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xie Chicks - Not Ready to Make Nice

독자 편지

보낸 이: 레라 네자트

받는 이: 시길 타임즈 편집장

지난주 '시길 타임즈'에 실린 도시 홍보부장 E. 버네이씨의 사설 '시길 시민이라는 의미'에서는 정작 시길 시민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하는 해답은 발견할 수 없다. 버네이씨는 시길의 날을 맞아 '핀드 침략이라는 시련을 함께 극복한 날을 기념하여' 우리가 시길 시민이라는 '역사적 자긍심'을 가지고 단합해 '밝은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것이 '시길 시민으로서의 의무'라고 역설하고 있지만, 그 역사적 자긍심이나 의무의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는 버네이씨가 제기하지 않은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시길 시민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시길에 갑자기 다른 모든 차원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정체성이 있다는 얘기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 논리적으로 시길 시민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한 시간 전에 차원문에서 내린 프라임도 시민일까? 이스가르드에서 3년 계약직으로 온 용병은? 102년 동안 거주하면서 가게를 운영중인 유골로스는? 유동 인구를 제외한다 해도, 도시 인구의 1/3에서 많으면 반을 차지하기도 하는 유동 인구를 빼고 시길을 논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유동 인구를 제외한 시길 '시민'만으로 도시를 운영하기에는 심각한 무리가 따를 것이다. 게다가 도시의 삼분의 일에서 반을 인위적으로 도시의 정체성에서 제외하고 '그들'과 '우리'를 가르는 개념에 어떤 건설적인 가치가 있는가?

어쩌면 E. 버네이씨는 시길 시민에게 역사적으로 독특한, 다른 차원과 구분되는 정체성이 있다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이 논리는 차원문이 닫히면 일주일도 존속할 수 없는 도시에는 성립하지 않는다. 시길에 있는 사람은 고조할머니 시대이든 어제든 모두 시길 외에 다른 곳에서 도착한 사람들이다. 아버리아, 프라임 세계, 게헨나, 오토마톤… 차원의 교차로에 존재하는 시길의 정체성과 문화는 곧 모든 차원의 정체성과 문화의 혼합이다. 그런 시길에 갑자기 다른 모든 차원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정체성이 있다는 얘기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정의할 수도 없고 역사적 근거도 없는 시길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에는 어쩌면 도덕적이고 감정적인 의미라도 있을지 모른다. 시길 시민으로서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제외해야 할지는 물라도) 서로 단합심을 느끼고 아끼자는 의미에서 말이다.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과연 엘뤼시움의 데바와 어비스에서 온 타나리가 현재 같은 시길 땅을 밟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동질감을 느끼겠는가? 아니면 신을 섬기는 대리자나 핀드는 시길 시민의 범주에서 제외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또 누구를 제외해야 할까? 그리고 그 결정은 누가 하는가? 하모니움? 도시 홍보부? 레이디 오브 페인?

아니면 시길 시민의 정체성은 도덕적이고 감정적이니 자신이 시길 시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시길 시민인 것일까. 그렇다면 그 선언은 얼마나 진실해야 하는가? 자신이 시길 시민이라고 하는 유골로스를 두팔 벌려 시길 시민으로 환영할 수 없다면 이번에는 또 어디서 선을 긋고,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시길 시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목적이나 과거가 어떻든 시길 시민으로서 단합해 함께 밝은 미래로 나아가야 할 존재인 것인가? 단합은 무조건적 신뢰가 아니라고 한다면 다시 처음의 의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시길 시민이란 대체 무엇이며, 우리가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이 단합이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혹시 시길 시민의 정체성은 경제적 정체성인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의 위대한 의무적 단합은 혹시 시길산 상품 애용이라든지 다른 차원 상인을 시길 시장에서 밀어내는 것인가? 그런 조치의 결과는 교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시길 경제 붕괴와 대규모 아사 사태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마도 그런 의미는 아닐 것이다. 설마 시길 시민이라고 자살의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닐 테니.

그렇다면 시길 시민의 정체성은 정치적인 정체성일지도 모른다. 그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나에게 시길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불신과 개인주의에 대한 자긍심이며, 그것이 나에게는 시길 시민이라는 의미이다.

첫째, 시길 시민은 시길의 주인이라는 정치 의식. 이 해석은 시길 시민에게 자살의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렵다. 시길의 주인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단 한 명, 레이디 오브 페인이다. 시길에 숨쉬고 사는 생물이 있다는 사실은 오직 레이디의 뜻에 의지한다. 그 지위를 조금이라도 흔들려는 사람에게 기다리는 것은 미로, 아니면 끔찍한 죽음이다.

그렇다면 둘째, 자신보다 시길의 이해관계를 먼저 생각하고 판단을 내리는 의미의 정치적 시민 의식인 것일까. 듣기 좋은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시길의 이해관계가 무엇인지는 누가 결정하는가? 이것은 시길 시민의 정의를 누가 내리는가 하는 문제만큼이나 애매하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시길 시민 의식이라는 개념의 진정한 위험을 알 수 있다. 시길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정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시길에 대한 결정권을 잡은 세력이다. 논리적, 역사적, 도덕적, 감정적으로도 성립하기 어렵고 정치적 의미만 남는 시길 시민 의식이란 결국 그 권력자들이 정한 시길의 이익대로 시길인을 움직이기에 편리한 정치적 수단이다. 그리고 시길의 당파와 대규모 상인들이 정한 소위 '시길의' 이익이 그들의 이익과 일치한다 하더라도 놀랄 일은 아닌 것이다.

결국 E. 버네이씨가 말하는 '시길 시민이라는 의미'에서 감정과 미사여구를 걷어내면 무엇이 남는가? 단일한 정체성이라는 집단 감정에 휩쓸려서 다루기 쉬운 고분고분한 시길 시민, 권력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구심점이 될 시민 의식. 시길 '시민'이든 아니든, 시길에 발붙인 평범한 사람으로서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시길의 미래인가?

그래도 희망이 되는 것이라면 시길의 인구는 이미 말했듯 구성이 너무나 다양해서 하나의 집단으로 묶기 어려우며, 워낙에 세속적이고 교활해서 쉽게 속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이 이끈다고 무비판적으로 달려가는 양떼가 되기에는 너무 이기적이고, 냉소적이고, 의심이 많은 시길 사람들. 나에게 시길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불신과 개인주의에 대한 자긍심이며, 그것이 나에게는 시길 시민이라는 의미이다.

—레라 네자트

댓글

소년H, %2007/%09/%18 %18:%Sep:

알 모르트 반박 기사군효(?)

 
로키, %2007/%09/%20 %03:%Sep:

받아라 알 모르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