 “몇명이 어느 쪽에서 오던, 모조리 전멸시키면 그만입니다.” 라고 일축했는데, 여왕의 오른팔인 다닐은 일견 신중하고 상식적인 의견을 개진하고 있었다. 각각 듀리온과 벨가스트를 대표하는 무장은, 그 지위나 실적에 있어서는 별반 차이가 없지만, 성격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그렇겠죠. 라겐하임의 군선은 때를 놓치지 않고 출진하여 협공하겠죠.”

순간, 보석과 같이 아름다운 여왕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벨가스트의 배는 폭이 좁고 비교적 소형이라 넓은 바다에서 싸우기 불리하다는 인식이 있어요. 도리아 함대는 라겐하임을 구원하기 위해 강행중이니 선원은 피로하고, 또 습격을 예상치 못할 거에요.”

“저들에 비해 배가 작으니, 밤이라면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도리아 함대가 구원을 위해 다가온다는 것을 저들의 귀에 들어가게 하면 반드시 끌어낼 수 있어요.”

“라겐하임의 배는 썰물에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 시간차면 충분히 각개격파 할 수 있겠죠.”

이미 익숙해진 그들만의 대화에 나와 돈울프는 순간 서로를 마주보았다. 저 두 사람의 대단함은 인정하지만, 소외된 기분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라겐하임은 항구로 통하는 협만 양 쪽 끝의 절벽에 대선 병기를 배치, 그 주위로의 적선의 접근 자체를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벨가스트 해군은 대선 병기의 사거리 밖에서, 지나가는 모든 배를 무차별적으로 공격, 나포하여 상대의 초조감을 부추겨 왔습니다. 그러한 대치상태가 지속된지 며칠이 지나, “도리아 함대가 지원을 위해 접근 중” 이라는 소식은 전황을 크게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먼저 벨가스트의 함대 절반이 급행, 항해 중이던 도리아 함대에 야습을 가합니다. 연안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장소에서, 소형선으로 구성된 벨가스트 해군의 습격은 제 아무리 이름 높은 안드레이 도리아 제독에게도 예상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한편 벨가스트군 역시 무리한 공격은 피하고, 신속하게 접근해서 몇 척의 배에 불을 지르고 자고 있던 수병들을 죽인 후 빠르게 이탈했습니다. 이에 도리아 함대는 며칠간의 계속된 항해에 지치고, 더해서 야습에 대한 부담이라는 이중고를 맞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그 항해 속도가 더뎌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연안을 벗어난 곳에서 도리아 함대를 공격하는 것은 벨가스트 군에게도 부담이 되는 일이었기에 진군 속도를 늦추고, 상대를 피로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도리아 함대. 이미 뛰쳐나갈 준비를 마친 라겐하임의 군선. 비록 자랑하는 대선병기의 사거리로 벨가스트 해군을 끌어들이지는 못했지만, 상대를 포위 섬멸할 만반의 준비는 갖추어진 셈입니다. 한편 벨가스트 해군은 여전히 해상 봉쇄를 유지했고, 벨가스트 해군의 기함인 바르바로사는 여전히 라겐하임의 시야 안에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해적질로 제국의 바다를 어지럽혀온 무리들의 수괴가 친히 출동하였고, 이제 곧 앞뒤로 적을 맞게 될 형국임에도 후퇴하지 않고 있다는 실로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놓치고 싶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여왕 이렌가르드는 그 자신을 미끼로 내건 셈입니다.

한편, 다닐은 야음을 틈타 협만에 별동대를 보내어, 사슬로 협만의 입구를 묶기를 지시합니다. 그런 상태로, 7월 19일 아침, 후세에 “라겐하임 해전” 으로 불리는 전투가 막을 연 것입니다.

수평선 너머 도리아 함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라겐하임 항구에 정박한 군선들이 분주하게 출항 준비를 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도박이다. 저들이 출항하기 전에 도리아 함대를 제압하여 각개격파할 수 있다면 아군의 대승. 실패한다면 두 배가 넘는 적을 양면으로 맞게 된다. 해전에서는 바람이 중요하다 하는데, 앞뒤로 적을 맞으면 풍상측과 풍하측에 동시에 적을 두게 되니 그 기동의 폭도, 바람의 이점도 제한당하게 된다고 한다.

