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외전 I : 꽃밭을 유영하다

”…그러니까 센, 두 번 다시 그 공구들로 기계들을 마음대로 분해한다던가, 내 실험용구들을 마음대로 만진다던가, 특히 결과를 알 수 없는 화학실험 같은 걸 내 작업실에서 하면 안된다, 알겠니?”

그의 말에 온 몸이 흙빛 털로 뒤덮힌 자그마한 늑대 소년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에 스승님도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이런 녀석에게 그런 위험한 물건을 선물로 주시다니. 덕에 나도 제다이 공의회에 변명을 하느라 고생했단 말이다, 어지간히 믿을 만한 이야기였어야지…”

“어머, 그건 좀 심한 말 아니니?”

뒤에서 기척도 없이 다가온 여성의 말에 로크락은 놀란 듯 화들짝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그와 비슷한 높이에서 팔짱을 낀 채 싱글거리는 칼레나 할레크가 있었다. 언제나처럼 옅은 흙빛의 머리칼을 틀어올린 채 호수빛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스, 스승님! 언제 들어오셨나요?”

“내 생각이 어떠니 운운할 때부터.”

그녀는 센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다 시무룩해진 그를 바라보며 문득 놀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저런 표정은 짓지 않는 어린아이였는데.

“하여간에 어린애를 괴롭히다니, 그게 제다이로서 할 일이니?”

“하지만 저 녀석이…”

칼레나 할레크는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 일어나 그의 작업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모나지 않게 둥근 구멍이 작업실 천장을 지나 코루선트의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옅은 빛깔의 하늘을. 유난히 햇빛이 밝은 날이었고 주위는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듯. 칼레나 할레크는 그렇게 잠시 그 구멍으로 하늘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 사랑스러운 제자의 작업실 천장에 구멍을 낸 건 어떻게…”

“제다이 공의회는 높이 수백미터짜리 해바라기를 간판으로 삼고 싶지는 않다네요.”

그 말에 그녀는 잠시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짓다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에, 얄궃은 분들이라니까.”

“뭐 그런 이유 말고도 리펄서 리프트 차량 통행에도 문제가 있고 말이죠.”

문제의 발단은 센이 그의 작업장을 뒤지다 식물의 생장을 조절하는 촉매에 관한 연구서를 읽은 것이었다. 로크락은 센이 그것을 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며칠 전 소년이 완벽히 분해해버린 기계들을 고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이 때문에 그는 센이 그의 작업실을 돌아다니며 화학 용액들을 모으고 있는 걸 보고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그는 자신의 작업장 천장을 뚫고 자란 거대한 해바라기를 보며 경악해야 했는데, 전날 센이 어디선가 구해온 해바라기 화분으로부터 거대하게 자라난 그 꽃은 하늘 높이 제다이 템플 위에서 여유롭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코루선트의 구석에서 숨어 있던 센을 찾아온 것은 칼레나 할레크였는데, 그녀는 로크락이 뜨악한 표정으로 자신의 작업실에 서 있는 걸 보고 곧장 달려가 센을 발견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 늑대 소년은 그 해바라기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방법은 모르고 있었고, 로크락은 제다이 공의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해명해야 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센이 이전에 그 거대한 해바라기를 자를 만한 기계를 모조리 분해해버린 덕에 그는 밤을 새며 절단기를 재조립해야 했다.

로크락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센이 분해해놓은 기계들을 재조립하기 시작했다. 센은 그에게서 거리를 둔 채 칼레나 할레크 옆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전 같으면 금방이라도 달려가 그의 옆에서 눈을 빛내며 작업을 지켜보았을 소년은 시무룩하게 서 있을 따름이었다.

“파다완 로크락, 그래도 센을 칭찬하지 못할 망정 그렇게 다그치는 건 심하지 않니?”

“그렇지만 표준용액을 가지고 농도조절조차 하지 못하는 녀석이 제 실험용구를 가져다 마음대로 실험을 했단 말입니다. 식물의 생장을 조절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기껏 희석시켜 놓은 용액들을 가져다 자기 멋대로 촉매를 만들지 않나…”

문득 그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에 칼레나 할레크는 문득 센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무룩한 눈동자로 그녀를 올려다보면서. 그녀는 미소 지으며 센의 손을 마주 잡고 작업실 문을 나서며 말했다. 로크락의 대답이 문득 들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가르쳐주지 않은 건 너잖니? 어쨌거나 나는 센을 데리고 산책이라도 하고 올테니 열심히 하렴.”

“그렇지만 저 녀석이 제 작업장을 무너뜨렸잖…”

코루선트의 하늘은 돌을 던져 파문이 인 호수처럼 반짝였다. 주위는 고요했고 지나다니는 이들조차 없는 코루선트의 한적한 건물 어딘가에 괴짜로 소문난 파다완 코티에르의 정원이 있었다. 인공물이긴 하지만 조용히 흘러가는 시냇물과 그 주위로 난 꽃들이 작지만 성의를 들여 꾸민 정원이라는 걸 짐작케 했다.

