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거래

'어둠의 8인' 평의회의 코린 각하께,

각하의 충실한 종, 저 소트는 타나리가 '상념의 동굴'에서 일리시드 대표자와 접촉을 시도할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각하와 우리 대(大) 바테주 군대에 대한 충심으로 이들의 계획을 알아내고자 달려갔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따뜻하게 맥박치는 동굴 벽과 날카로운 이명음처럼 울리는 일센시네의 끝없는 상념 전파 속에서 기다리던 일리시드가 차원문에서 나온 캄비온과 대화를 나누는 현장을 저는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무두질한 인간 가죽에 기록된 이 보고서는 레이디의 구역에 있던 바테주 신전의 잔해에서 발견되었다. 이 두루마리에 담긴 내용은 라이잔이 왜 일리시드 수끌리어를 계속해서 미행했는지, 그리고 어째서 마라켄의 협력을 청했는지 추측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이다.

“라반투스 각하께서 인사를 전하라고 하셨다, 마인드 플레이어.”

인간 어미에게서 태어난 잡종 주제에 캄비온은 거만하게도 말하였습니다. 제가 타나리처럼 피에 미친 짐승이었다면 당장 공격하고 싶어졌을 것입니다.

“나는 그분의 심복 에레판이다. 각하께서는 너희 마인드 플레이어가 관심을 가질만한 관대한 제안을 하셨다.”

“그의 제안을 말하라, 타나리여. 듣고 판단하겠다.”

울리사리드대답하는 일리시드의 목소리는 마치 진흙 속에서 말하듯 물컹거렸습니다. 보통 일리시드와는 달리 촉수가 무려 여섯이고 유난히 긴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타나리는 득의양양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너희 일리시드를 증오하고 사냥하는 기스양키와 기스제라이를 우리가 이 멀티버스에서 멸절시키겠다.”

순간 억눌린 비명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상념의 동굴 구석구석에 울리는 일센시네의 상념 전파가 잔인한 기쁨으로 더욱 강렬해지는 것을 착각했을 뿐이었습니다. 상념의 동굴 어귀인 이곳에서는 거슬리는 귀울림 정도였던 일센시네의 상념 파장은 마치 끝없는 고함처럼 강해져서는, 우주의 모든 것은 일리시드의 것이며 일리시드는 온 우주의 정당한 지배자라고 외쳐댔습니다! 각하, 일센시네의 타락하고 뒤틀린 정신에 가득한 거짓과 상상하기 어려운 변태성은 마치 예술과 같았습니다!

머리를 가득 채우는 기괴한 상념에 또다른 소리가 끼어들었습니다. 마치 진흙 거품이 연속해서 터지는 것 같은… 그것이 일리시드의 웃음소리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그의 신과 함께 마인드 플레이어도 희열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윽고 일리시드는 웃음을 그치고, 일센시네의 기쁨도 최고조를 넘겨 어느 정도 잠잠해졌습니다. 다시 차분해진 일리시드는 에레판에게 물었습니다.

“너희 타나리가 살육과 고문을 즐긴다 하나, 벌레같은 기스 종족을 아무 대가 없이 없애준다는 것은 아닐 터.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캄비온캄비온은 추악한 얼굴 가득 뒤틀린 웃음을 지었습니다. 저는 그자를 코크라콘의 고문 기계에 묶어놓고 놈의 입이 찢어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습니다.

“그들의 고향 차원인 림보와 아스트랄계를 자유롭게 공격하려면 너희 일리시드의 협력이 필요하다.”

잠깐 동안의 침묵 속에서 일센시네의 광기어린 상념만이 뇌를 태워버릴 듯 울렸습니다. 이윽고 일리시드는 느물느물하게 말했습니다.

“정확히는 차원문이 필요하겠지… 아주 많은, 그리고 안정적인 차원문이.”

캄비온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한 번 끄덕였고, 둘 사이에는 말없는 이해가 오가는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서 너의 주인에게 전하라. 그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지금부터 보름 후 '스틱스 사공'에서 더 자세한 얘기를 나누도록 하자.”

“시길에 있는 주점 말인가.”

캄비온의 웃음에 일리시드는 다시 그 진흙 거품 터지는 웃음소리로 화답했습니다.

“그래… 시길에 있는.”

“좋은 답변에 감사한다. 각하께서도 흡족해하실 것이다.”

상념의 동굴캄비온은 허리를 숙여보이고 돌아섰고, 검은 가루를 뿌리면서 한 동굴 입구로 들어서자 차원문의 소용돌이가 그의 추한 모습을 삼켜버렸습니다. 동굴 안에 쥐라도 살고 있는지 작은 발소리가 반대 방향으로 멀어졌습니다.

저도 조용히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일리시드가 제가 숨은 곳을 똑바로 쳐다보자 깜짝 놀랐습니다!

어째서 라반투스가 갑자기 기스양키와 기스제라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일까? 이 만남이 세 노파의 예언 이후라고 가정한다면 그 해답은 간단하다. 자신이 기스제라이와 기스양키에게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그는 피에 굶주린 타나리가 생각할만한 해결책을 떠올리고는 두 종족의 공적인 일리시드의 동맹을 청한 것이다. 기스제라이와 기스양키가 멸절한다면 그 예언은 영영 실현될 수 없을 것이므로.