“전 함대, 전속전진.”

목에 힘을 주어 지령을 내린 다닐은, 나를 보고 살짝 웃었다.

“무언가를 꽉 붙들고 계시길.”

순간, 배가 크게 흔들리며 가속했다. 그동안 쾌속정이라고 생각했던 벨가스트의 배는, 나를 배려하기 위해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그런데 다닐 장군. 배가 빠르다 한들 라겐하임 해군이 출병하기 전에 도리아 함대를 전멸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소?”

다닐은 대답 없이 미소지었다. 잠시 후, 환성 소리에 돌아보니 협만에 라겐하임의 배가 엉망으로 엉켜 있었다.

“사슬로 묶어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곧 협만 안쪽은 썰물이 됩니다. 저들은 저녁까진 움직이지 못해요. 우리 벨가스트의 배처럼 밑이 얇고, 소형이면 어떻게든 빠져 나오겠지만.”

기함 바르바로사를 제외하면, 전부 다 소형의 쾌속정에 가까운 벨가스트 해군은 무서운 속도로 도리아 함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선두에 장착한 충각으로 적선의 옆을 들이받고, 갈고리를 걸고 배를 점거해 나갔다. 그 모습은 커다란 동물에게 달려드는 피라냐 떼와도 같았다. 몇 배는 덩치가 큰 상대를 여럿이 포위하고 덤벼들어 배를 점거해 낸 것이다.

벨가스트 해군의 전법은 철저한 각개 격파로, 최소 세 척 이상, 많으면 다섯척에 달하는 배가 적선을 포위하고 격파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벨가스트의 군선은 돛과 노를 함께 이용하는 데다가 소형선이라 기동성이 좋고 속도 또한 빠른 것이 특징이며, 일단 백병전이 벌어지면 노잡이들 역시 전원 무기를 들고 싸우니 비록 소형선이지만 실 전투병력은 다른 군함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는 편입니다. 그러한 배가 세 척에서 다섯 척까지 동시에 적선을 공격하니, 기본적으로 상대보다 두 배 이상 많은 병력으로 배를 점거해 나간 것입니다.

장기간의 항해로 인한 피로, 그리고 야습에 대한 부담으로 극도로 지쳐 있던 도리아 함대는 벨가스트 해군의 예기치 못한 맹공 앞에 너무도 손쉽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야습은 절묘한 효과를 거둔 셈입니다. 무엇보다, 도리아 함대의 도착 시기를 아침으로 유도한 것은 이렌가르드의 여러 작전 중 가장 절묘한 것이었습니다. 도리아 함대의 도착이 늦었다면 라겐하임 해군은 썰물을 맞아, 출격을 거부했을 것이고, 도리아 함대 역시 응전하지 않고 숨을 돌리게 되었겠지요. 늦어진 진군 속도의 탓에, 벨가스트 해군을 양면 공격할 수 있는 기회는 썰물이 오기 전에 빠르게 출격하는 것 뿐이었고 지칠대로 지친 도리아 함대 역시 그대로 벨가스트 해군을 공격해야 했던 것이 결정적으로 승패를 결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리아 함대가 궤멸당하고 난 후, 협만 입구에서 사슬과 간만의 차에 의해 출격도, 퇴각도 하지 못하고 묶여 있던 라겐하임 군함은 불화살에 의한 화공으로 허무하게 패배합니다. 패배를 깨달은 라겐하임의 해군은 배를 포기하고 대부분이 성내로 무사히 퇴각했지만, 군선은 전소하고 만 것입니다. 비록 대선 병기가 건재하여 바다로부터의 라겐하임 침공은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육로와 해로 양쪽에서 봉쇄당한 라겐하임이 곧 고사할 것은 자명한 노릇이었습니다. 이에 라겐하임의 영주 펠가르는 해상 봉쇄를 이겨낼 방법이 없음을 인정하고 마침내, 7월 22일에 백기를 들게 됩니다. 항복의 사절을 파견한 펠가르는 병사들의 안전한 퇴거를 요구하고, 자신은 자결합니다.