바위 위에 자그마한 늑대 소년을 앉힌 뒤에 칼레나 할레크는 주저앉아 그의 눈을 마주보며 물었다.

“왜 이렇게 시무룩해 있니? 파다완 로크락도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말 한 건 아니란다.”

”…”

대답이 없는 센을 바라보다 문득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에 로크락도 그렇지, 나는 그 해바라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야. 코루선트에서는 이런 곳을 빼곤 살아있는 식물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 이곳은 파다완 코티에르의 고향인 코렐리아도 아름답기 짝이 없는 나부 행성도 아니니 그런 걸 기대하는 건 힘들지만. 그래도, 그런 걸 보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니까.”

“그렇지만, 파다완 로크락이…”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던 센의 말에 칼레나 할레크는 문득 웃었다. 이 아이도 어지간히 로크락에게 의지하고 있었구나. 정작 한번도 보지 못했으면서도 주위 이야기에 센을 로크락의 아들 운운하는 파다완 코티에르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들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늑대를 닮은 소년, 아직은 어린 늑대이지만.

“오래 전에, 나도 꽃을 심어본 일이 있었단다.”

그 말에 문득 센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씨앗을 구하기가 힘들었는데, 어떻게 세 알 정도는 구할 수 있었어. 스승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라이트세이버 검술 연습을 빼먹을 정도로 시간을 들여 키웠는데, 내가 서툴렀던 탓인지 아니면 이곳 환경이 잘 맞지 않았던지 잘 자라지 않았던 거야. 그렇게 한참 시간을 들여 새싹이 나왔지. 그 중에 가장 처음 심었던 씨앗에서 나온 새싹은 잎을 셋 가지고 있었어. 이상한 일이었지, 다른 둘은 한 쌍의 잎 뿐이었고 분명 셋 모두 같은 씨앗이었는데 말이야.”

칼레나 할레크는 말하다 문득 웃었다. 기운없던 소년의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무척이나 불안했단다. 혹시 내가 무언가 잘못한 건 아닐까, 아니면 무언가 이상이 있는 씨앗이었던 걸까. 그것 때문에 검술 수련도 포스 수련도 게을리하게 되어 버렸는데, 정작 스승님은 새싹들을 굽어보시더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시는 거야. 제자가 하루 종일 새싹들만 바라보고 있는데도 말이지. 특히나 기형이라고 생각했던 그 새싹은 하루라도 눈을 돌리면 금방 시들 기미가 보이곤 했단다. 힘든 일이었어.”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칼레나 할레크는 그 질문에 말없이 센의 손을 잡아끌어 정원의 한구석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유독 연노랑색의 자그마한 꽃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녀는 그곳에 앉아 꽃들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셋 모두 잘 자라서 꽃을 피울 수 있었어. 하지만 기형이라고 생각했던 그 꽃은 유독 눈에 띄게 아름다운 꽃을 피웠단다. 꽃이라고는 관심도 없을 사람까지 씨앗을 나눠줄 수 없냐고 물어보았을 정도로 말이야. 뭐, 그 꽃으로부터 나온 새 씨앗을 뿌린 건 내가 아니라 파다완 코티에르가 한 일이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아름답게 핀 프리에르 꽃은 처음 본다고 했을 때 기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센은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는 얼굴로 꽃밭을 돌아보았다. 베오나드 코티에르가 심고 길러 주었던 그녀의 꽃에서부터, 낮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흘러가는 물소리를 지나 다시 칼레나 할레크의 눈동자로 돌아온 그의 얼굴을 마주보며 그녀는 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센, 나도 파다완 로크락도 네게 검술과 포스, 혹은 기계 다루는 법이나 꽃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 줄 수는 있단다. 하지만 네게 재능을 줄 수는 없지. 이 꽃밭 사이에서 그 특별한 꽃들을 구분하는 건 어렵지 않아, 그렇지만 단단한 껍질에 쌓여 보이지도 않는 재능을 발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란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 지었다.

“실수는 할 수 있는 법이니까. 이제 그걸 만회해야 하지 않겠니?”

칼레나 할레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로크락의 작업실 방향으로 멀어져가는 늑대 소년을 바라보았다. 길을 잃을 거라거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녀보다도 센이 코루선트의 길을 잘 알고 있을 터였으니까. 하늘이 맑았다.

다음날, 로크락은 여느때처럼 피곤한 얼굴로 자신의 작업실 문을 열었다.

“으아아아악!”

이 작고 불쌍하고 말없는 몽 칼라마리인이 비명을 질렀을 때 주위를 지나던 사람들마저 경악하며 그쪽을 돌아봤는데, 사실 그때 그 자들은 로크락의 작업실에 일이 생긴 것보다도 로크락이 비명을 질렀다는 사실 자체에 더 놀라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로 칼레나 할레크가 그의 작업실로 다가가다 멈추어 섰다.