“이리 오도록, 바테주.”

어떻게 제 존재를 알아챘는지 모르겠습니다, 각하! 경계하면서 천천히 다가가자 일리시드는 제게 가까이 몸을 숙이며 말했습니다.

“너 역시 너의 주인에게 전하도록 해라. 우리를 돕는다면 시길이 바테주의 것이 될 것이라고.”

“무엇을 돕는다면 말이냐?”

마인드 플레이어는 마치 뭔가를 움켜잡듯 촉수를 꿈틀거렸습니다.

“타나리가 할 일이 따로 있고, 바테주가 할 일이 따로 있게 마련이지. 그 하잘것없는 노예들은 학살만으로는 박멸할 수 없다. 내부에서부터 분열시키지 않으면 바퀴벌레처럼 또 살아남아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그는 속삭이듯 말을 이었습니다.

“지금부터 보름 후… '스틱스 사공'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자. 타나리 사절이 물러간 후에 말이다. 이제 가라.”

나오는 길에도 일센시네의 상념은 마치 저를 쫓아오듯 귓가에 울렸습니다. 멀티버스는 일리시드의 것이며, 마인드 플레이어만이 그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이렇게 해서 저는 타나리와 일리시드의 동맹과 시길에 대한 음모를 알아내고, 타나리가 모르게 일리시드의 동맹 제안까지 받은 것입니다! 이들을 잘 이용하면 시길이, 나아가 승리가 우리의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각하!

이상 각하의 충실한 종, 소트가 충심으로 보고드립니다.

영광스러운 바테주 군대 정보부 제 8과 소속 소트에 대한 처분

중요한 정보를 알린 공적을 치하하여 2계급 특진을 명함.

감시 대상에게 부주의하게 모습을 들킨 과오로 500일 동안 고문형에 처함.

8인 평의회의 정보 담당 코린 각하의 명으로 이와 같이 결재함.

불운한 바테주 소트가 들은 '억눌린 비명소리'와 '작은 발소리'가 과연 그의 생각처럼 무의미한 소음이었을까? 여섯 개의 촉수는 일리시드의 극히 드문 우성 변종인 울리사리드의 특징이며, 라이잔의 아버지는 세레몰포시스를 거쳐 울리사리드 수끌리어가 되었다.1) 울리사리드가 얼마나 드문지 생각하면 이 보고서 속의 울리사리드가 바로 수끌리어였으며, 소트가 들은 것은 수끌리어를 추적중이던 라이잔이 낸 소리였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또한, 이 장면을 라이잔이 엿보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후 그녀의 행적을 상당 부분 설명할 수 있다. 그녀의 종족이 처한 위험을 알게 된 그녀는 우선 동족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 것이다. 그러나 수끌리어로 추정되는 일리시드가 드러낸 의도대로 바테주의 협력을 받아 기스양키와 기스제라이의 내분 작전을 펼쳤다면 그녀의 말은 무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리시드와 바테주가 협력해 기스양키와 기스제라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면 튜나라스 궁정에서는 기스제라이와 협력할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들 종족의 존속에 대한 위험을 무시하는 편이 쉬웠을 것이다. 극도로 불합리한 행동이긴 하지만, 정치나 종족간 증오의 속성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수긍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동족마저 믿어주지 않아서 절박해진 라이잔이 찾아갈 수 있는 존재는 공통으로 위협받고 있는 기스제라이였다. 물론 림보의 혼돈 물질을 뚫고 기스제라이 요새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 치더라도 그녀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알고 또 어느 정도는 믿을 수도 있는 유일한 기스제라이 마라켄이 남는다. 이렇게 보면 시길에서 그녀가 다소 과격하게 마라켄의 도움을 청한 것도 설명이 되지 않는가.

이렇게 돌파 사건은 그 시작부터 라이잔과 마라켄 두 사람과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본인들조차 모르던 연관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주의 모든 것이 그렇듯 자신도 필연적으로 파괴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한 타나리 로드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들—타나리, 바테주, 일리시드, 시길, 라이잔과 마라켄—은 모두 함께 파국의 날, 시길 전투의 귀결을 향해 걷잡을 수 없는 인과의 격류를 타게 된다.

댓글

소년H, %2007/%09/%01 %19:%Sep:

생각 안 나신다더니 빨리도 올리시는군요 (이걸로 현재 1등? (…)) 일러스트와 논평 배치로 글을 꾸미신 건 적과의 동침 이후 열성이신 듯 (따라하기 힘들 수준 (…)) 그러나 저러나 왠지 반박하고 싶은 내용 (왜?)

 
로키, %2007/%09/%02 %21:%Sep:

흑흑 동환님께 1등 자리를 뺏겼..(..) 글 꾸미기는 재미가 붙어서 은근히 집착하면서 하고 있죠.

반박이라니 너무해요(?) 뭐 워낙에 추측이 많이 들어간 글이니 반박할 틈도 사실 많죠. 제 출처에는 이름도 잘 안 나오니까 동일인이 아니다 하고 반박해도 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