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염

“빨리 다 끌어내! 이거 언제 무너질지 몰라!”

“서둘러, 엘리아스! 그 녀석이 마지막이야!”

주변에 불길이 오르는 와중에도 어깨에 끼쳐오는 말의 숨결은 뜨거웠다. 강한 근육이 물결치는 목은 그가 댄 손 밑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불길이 타오르는 마굿간에서 나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새로운 싸움이었다.

“착하지, 예쁜 녀석… 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셔츠를 눈 위에 동여매서 눈을 가린 '발로르 까스떼야노'1)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이며 엘리아스는 고삐를 끌었다. 물에 적신 웃옷을 입과 코에 두르고 있었지만, 매캐한 연기에 기침이 나오고 눈은 매워서 연신 눈물이 고였다. 연기와 불길 사이로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바로 옆에 있는 짚단에 불이 확 옮겨붙었고, 말은 비명을 지르듯 히힝거리며 몸부림을 쳤다. 그런 발로르의 고삐를 붙잡고 늘어지며 입과 코를 가린 천이 미끄러져서 엘리아스는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

다시 입을 가리고 간신히 기침을 진정시킨 그는 발로르의 목을 끌어안으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자, 다 나왔으니까 빨리…”

“어서, 엘리아스!”

먼저 나갔던 페드로와 미겔이 달려들어와 발로르의 고삐를 부여잡았고, 벌벌 떨며 땅에 발굽을 버티며 견디는 말을 완력으로 끌기 시작했다.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하는지 불타는 목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연기 때문에 출입구는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발로르, 괜찮아!”

불길의 포효 위로 엘리아스는 목소리를 높여야 했지만, 그러면서도 억지로 차분하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

“바로 몇 발짝이야. 캄포 데 아빌라를 한 달음에 가로지른 '까스띠예의 용기'가 이러면 쓰나. 날 봐서 가줘, 응?”

발로르는 잠시 바들바들 떨며 서서 버티다가 갑자기 한 발짝, 또 한 발짝 옮기기 시작했다. 발로르가 또 겁먹을까 우려한 엘리아스는 페드로와 미겔에게 손을 떼라고 손짓한 후 한 걸음마다 격려하며 조심조심 이끌었다.

갑자기 가슴이 확 트이고 숨이 쉬어지면서 그는 연기와 불꽃을 뚫고 나온 것을 깨달았다. 들이마신 연기를 폐가 모두 뱉어내려는 듯 발작적으로 기침이 나오자 그는 몸을 굽혔다. 페드로가 발로르를 이끌어 말들을 임시로 몰아넣은 울타리로 데려가는 모습이 곁눈으로 보였다.

“괜찮나, 엘리아스?”

침과 함께 입안에 찝찝한 재와 연기맛을 뱉어낸 엘리아스는 몸을 세우며 사촌을 마주보았다.

“괜찮아. 발로르는 어때?”

“멀쩡해. 거참… 까스띠예의 용기라는 녀석이 저꼴이니 우리가 몽테뉴에 당하는 거 아냐?”

미겔이 건네는 물통을 받아 목마르게 마신 후 엘리아스는 입가를 닦았다.

“말이 놀라는 거야 당연하지. 몽테뉴놈들은?”

“대부분 꽁무니 뺐다. 아직 돌아다니며 약탈하는 놈들이 있으니까 조심하고.”

“비전투원들은? 아마릴리스가 나 걱정할 텐데…”

미겔이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보는 시선에 엘리아스는 뭔가 어긋나는 것을 느꼈다.

“무슨 소리야? 아마릴리스가 왔었어? 여자들은 동쪽 별관에 피해 있지만 못 본 것 같은데.”

그 말에 귓가에 심장박동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랬었다. 아마릴리스가 도착한 것은 어젯밤 늦게였으니, 그녀가 온 것을 모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었다면 같이 대피했을 텐데…

미겔이 뭔가 말하고 있었지만 엘리아스는 더 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불을 끄는 사람들을 지나, 고삐 풀린 채 뛰어다니는 말을 발견하자 고삐를 잡아 올라타고 그는 동쪽 별관으로 질주했다. 불길이 가로지른 밤의 어둠이 그의 시야 양옆으로 빠르게 흘렀다.