“어머 로크락, 아무리 수영을 좋아해도 아침 댓바람부터 수영이니?”

“스승님! 농담이 아니라구요!”

로크락의 비명에 그때까지 웃음을 참던 칼레나 할레크는 깔깔거리며 배를 잡고 웃어댔는데, 이것이 도화선이 된 모양인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작업실 문 안쪽으로는 연노랑색 프리에르 꽃들이 한가득 자라고 있었는데, 로크락은 문을 열다 끌려 들어간 모양인지 꽃이 가득 찬 방 안에서 빠져나오려는 듯 허우적대고 있었다. 프리에르 꽃은 조금씩 작업실을 빠져나와 자라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칼레나 할레크의 발치에는 샛노란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조금씩 바닥을 덮으며 자라나는 꽃밭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걱정하며 타는 듯한 불안감으로 지켜보곤 하던 새싹이 그녀의 발 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외전 IV: 집으로 가는 길




홀로 우는 늑대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지막 남은 옥수수 가루를 한 움큼 집어 타오르는 모닥불에 집어 던지고, 눈을 감고 기나긴 기원을 되뇌고 나서 올려다본 하늘은 새카맣게 가라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진주를 빻아 흩어 놓은 듯한 하늘은 예전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이따금 흐릿한 별빛이 반짝이고 그 아래로 거대한 밤의 장막이 대지를 간질이면 저 먼 곳으로부터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니면 돌아오지 않는 이를 그리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볼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그녀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사실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아이들을 잃고 앞으로 다가올 슬픔까지 껴안았지만, 정작 비극이 다가오면 예언은 그 고통을 감화시켜주지 않았다. 그녀가 받은 고통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고통이었으니까.

그래서 가느다랗게 밤하늘을 수놓으며 떨어지는 빛의 궤적을 보았을 때에 늑대 부족장 홀로 우는 늑대는 차마 볼 수 없기라도 한 듯 저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침이 되어 저편으로부터 태양이 떠올랐고, 늑대 부족 사람들은 몇 시간이고 며칠이나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사냥꾼들을 기다렸다. 다만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부족한 늑대 부족민들이 바라는 것은 사냥꾼들이 상처 없이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었다. 넬바니안들과 이방인 사이의 불화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무기를 들지 않은 넬바니안조차 사냥감으로 전락해 버린 지가 오래였으니까. 설사 그들이 빈 손으로 돌아오는 한이 있어도, 차갑고 빈 몸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무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사나운 바람이 몰아쳐왔지만 부족민들은 동굴 입구에 서서 떠나갈 줄을 몰랐다. 유일하게 남은 아들이, 친척이, 혹은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 하나만으로 그렇게 버티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겨울의 태양이 안타까울 만큼 답답한 속도로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섰을 때에야 저편에서 일단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냥꾼들은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는 부족민들에게 사냥감들을 건네자마자 부족장이 앉아 있는 북쪽 언덕 위로 올라갔다 (다만 젊은이들의 중재자인 렌은 자신이 죽은 줄 알았다는 연인인 행복하게 춤추며를 달래야 했고, 그래서 사냥꾼들과 다른 부족 여성들로부터 애정이 가득 담긴 눈초리를 받고서야 그들을 따라 부족장을 찾았다). 언제나처럼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그들을 맞이한 홀로 우는 늑대를 보고 사냥꾼들의 길잡이인 점박이 독수리가 앞으로 나섰다.

“붉은 구름이 떠도는 곳에 우주선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사냥꾼들이 너무 지쳐 있었고 반나절을 걸어 있을지 모르는 생존자를 구하러 가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을 구하러 가야 하는지 어떤지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듣고선 부족장은 나직하게 한숨을 지었다. 차라리 꿈이었다면 좋은 일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가오리라고 확신하는 현실이 눈앞에 다가오면, 존재는 무력할 뿐이다.

“걱정할 필요는 없네. 그에게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길고 구불구불할 테니까.”

여전히 모호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으나 점박이 독수리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곤 물러섰다. 그러자 사냥꾼들도 각자 몸을 돌려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홀로 남은 부족장은 봄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약간의 희망을 찾았다. 봄이 찾아오면, 그저 냉혹한 얼음이 녹을 테고, 이어 땅 속 깊이 숨어있던 생명이 기어나올 터였다. 눈앞에 다가온 현실이 그저 거대하게 부풀려진 환상이었다는 것을 지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부족장도 예견했었지만, 그녀가 말한 손님이 낡은 로브 하나만을 걸치고 겨울의 끝자락에 선 황야를 떠돌다 늑대 부족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머뭇거리며 동굴 입구를 맴도는 발소리에 홀로 우는 늑대는 고개를 들었다.

