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여왕과의 만남

최근 필자는 건국왕 칼라인 듀리온의 군대에 있었던 궁수이자 바드 아넬리아드 아프 아위르가 남긴 기록을 입수하는 행운을 얻었다. 특히 그 중에는 칼라인 듀리온 폐하가 가장 신뢰하는 외교관이었던 돈울프가 벨가스트로 떠난 첫 외교 임무의 기록이 있어서 흥미를 끈다.

'벨가스트의 해적 여왕'이라고 당시 알려졌던 이렌가르드와의 첫 만남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거칠고 천박한 야만인을 상상하고 있었지만, 붉은머리를 흰 가운 위에 길게 늘어뜨린 여성이 금과 보석으로 장식한 뿔잔을 들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 순간 할말을 잃었다. 새로운 시는 몇 편 떠올랐지만.

대표로 우정의 잔을 받은 왕의 아들 아스파 역시 깊이 감명받은 모습이었다. 두 손으로 뿔잔을 내미는 여왕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는 소년의 손이 떨리는 모습이 보였으니까. 그는 여왕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기색이었지만, 다행히도 잔을 함께 잡은 채 차례대로 한 모금씩 마시는 의식을 무사히 마치기는 했다.

다음날 돈울프공은 여왕의 집무실에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의 연회 후 새벽까지 벨가스트 궁의 스칼드–그들이 음유시인을 이르는 말이다–와 술을 마시며 노래를 교환했던 나는 교섭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결국 여왕은 다닐 장군이 이끄는 수군과 군선을 지원해주기로 약속했다는 소식을 저녁에 들었다.

며칠 후 있은 작전 회의에 여왕도 참석한 것은 다소 의외였지만, 여왕 자신은 익숙한 일인 듯했다. 이날은 벨가스트의 소문난 용장 다닐을 처음 본 날이기도 했다. 여왕이 보낸 정찰 임무에서 갓 돌아온 그는 준수한 거한으로, 큰 몸집에도 불구하고 민첩한 움직임과 은근하고 조용한 태도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회의에서 여왕과 다닐은 마치 서로 정신이 연결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평소에도 이렇게 손발이 잘 맞는다면 왕을 잃고 수많은 주변 왕과 영주, 군벌의 표적이 되었던 벨가스트가 이렇게 온존해온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 연맹을 어째서 돈울프공이 그렇게 열성적으로 추진했는지 나는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라겐하임은 육지에서는 난공불락… 육로는 차단했지만, 항구로 통하는 협만(峽灣)을 지켜오면서 바다로는 여전히 물자를 운반하고 있지요. 그대들의 왕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왕의 말에 다닐은 지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해상 봉쇄입니까?”

“얼마 동안은 해낼 수 있겠죠. 하지만 우리도 언제까지나 라겐하임 협만에 수군력을 묶어둘 수는 없어요. 더 빠르고 근본적인 해결은 바다에서 공략해 함락시키는 방안입니다.”

여왕의 대담한 제안에 돈울프공은 눈썹을 치켜들었지만, 다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협만 양쪽의 절벽과 바다에 면한 도시에 배치한 병기들입니다. 공성 병기와 비슷한 형태인데, 좁은 지형에서는 배에 대해 치명적인 효과를 발휘하죠.”

“우리가 지금까지 실패한 이유도 그것입니다.”

돈울프공은 다소 씁쓸하게 말했다.

“다닐 장군의 말씀대로 그 효과는 치명적이었습니다.”

다닐과 여왕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고, 여왕이 입을 열었다.

“난 그렇게 큰 희생을 감수할 생각은 없어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다닐의 물음에 여왕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잠시 회의실 안에는 긴장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절벽 위의 대선(對船) 병기를 무력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도시에 바로 접근해서는 안 돼요. 그들의 군선을 끌어내서 파괴하면 라겐하임은 더 저항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항복할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그들의 함대를 끌어내실 생각입니까? 그들은 그런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 것입니다.”

여왕은 돈울프에게 대답하는 대신 다닐에게 몸을 돌렸다.

“잠시 동안이라면 해상 봉쇄를 할 수 있겠죠? 물자를 실어나르는 배를 포획하고, 그 사실을 라겐하임이 확실히 알게 해요.”

“라겐하임은 마음이 급해지겠죠.”

다닐은 으르렁거리듯 대답했고, 여왕은 바로 말을 받았다.

“벨가스트 수군의 위험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혈안이 될 정도로 말이죠.”

다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렌가르드는 말을 이었다.

“달이 없는 밤이 좋겠죠? 정예 부대가 절벽을 타고 올라가서 협만의 양쪽을 장악하는 거에요.”

“제가 직접 이끌겠습니다.”

“그들이 채 대응할 시간이 없을 바로 다음날 아침 해상 공격을 시작해야겠죠.”

여왕은 지도에 나온 협만을 따라 손끝을 움직였다.

“지는 척해서 끌어내는 것입니까?”