그녀가 그곳에 없었다. 없었다. 동쪽 별관에서 아무도 그녀를 본 사람이 없었고, 아무도 그녀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세상이 빙글 도는 것을 느끼며 그는 미친 듯 이사람 저사람 붙잡고 물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만약 몽테뉴군과 잘못 마주치기라도 했다면… 엘리아스는 서서히 불길한 생각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꼈다. 같이 대피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몽테뉴군과 싸우고 마굿간에서 말들을 꺼내온 것은 자신이었다. 아마릴리스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예쁜 누나요? 나 봤는데.”

그때 높다란 아이 목소리가 그의 검은 상념에 끼어들었다.

“연못 있는 숲에서 노는데 지나가는 거 봤어요.”

그가 묻고 다니는 것을 들었는지, 코르넬리아의 아들이—올해 몇 살이더라?—그를 빤히 보며 똘망똘망하게 말했다.

그 순간 엘리아스의 머리에는 다른 기억이 스쳤다. 아침에 아마릴리스는 낡은 창고에 흔치 않은 초승달 제국 고서가 쌓인 것을 발견했다며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가 초장에 일하러 나간 동안 책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면, 그녀의 버릇대로 책에 열중해 종일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를 본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도 설명할 수 있었고…

연못이 있는 자작나무 숲, 그 옆에는 그와 크리스의 아지트나 다름없던 창고. 어렸을 때 그는 구석에 버려져 있던 커다란 책들을 호기심에 잠시 들춰보았다가, 읽을 수도 없는 말이어서 먼지 때문에 재채기만 하다가 밀어놓았었다.

어떻게 말에 올라타 달리기 시작했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란쵸의 북단, 숲이 다시 밀려들기 시작한 외딴 구석에 있는 창고가 그의 목표였다.



탐욕스러운 혀처럼 불길이 밤하늘을 핥고 있었다. 고삐를 당기고 말에서 천천히 내리면서 엘리아스는 자신이 화염에 눈길을 빼앗긴 것을 깨달았다. 어려서부터 불에 이끌렸던 그는 모닥불을 들여다보면서 몇 시간이고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날 마치 불이 그를 끌어당긴 것처럼 손가락을 불꽃 한가운데 집어넣었을 때 느낀 것은 기분좋은 온기뿐, 불은 그를 해치지 않았었다.

“아마릴리스…”

숲 가장자리의 연못에 손수건을 적셔서 창고로 달려가는 그의 기억 한켠에는 처음으로 내면의 불길을 발견한 날이 스쳐갔다. 잠에서 깬 아버지에게 불에 손가락을 넣은 모습을 들켰을 때만큼 맞은 일은 평생 없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마치 화염을 반사하듯 눈이 붉게 타오르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두려움에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만 그런 짓을 하면 죽여버리겠다며 주먹을 휘두르는 아버지에게서 엘리아스 역시 같은 두려움을 배웠다.

화염과 연기가 쏟아져나오는 문앞에서 그는 급히 한 번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람은 없었다. 불을 끄러 여기까지 온다고 해도 자작나무 숲으로 통하는 옆문으로 나오면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시가 급했고, 란쵸의 다른 건물들이 타는 동안 사람을 제때 불러모을 수는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내면에 잠든 불길을 지폈다. 그의 저주, 그리고 이 순간은 그의 축복. 이 고비만 넘길 수 있다면 레기온의 불길에도 기꺼이 떨어지리라. 눈꺼풀 뒤의 불씨가 커지면서 그의 혼을 삼키는 순간 엘리아스는 눈을 뜨며 불길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연기의 매캐함도, 열기의 고통도 없었다. 시야마저 더 뚜렷해진 기분이었다. 잡동사니와 낡은 목재를 태우는 화염이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그의 안에 흔들림 없이 타오르는 불길에는 미치지 못했다. 타오르는 불꽃의 아름다움에, 그 포근한 따스함에 자신의 오래 잠들었던 일부분이 깨어나 노래하는 것을 느끼며 그는 재빨리 아마릴리스를 찾아 창고를 뒤졌다. 크리스가 어렸을 때 깎았던 목각 말이 불똥을 튀기며 발에 채였고, 둘이서 가져다 놓았던 낡은 망토니 학교 책이니 하는 잡동사니가 가는 길 양옆에서 불에 집어삼키우고 있었다.