처음 그녀 앞에 선 소년을 올려다보았을 때에 그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인도자의 눈이 가져다 준 능력 때문일지도 몰랐다. 혹은 언제고 잠이 들지 않는 밤이면 떠나보낸 아이가 어떻게 되었을 지 몇 번이고 그려 보곤 했던 탓인지도 몰랐다. 무엇이 진실이었건, 늑대 부족장은 모닥불에 비친 얼굴을 보자마자 그것이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그걸로 충분해 만족할 수 있었다. 처음 그가 돌아온다는 것을 예언한 순간부터 불안해했던 것은, 그가 무사히 돌아오는 점도 있었지만 그것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이 그를 알아볼 수 있는지였기도 했었으니까.

홀로 우는 늑대는 복받쳐오는 거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소년을 올려다보고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에 불안해하던 소년은 마침내 안심한 듯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결국 약속은, 못 지켰네요.”

둘 모두에게 있어 안타까운 일이었겠지만, 홀로 우는 늑대는 그 미소에서 반가움과 기쁨을 보는 대신 그 깨질 듯한 가면 뒤에 숨겨진 불안함과 슬픔을 읽어냈다. 그것은 아마도 인도자가 그녀에게 준 운명을 보는 눈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눈 앞에 선 소년의 얼굴이 오래 전 그녀의 고집 때문에 잃어버린 아이의 얼굴과 닮았기 때문이었을까.

부족장은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센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인도자가 날 떠나갔어요.”

이미 오래 전에 몇 번이고 예상했던 말이었지만, 언제나 그랬듯 예언하는 것과 직접 귀로 듣는 것은 너무나 다르게 느껴지곤 했다. 언젠가 잃어버린 아이의 꿈을 몇 번이나 꾸고서도 정작 그 아이를 정말 잃어버렸을 때에 그 예언들이 그녀의 슬픔을 경감시킬 수 없었던 것처럼.

센은 흐려진 표정으로, 그리고 흐려진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약하게 느껴지는 몸과, 그보다도 더 불안해하는 영혼이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 있었다.

“언제나 내가 위험할 때에 잡을 수 있는 생명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스스로 해야만 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때에, 혹은 그럴 수 없을 때에 그 줄에 의지했지만 언젠가 그것이 정말 필요할 때에 힘껏 잡아당겨 보고서야 그 줄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렇게 말하며 센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늑대 부족장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알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그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잘 돌아왔구나.”

인도자가 그를 떠나간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인도자의 뜻을 그의 눈동자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어려운 일이어서이기도 했고, 인도자가 보는 것을 운명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해도 똑같은 것을 볼 수 있는지는 모를 일이어서이기도 했다. 다만 그녀가 알고 있던 것은 센을 단투인에서 탈출시킨 후에 인도자는 사라져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소년은 필사적으로 우주선을 몰아 넬반에 도착했다. 궤도 통제를 뚫고 넬반에 들어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인도자가 없다 해도 그는 뛰어난 기술자였고 그래서 마침 떨어지는 운석들에 섞여 들어가 아슬아슬하게 넬반에 불시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마치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한 아이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 설사 속은 멀쩡하지 못할지언정 그걸 드러내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홀로 우는 늑대는 안심했고 재회의 밤은 차츰 침묵으로 기울어갔다.




센은 문득 잠이 깨자 몸을 일으켜 천막 밖으로 나섰다.

새벽에 잠긴 넬반의 평원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평선까지 뻗어 있는 푸르스름한 빛의 평원은 굴곡 없이 눈을 아프게 찔러댔고 그래서 센은 눈을 찡그리며 저 너머를 돌아보았다.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겨울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넬반의 태양은 이미 떠올라 있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구름이 짙어 언제나처럼 햇살은 대지에 쉽게 다가서지 못했고, 그 아래에 있는 것은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설원 뿐이었다.

몸을 돌린 소년은 문득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려는 부족의 치료사 상처 입은 가슴을 마주쳤다. 센은 조금 당황했지만 상처 입은 가슴이 씨익 웃으며 목례하다 그도 목례하며 입을 열었다.

“어딜 나가시는 건가요?”

“약을 구하러 간다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다간 이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돌아온 날 밤부터 홀로 우는 늑대 부족장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온몸에 열이 심했고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는 듯 잠에서 깨어날 줄을 몰랐다. 센은 그녀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알아내 약을 만들어야 한다며 그녀의 병세를 가늠하려 했지만 부족원들은 그를 만류했다.

“부족장님의 병세는 상당히 심각해 보여요. 그리고 지금은 겨울이라 약초를 구하시려면…”

“부족장? 아 그렇군. 홀로 우는 늑대를 위해서이기도 하다네.”

“네?”

그 말에 센은 고개를 들어 상처 입은 가슴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치료 받아야 할 건 자네 같은데. 어떤가, 같이 가볼텐가?”