“그리고 협만 양쪽의 대선 병기를 그들에게 역으로 이용하면 피해도 주고, 퇴로도 차단할 수 있죠.”

“나아갈 길이 앞밖에 없다면-”

”-쫓아 나올 거에요. 게다가 라겐하임에서 육군이 나와서 병기를 장악한 정예 부대가 후퇴해야 해도 저녁까지만 시간을 끌면…”

“썰물이 시작되겠죠.”

두 사람은 동시에 말했다. 이때쯤 우리는 구경꾼이 된 기분으로 두 사람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와 같은 생각인가요?”

여왕은 라겐하임 협만 동쪽과 서쪽 지점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별동대를 둘로 나누어 이곳과 이곳에 감추어 놓고-”

”-그들을 일단 끌어내면 양면 협공으로 완전히 궤멸시킬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마치 보물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서로 마주보았다. 여왕은 우리가 방안에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상기한 듯 우리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잠시 아무도 말이 없다가 돈울프가 헛기침을 했다.

“사흘 전에도 드린 말씀이지만 다시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여왕에게 깊이 허리숙여 인사했다.

“동맹 요청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 말씀은 승리한 다음에 하시면 어떨까요.”

여왕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돈울프공이 여왕에게 세 번째로 감사를 표했는지는 기록에 나오지 않지만, 벨가스트 수군의 증원을 받은 칼라인 폐하께서는 마침내 라겐하임을 함락시키실 수 있었다. 아넬리아드는 라겐하임 해전의 기록을 산문 대신 노래로 남기고 있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그리고 그때 마나그의 아들 다닐이
한 달음에 뱃전을 넘어 적의 배에 뛰어드니
그의 검 앞에 맞설 자가 없더라.
갑판에 피가 붉게 흐르고
하늘의 석양은 더욱 붉으니
그들이 두려워 이르되, 이는 정녕
여자의 아들이 아닌 바다의 전신(傳神)이라.

(중략)

여명의 황금과 함께
돛은 승리의 바람에 부풀어
벨가스트의 해안으로 돌아오니
여왕이 가로되, 이 승리의 잔을 마시라
벨가스트의 전사들이여
그리고 가장 영광스런 수장, 나의 형제여

그러나 마나그의 아들 다닐 말하길
맹세코 이 승리는 주군의 영예로다
승리의 잔은 주군의 것
그리고 벨가스트의 충성은 여왕의 것
목숨으로 주군을 지키기만을 바라나니
이끄소서, 여인 중 가장 지혜로운 이여
반듀아의 가호를 받은 여왕이여
승리와 명예를 벨가스트에 영원히!

이와 같이 건국의 과정부터 이미 이렌가르드와 그녀가 이끈 반트족의 왕국 벨가스트는 건국의 중요한 일부분이었으며, 특히 이렌가르드의 지략과 다닐의 용맹은 난공불락의 라겐하임을 함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칼라인 듀리온의 에레모스는 그 시작부터 민족적, 종교적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댓글

_엔, %2007/%10/%15 %13:%Oct:

아스파의 역사적인 첫 사랑의 시작을 서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켈트적인 노래를 한 수 지으셨군요! 저한테도 작사법 좀 가르쳐주세요^^;

그런데 기사의 한 줄 요약은 '벨가스트가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보다 '벨가스트가 라겐하임의 함락을 도왔다'고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전자로 해버리면 역사의 너무 큰 부분이 결정되어버리는 것 같아서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승한, %2007/%10/%15 %13:%Oct:

이렌가르드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왔네요. 저는 단순히 정치적인 쪽에서만 활약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군사적인 재능도 풍부하군요. 역시 캐리어우먼(…)

 
정석한, %2007/%10/%15 %19:%Oct:

게다가 다닐 역시 생각 외로 - 다닐 장군에게는 실례되는 부분이지만, 저는 말 그대로 뇌까지 근육(…)인 무골을 상상해 버렸습니다 - 지모가 돋보이는 인물이군요. 적어도 일국을 대표하는 무장다운 소양은 확실히 갖추고 있는 인물로 나오는 점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한번 다루어 보고 싶은 충동이 샘솟는군요.

 
로키, %2007/%10/%15 %21:%Oct:

_엔/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그저 스쳐가는 순간이었지만 아스파에게는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던 거죠. 그 대조를 한 번 그려보고 싶었어요. 작사는 그냥 성경식(..) 고어로 쓰고 줄을 끊으면 완성입..(..?)

말씀대로 역사 요약에서 좀 일반화가 센 것 같아서 (?) 수정했습니다.

오승한/ 전쟁도 정치의 수단이니까요. 따라서 그녀는 전천후 정치인인 겁..

정석한/ 일단 지모가 필요한 때는 매우 지성적이지만 (특히 그가 잘 아는 군사 문제에서는), 이성이 아닌 본능과 경험으로 움직여야 할 난전 상황이 되면 뇌를 끄는(..) 용장으로 떠올랐습니다. 기사에서는 양쪽을 다 표현해보려고 노력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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