라겐하임의 해전은 당시로선 보기 드문 대규모 함대전이었고, 또 돌격과 백병전이 해전의 주요한 전법이었던 마지막 해전입니다. 이후의 배는 갈수록 대형화되고, 중장비로 무장하게 됩니다. 육지에서 총기가 위용을 떨친 만큼, 바다에서는 대포가 위력을 과시하게 된 것입니다.

라겐하임에서 도리아가 이끈 해군 함대 중 본국으로 귀환한 것은 채 20%도 되지 않는다 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국은 반도 이남과 대륙간의 수송로를 잃었고, 제해권 또한 완전히 상실하게 됩니다. 이에 루오르 아마란타는 속수무책으로 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모략을 꾸미지만 돈울프 공에 의해 간파당하게 됩니다. 마침내, 초조해진 그는 병력을 수습하여 이라하로 향하지만, 이 또한 무참한 패배로 끝나면서, 비로소 듀리온 왕국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 점에서, 반도 내 제국 세력의 숨을 끊은 것은 이라하였지만, 승패는 라겐하임 해전에서부터 판가름 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육상의 브레넌과 세렌, 바다에는 벨가스트의 다닐과 같은 명장을 보유한 듀리온 왕국 세력에 비하면, 제국은 루오르 아마란타 본인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만한 명장이 없었습니다. 그 자신이 제국 제일의 용장이자, 전략가였고, 명 정치가이자 책략가이기도 했던 당대의 영웅 루오르 아마란타이지만 결국 무참한 패배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무릇, 소수는 다수를 이기기 어려운 법입니다.

1) 해적 여왕과의 만남의 견해에 따름

댓글

정석한, %2007/%11/%01 %19:%Nov:

해전은 아무래도 만족스럽지가 않습니다. 엉엉.

 
로키, %2007/%11/%02 %07:%Nov:

'해적 여왕'을 쓰면서 스스로 미진했던 부분들이 보충된 기분이라 좋네요. 제일 의문이었던 건 역시 공성을 당하고 있다면 구원군이 올 기대나 적이 스스로 물러날 가능성 없이는 항복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죠. 해적 여왕에서도 동맹이 있긴 있었겠고 듀리온 군대도 공성이 오래 끌면 퇴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겠지만 외부 상황까지 생각하기는 애매해서 적당히 생략했는데, 이 글은 건국 2시기 글들을 기반으로 해서 그런 점이 추가된 게 마음에 들어요

또 하나 미진했던 점은 반트족이 사용하는 배의 해전 적합성이었는데 그 부분도 잘 설명하신 것 같네요. 총포가 바다에서도 위력을 떨치면서 해전에는 부적합해졌다는 설명도 그렇고.. 거북선도 진짜 위력은 선체가 낮아서 잘 안 보였다는 점이었다는데, 반트족의 용선도 해전에서 사용하면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또 에레모스 남해안은 만과 섬이 많은 지형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선체가 낮은 용선은 숨기기도 좋을 테고, 다른 배는 좌초할 얕은 물에서도 항해할 수 있는 특징을 이용해 도주나 함정 유도에도 좋을 것 같아요.

보통 후대에는 전쟁의 마지막 대형 전투를 결정적인 전투로 기억하지만, 보통 승패는 그 훨씬 전부터 결정이 나고 그 '결정적인' 최종 전투는 승패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에 가깝다는 건 잊기 쉬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 개의 기둥도 그런 생각으로 쓴 것이었고, 복스양도 그 점을 놓치지 않는 예리함을 보여주고 있네요. (민중주의자라기보다는 군사 분석가적 면모가 보이는 건 제 착각일까요? ㅋㅋ 복스양을 끌어들이게 벨가스트야말로 시민사회적 구조를 이루고 있었고 이 점은 건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기사라도 써야겠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_엔, %2007/%11/%04 %17:%Nov:

만족스럽지 않으시다뇨! 이런 글에 익숙하지 않은 저는 눈이 팽팽 도는; 멋진 전략이었습니다. 로키님 말대로 복스 양은 뱀프님이 빙의한 탓인지 점점 군사분석가가 되가는 것 같아요. 벨가스트가 시민 사회였으면 정말 재미있었겠군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