북쪽 황야는 소년이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고, 그는 왜인지 그 거대한 설원이 언젠가 그의 스승과 함께 임무 수행을 위해 지냈던 사막과도 비슷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사막과도 같은 침묵과, 사막과도 같은 엄숙함이 깃든 것처럼. 부족의 치료사인 상처 입은 가슴은 마치 길을 잘 알고 있는 양 평원을 거닐었지만 센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은신처가 있는 방향과 거리를 확인해야만 했다. 인도자가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불안해하지 않아도 좋았으련만. 센은 그들이 먹을 것은 커녕 싸늘하게 얼어붙은 것들 그 이상도 이하도 찾을 수 없는 곳에 고립되는 것은 전혀 원치 않고 있었다.

그리고 센이 마흔 다섯 번쯤 뒤를 돌아보곤 그들이 온 발자국의 방향을 확인하고 다시 앞을 돌아보았을 때에 상처 입은 가슴은 이미 저 너머의 야트막한 언덕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얼굴을 찡그리며 소년이 눈길을 달려 남자를 따라잡자 문득 그는 몸을 돌리며 새하얀 입김을 연신 내쉬고 있던 센을 마주보았다. 센은 그가 무언가 말하려는 것이라 짐작하고선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그저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뭘 찾으려는 거죠? 이 근처에 약초는 커녕 살아있는 것도 찾을 수 없잖아요.”

그 말에 상처 입은 걸음은 다시 걸음을 멈추고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자네는 자유로운가?”

센은 그 질문을 듣고서 잠시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었고, 또한 그래서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되물어 본 적이 없었던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그는 잠시 당황했고 그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만큼 이성적인 상태가 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과 불안함과 혼란을 동반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반응을 본 치료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네는 자유로운가?”

“자유라는 것은 책임을 동반하죠. 내가 누리는 자유만큼 똑같은 책임을 가지고 남들을 대해야만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어떤 이는 그것이 법칙이라고 하기도 하죠. 인과의 법칙이 있고, 도덕적인 법칙이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인간과 그 사회에 동반되는 법칙이 있다고 말이에요.”

그러나 상대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진실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린 그걸 궤변이라고 말하죠.”1)

소년의 대답에 상처 입은 가슴은 웃으며 몸을 돌렸고 센은 다시 성큼성큼 내딛는 그의 걸음에 맞추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다. 코루선트에서도, 혹은 다른 행성에서도 그보다 키가 큰 종족은 절대로 흔하지 않았지만, 눈앞에 선 이 인물은 마치 거인이라도 되는 듯 장대한 기골을 자랑하고 있었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던 소년은 그러나 그의 옆에 다가가서야 그가 귓가를 베어대는 날카로운 바람소리 사이로 무슨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곤 고개를 들었다.

“그대는 자기 자신에게 선과 악을 부여하고 그대의 의지를 그대의 머리 위에 율법처럼 내걸 수 있는가? 그대는 자기 자신에 대해 그대의 율법의 재판관이 되고 복수자가 될 수 있는가?2)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이 겨울에 눈 쌓인 황무지에서 약초를 찾을 수는 없을 겁니다.”

부드럽게 미소를 띤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상처 입은 가슴의 모습은 센에게 다소 비웃음을 담은 모습으로 다가왔고, 그래서 약간 날을 세운 대답을 보내었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의 치료사는 소년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혹은 그가 무언게 제대로 된 답을 내놓길 참을성있게 기다리는 선생과도 같이 걸음을 옮길 따름이었다.

“붉은 늑대여, 자네는 왜 우리가 이곳에 있는지 아는가?”

“먼저 세상이 있었기 때문이죠. 누가 이 세상을 창조했는지 어떤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 세상이 먼저 있었고 그 덕택에 생명이 창조되었으며 그들로부터 또다시 지식을 가진 동물들이 나타났으니까요. 하지만 언젠가 세상이 창조된 동기도 밝혀지게 될 겁니다.”

하지만 상처 입은 늑대는 또다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순수한 하늘과 어머니 대지를 목적이라는 족쇄에 묶어두려 하지는 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죠?”

그러나 미처 센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부족의 치료사는 미소를 띤 얼굴로 반가운 듯 걸음을 멈추며 시선을 돌릴 따름이었다. 소년도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돌아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는 의아해하면서도 먼저 걸음을 옮기는 상처 입은 가슴을 따라가는 수 밖에는 없었다. 남자는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는 무언가를 중얼거렸는데, 센은 곧 그것이 부족의 기원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기원을 마친 상처 입은 가슴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는 깊게 쌓인 눈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센은 그의 옆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곧 눈 아래 파묻혀 있던 것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눈 속에는 활짝 핀 꽃 한 송이가 있었다. 늑대 부족의 치료사가 몸을 숙이곤 입으로 꽃송이에 바람을 불자 이슬을 머금은 듯 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던 흰 꽃잎이 드러났다. 남자가 세월의 바람이 불어닥친 손을 뻗어 꽃잎들을 매만지며 미처 떨어지지 않는 눈송이들을 닦아내는 것을 보며 센은 그 꽃이 얼어 있던 것도, 혹은 시들은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상처 입은 늑대는 놀라서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던 센의 시선을 모르는 듯 기원을 외며 정성스럽게 흙을 파헤쳐 뿌리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하려는 듯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우리는 자유로운 자들이라는 거지.”