유난히 불길의 기세가 심한 한쪽 벽면에서 타오르는 것은 분명 낡은 책들이었다. 아마릴리스는 저쪽에 거의 종일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어두워지면서 숲에서 몽테뉴군이 나왔고, 아마릴리스가 나가지 못하고 있는 동안 몽테뉴 군인들이 퇴각하면서 분풀이처럼 던진 횃불에서부터 불이 났을 것이다… 그는 창고 여기저기에 시선을 던졌다.

그때 책이 쌓인 벽과 출입구 사이 바닥에 흩어진 잡동사니 하나가 미약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희미하게 콜록거리며 일어나려고 애쓰는 아마릴리스의 모습이 되었다.

그가 곁으로 달려갔을 때 아마릴리스는 이미 다시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할 틈도 없이 옆에 있는 장식장이 불꽃을 올려보내며 무너져내렸고, 그는 황급히 아마릴리스의 입과 코를 젖은 손수건으로 가리면서 몸으로 그녀를 감쌌다. 등에 강한 충격뿐, 옷조차 타지 않은 것을 확인하며 그는 이미 분해되고 있는 장식장을 밀어내고 아마릴리스를 안아올렸다.

“괜찮아, 내 사랑… 금방 나갈 수 있어.”

듣지 못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다정하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이 화염 한가운데서, 그리고 그의 안에 있는 아름답고 두려운 불길 속에서 그의 영혼을 붙들어주고 있는 것은 팔안에 받쳐든 그녀의 친숙하고 편안한 체온뿐.

벽의 일부가 무너지고 불붙은 판자가 떨어져내리자 그는 황급하게 아마릴리스를 감싸안았다. 그의 머리를 때렸다가 머리칼 한 올 그슬리지 않고 떨어져내리는 불덩이를 보고 그는 새삼 두려움을 느꼈다. 이곳에서 무사히 벗어나기만 하면 다시는 이 힘을 쓰지 않으리라. 이것은 자연의 힘도, 디오스(신)의 섭리도 아니었다. 이렇게 내면의 불을 자유롭게 풀어주면 불길에 화답하는 영혼의 희열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 불길이 날 너에게서 데려가게 둘 수는 없지, 미 아모르.'

창고 옆문 앞에 도달한 그는 불똥이 아마릴리스에게 튀지 않게 감싼 후 문을 몇 번 걷어찼다. 낡은데다 불에 약해진 문은 쉽게 부서져내렸다. 몰려드는 밤의 평온한 어둠과 별빛, 깨끗하고 차가운 밤공기에 안도하며 엘리아스는 아마릴리스를 안고 한 발짝 문밖으로 나섰다. 그를 기다리는 운명의 교차점을 향해.

1) Valor Castellano: 까스띠예의 용기

댓글

오승한, %2008/%10/%02 %08:%Oct:

모든 것의 시작.

엘리아스의 다급함이 정말 생생하게 느껴지네. 마법에 대한 묘사도 멋져 :)

(이 불을 지른 건 희열을 느끼기 위한 엘리아스 자신였다는 반전!(…) 같은 것을 쓰고 싶은 마음이… )

 
로키, %2008/%10/%04 %17:%Oct:

땡스..ㅋㅋ 하지만 그런 반전을 쓰려면 전후관계를 꽤나 잘 설명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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