센이 이 한 마디 말이 아까 그가 한 질문의 대답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겨울의 밤은 차갑게 얼어버린 어둠을 몰고 다녔다.

이미 늑대 부족민들은 대부분 잠을 청해 은신처 안으로 들어가 있었지만, 센은 자신의 천막 앞에 주저앉아 그의 차례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운 은신처 주위를 거니는 사람은 없었다.

소년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는 발치에 놓인 돌멩이 하나를 집어 저 멀리 던져버렸다. 깊게 쌓인 눈 위로 던져진 돌멩이는 날아가면서 넬반 고양이의 비명소리나 머리에 천벌이 내렸으리라고 착각한 늑대 부족원의 기원(“인도자이시여!”), 혹은 그렇지 않으면 은신처를 알아내고 기습하려던 얼빠진 시스의 낭패한 듯한 고함소리(“들켰다! 제길, 어떻게 안 거지?)같은 것을 몰고 다니지는 않았다.

상처 입은 가슴이 만든 약을 마신 홀로 우는 늑대는 금세 일어나 기운을 차렸고, 마침 그녀의 꿈에서 때어난 부족장은 부족의 협력자와 잃어버린 아이에게 의식을 내리겠다고 선언함으로서 부족의 치료사인 상처 입은 가슴을 경악하게 있고 견습 치료사인 방황하는 늑대를 걱정하게 했다. 아무리 운명의 눈을 가진 부족장이었고 또한 부족의 예언자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무슨 직책이고 무슨 능력을 지녔건 결국 그녀는 일흔을 훌쩍 넘긴 노파에 불과했다. 한 번의 의식에도 하룻밤이 걸릴 테니 두 사람에게 의식을 치루게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말하는 상처 입은 가슴의 말에 홀로 우는 늑대는 괜찮다며 그의 말을 철저하게 무시했고, 그는 화를 내며 날뛰는 대신 혹시 있을 일에 대비해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소년은 그 의식이라는 것이 자신을 찾기 위한 의식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조차도 알지 못했다. 센이 처음 의식을 치루고 붉은 늑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을 때에 그 의식은 약식이었고 그나마도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생각에 잠겨 있던 센은 그러나 누군가가 다가왔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이군, 늑대 소년.”

“그렇군요. 코티에르.”

망토로 온몸을 두른 남자는 소년에게 다가와 그의 옆에 앉았다. 남자의 입에는 긴 담뱃대가 물려 있었고, 밤의 얼어붙은 침묵 사이로 흘러 올라가는 연기가 한 줄기 소년의 눈에 들어왔다.

“나를 더 이상 나이트로 부르지 않는 것은 칭찬해야겠지만, 내가 더이상 베오나드 코티에르가 아니라는 점은 안타깝기 짝이 없군. 하지만 이번엔 거의 정답에 가까웠으니 칭찬해주도록 하마.”

“그럼 이제 뭐라고 부르면 되죠?”

남자는 손을 들어 가면 아래로 늘어진 담뱃대를 쥐며 연기를 내뿜었고, 소년은 문득 남자의 손목 위로 그려진 검은 문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문신을 보며 센은 잠시 놀랐는데, 부족의 협력자였던 코티에르가 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탓이기도 했고, 그가 제다이의 어느 한 단면이리라고 생각했던 코티에르가 제다이에 완전히 등을 돌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자는 입을 열었다.

“이스나 라위카3)라고 하지. 내게 있어서는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외로운 남자인 당신은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죠?”

센은 몸을 일으키며 그렇게 물었고, 이스나 라위카는 가면 뒤로 가볍게 미소를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자기 자신에게 선과 악을 부여하고 그대의 의지를 그대의 머리 위에 율법처럼 내걸 수 있는가? 그대는 자기 자신에 대해 그대의 율법의 재판관이 되고 복수자가 될 수 있는가? 인도자는 아무도 인도하지 않음으로서 인도자로서 존재한다는 것, 내가 과학자로서 보낸 날들이 그저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인도자는 그 누구도 노예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지.”

이스나 라위카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담뱃대를 입에 물고는 붕어 흉내를 냈고, 센은 그의 말이 끝났으리라고 생각하고 그의 의식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눈 속으로 푹푹 파묻히는 발목이 시큰하게 시려왔고, 소년은 얼굴을 찡그리며 한걸음씩 은신처 뒷편 언덕을 향했다.

“그리고 네가 노래하는 갈림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센은 걸음을 멈추었다.




두 번째 태양이 떠오르자 센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소년이 은신처 북쪽의 언덕 위로 올라갔을 때에 발견한 것은 늑대 부족장 홀로 우는 늑대도, 탁탁거리며 타고 있는 모닥불도 아니었다. 그곳에는 싸늘하게 노래부르는 북풍이 불고 있을 뿐이었고, 누군가 있기는 커녕 그 누구도 다녀가지 않았던 듯 쌓인 눈 위로는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처음 이곳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직감한 소년은 몸을 돌려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불안해했지만, 은신처를 바라보는 순간 의식이 시작되면 그 자는 부족장의 허락이 있기 전까지, 혹은 더 정확히 말해 깨달음을 가지거나 사흘이 지나기 전까지는 마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마을로 돌아가 부족장에게 어째서 홀로 그를 놓아 두었는지에 대해 따지고자 했지만 그는 그럴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홀로 남은 소년을 맞은 것은 그저 끝없이 차갑기만 한 바람이었다. 겨울은 이미 끝자락을 향해 치닫고 있었지만 살을 에는 바람은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것들 중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부터 끝없는 허탈감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인도자는 단투인에서 그를 넬반으로 인도한 후 그것이 마지막이라도 되는 양 사라져서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늑대 부족민들은 무언가 그의 생각과는 빗나가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유일하게 그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래서 인도자만큼이나 의지했던 홀로 우는 늑대마저도 의식조차 수행하지 않은 채 그를 놓아두고야 말았다. 센은 자신이 이 광활한 황야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이 아플 정도로 펼쳐진 설원에는 발자국 하나 놓여 있지 않았다. 생명의 흔적조차 없는 그 황야에는 그래서 마치 사막처럼 생명의 흔적이라곤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사막이라면 말라 비틀어져가는 뼈들과 겉으로는 다 시든 선인장이라도 남아 있었겠지만, 넬반의 평원은 그저 초점조차 맞추기 힘든 눈밭이 있을 뿐이었다. 가장 흔한 동물조차 새하얀 털을 가졌기에 눈에 띄지 않았고, 가장 시끄러운 새조차도 바람 소리에 묻혀 그저 침묵할 따름이었다.

센은 언덕 위에 그대로 서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서 있기도 힘들 만큼 심한 북풍이었고 그나마도 살을 꽁꽁 얼게 하는 듯한 추위를 담고 있었지만 그래도 센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첫 날은 그렇게 흘러갔다.

둘째 날이 되어 센은 조금씩 홀로 우는 늑대나 상처 입은 가슴, 이스나 라위카와 렌, 혹은 그가 돌아온 첫날부터 달라붙어서는 어딘가 아픈 곳은 없는지 진찰하려고 달려들곤 했던 방황하는 늑대가 한 말들을 하나하나 되새겨보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때 그 소년은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만큼 이성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아직 홀로 버려졌다는, 설사 그것이 사흘이 지나면 사실이 아니게 될지언정 그 사실은 모루를 두드리는 망치처럼 그의 가슴을 내리치고 있었다. 다만 센은 주위를 둘러보며 조금의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저 광활한 평야가 있을 뿐이었지만, 어떤 괴리감이 자꾸만 센의 시야를 간질이다간 문득 사라졌다.

셋째 날이 되어서야 센은 그가 들었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회고할 만큼 안정할 수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허무함에 지쳐 절망의 문턱에 들어섰기에 필사적으로 자신을 되돌리기 위해 내면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무던한 노력의 결과였다.

모든 것이 그대를 위해 앞에 펼쳐져 있다. 그대 앞에 놓인 길은 똑바르다. 때로 그 길이 눈에 안 보일지라도, 그 길은 거기 있다. 그 길이 어디로 인도할지 알지 못할지라도, 그대는 그 길을 따라야만 한다. 그 길은 신에게로 가는 길이다. 존재하는 그 길은 유일한 길 뿐이다.4)

그는 언젠가 로크락이 그에게 보여 준 가상 현실에서 조용하게 말하는 어느 넬바니안 여성을 본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녀가 했던 말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늑대 부족원들이 그에게 말한 것은, 그리고 외로운 남자가 되기 전의 코티에르가 말한 것들은 그것과는 다른 가르침이었다. 홀로 우는 늑대와 상처 입은 가슴은 그 말의 가장 첫 한 문장만을 기억하라고 충고했고, 코티에르는 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렌은 자신의 길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며 센을 나무랐다.

결국 무엇이 정답이었던 걸까.

그제서야 센은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오래 전 이스나 라위카가 나이트 코티에르였을 시절에 버릇처럼 중얼거리곤 하던, 어째서 무가 아니라 존재자이냐는 물음까지도 기억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처 입은 가슴과 외로운 남자가 그에게 물었던 똑같은 질문이 무엇이었는지도 상기해낼 수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쉽게 깨달을 수 있는 질문이었고, 어떻게 생각하면 이해조차도 힘든 질문이었지만, 센은 몇 시간이고 언덕 위에 기둥처럼 서서 생각함으로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스나 라위카와 상처 입은 가슴은 모두 노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비록 전자는 운명의 노예에 대해 이야기했고 후자는 목적의 노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비슷한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내가 도대체 무엇에 얽메여 있다는 걸까, 센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변화도 없이 그저 저 멀리 뻗어 있는 지평선과 그 아래로 새하얗게 얼어붙은 설원 뿐이었다. 길은 없었다. 그가 언덕까지 올라온 발자국의 흔적도 밤새 내린 눈으로 인해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흔적처럼 사라져버렸다.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그 점이 센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소년은 그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자꾸만 고개를 저었지만, 어딜 둘러봐도 그의 발자국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릴 수도 없었다. 길이 없었으니까. 그는 그가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고 있었다.

셋째 날 밤이 깊자 그동안 흐렸던 하늘은 맑개 개었고, 그 너머로는 눈부시게 빛나는 빛의 강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센은 낮 동안 빠져든 생각에서 도무지 빠져나올 줄을 몰랐고, 그래서 셀 수도 없으리라는 끔찍하게 진부한 말이 잘 어울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유는 부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보편적인 선은 존재하는가?

좋음, 나쁨, 선, 그리고 악이라는 네 단어들이 그의 머리를 맴돌며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다만 소년은 몇 시간 동안 판단해본 결과 넬바니안들의 언어에는 선과 악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자신이 좋음이라는 말과 선이라는 말을 혼동해서 사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보편적인 용법이 존재하지 않는 좋음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늑대 부족원들에게 혼란을 야기했다는 것도. 넬바니안들의 말에서 좋음이라는 것은 '누구의 좋음인가' 혹은 '어떤 것에 대한 좋음인가' 와 같은 방식으로만 쓰였기에 막연히 좋다라는 말은 통용되지 않았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생각하기 위해서 센은 또다시 몇 시간을 얼어붙은 언덕에서 보내야만 했다. 넬바니안들의 기준에서 좋음이라는 것은 판단 기준을 가진다. 누군가에 대한 상대적인 관점에서 그것은 좋거나 나쁘고, 어떤 것에 대한 상대적인 관점에서 그것은 좋거나 나쁘다. 그러나 그것이 선하거나 악하게 되는 기준은 그저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코티에르는 인간이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부던히 노력하는 존재라고 말했고, 상처 입은 가슴은 모든 존재는 자유롭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센은 자신이 답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해답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었기에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혹은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눈을 돌렸다.

그제서야 소년은 이미 달은 저 멀리 기울고 있었고, 그에 맞추어 별들도 하나둘씩 스러져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동쪽 하늘은 어느 새 구름 한 점 없이 깊은 바다처럼 보랏빛으로 물들었고, 센은 몸을 돌려 떠오르는 태양을 기다리다간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흐려진 표정을 거두고는 살풋 미소를 지었다. 결국 모두는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자유롭다. 그리고 이제서야 센은 그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 혹은 무엇이 되길 바랐는지도 알 수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인간이 동기와 목적이라는 사슬로 아무리 묶으려 해도 그럴 수 없었던 하늘 바람이 그의 목을 스치며 땀에 젖어 있던 목을 시원하게 훑고 지나갔다.

그곳에 하늘 바람이 있었다.

오히예사5)는 발을 들어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제대로 된 길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런 것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소년은 지평선 저 너머에서 그를 돌아보는 인도자를 마주볼 수 있었다.




1) 센의 말대로, 니체는 그들을 초인이라 불렀고 하이데거와 카뮈는 그들을 존재자라고 불렀지만 사회는…
2)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문예출판사 번역본 중
3) '외로운 남자'라는 뜻의 인디언 이름
4) 레온 셰난도어, 오논다가 족, '왜 나는 네가 아니고 나인가', 류시화 저
5) '승리자' 라는 뜻의 인디언 이름 센의 새 이름은 '하늘 바람'이라는 뜻입니다만 제가 인디언 언어를 모르므로 대체했습니다.

댓글

로키, %2007/%10/%14 %13:%Oct:

잘 쓰셨네요. (얘기하신 것보다 엄청 오래 걸리긴 했지만..(..)) 재굴림 기회 드리겠습니다. 근데 잘 쓰시긴 했고 센의 내적 고민이 드러나고 한 것도 좋긴 한데, 여전히 센이나 코티에르를 어떻게 돌려야 할지는 애매하네요.

 
아카스트, %2007/%10/%14 %13:%Oct:

싹 무시하시고 마지막 다섯 문단만 읽으시면 됩니다 (즉 자유롭게 돌리셔도 됩니다). 그리고 또 변명을 하자면 늦은 것은 네 번째 외전 전편을 같이 올리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