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

알타미라의 서쪽 구역은 늦은 시간에는 조용했다. 복잡하게 얽힌 좁은 골목 위로는 어둠과 함께 침묵이 짙게 맴돌았다. 어디선가 개 한 마리 짖는 소리가 그 침묵을 깰 때쯤, 키 크고 마른 형체 하나가 어둠 속을 걸어 골목 몇 군데를 접어들더니 작은 집앞에 섰다. 그는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길게 내쉬고 문을 두드렸다.


집 안 작은 나무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문 두드리는 소리에 흠칫 몸을 돌렸다. 문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손을 들어 가리켰다. 탁자 위에 타는 등불이 뺨에 아로새긴 칼날 흉터를 비추었다.

“로살린이 가보게.”

그 말에 작고 마른 여자가 일어나서 눈높이에 난—그녀 자신은 발돋움을 해야 했지만—네모난 구멍을 열어젖혔다. 허리에 찬 칼이 문에 가볍게 부딪히며 달그락거렸다. 밖에 있는 사람과 낮게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로살린은 돌아보며 방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끄덕여 보였다. 얼굴에 흉터가 난 사내가 마주 끄덕이자 그녀는 내다보는 구멍을 닫고 문의 빗장과 자물쇠를 열었다. 밖에서 밀었는지 문이 끼익.. 열렸다.

망토를 입은 사내가 들어서면서 약간 쌀쌀한 바깥 공기도 함께 몰려들었다. 로살린은 새로 온 사람 등뒤로 문을 단호하게 닫았다. 등잔빛이 문에 들어선 사내의 그림자를 벽에 길게 드리웠고, 그의 깊이 패인 검은 눈과 뚜렷한 광대뼈, 높은 코와 고집스러운 입매가 흔들리는 등잔빛 속에 빛과 깊은 그늘의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탁자에 둘러앉은 세 사내와 로살린에게 가볍게 인사하고는 뺨에 흉터가 있는 사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빅토르.”

“앉게, 엘리아스.”

엘리아스는 긴 걸음으로 방을 가로질러 탁자의 빈 자리에 앉았다. 문 옆에 기대선 로살린은 짐짓 한가로워보였지만, 손은 시종일관 칼자루 가까이에 있었다. 빅토르의 양옆에 앉은 사내들도 마찬가지로 경계하고 있었다.

“왔군.”

빅토르는 마치 그 사실 자체가 흥미로운 듯 한쪽 눈썹을 쳐들었다.

“왔습니다.”

엘리아스는 조용한 도전을 담아 마주보았다. 심한 사투리에서도1), 말몰이 옷에서도 가예고스 목장에서 보낸 삶이 그대로 묻어났지만, 태도에는 초연한 당당함이 있었다.

“자네도 소식은 들었나.”

빅토르는 목소리가 가라앉았고, 엘리아스는 깊은 눈빛이 흔들리더니 시선을 낮추었다.

“예. 그 자가…”

“그 자?”

“엘.. 말바도 말입니다.”

엘리아스는 빅토르를 마주보았다.

“들은 이야기로는 그가 틀림없었습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했나.”

빅토르는 엘리아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끄덕였다.

“란초 누녜스에 있다고 보고받았는데, 아세도에 있더군. 그래서 아세도에 정착한 몽테뉴 병사와-”

엘리아스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리는 동안 빅토르는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그 까스띠예인 처와 아이들을 산 채로 태워죽일 수 있었어.”

긴 침묵 속에 등잔 심지가 치직거리는 소리도 크게 울렸다. 엘리아스는 차마 빅토르를 쳐다보지 못하고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도시를 떠났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왔군.”

빅토르는 엘리아스를 조용히 마주보았다. 엘리아스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며 낮게 말했다.

“일을 냈으면 책임을 져야지요. 그래서 왔습니다.”

“왜 그랬는가?”

빅토르의 시선은 날카로웠지만, 말투는 정말로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그 자가… 필요했습니다.”

마치 목이 막힌 듯 엘리아스는 간신히 말했다.

“그래서 거래를 했습니다.”

“레기온과의 거래가 따로 없군.”

작게 코웃음을 치면서도 빅토르의 얼굴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그래서 그를 위해 그의 위치에 대해 거짓말을 해온 것인가.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예.”

엘리아스의 표정은 참담했다. 마치 오래 담아온 말이 터져나온 것처럼 그는 언성을 높였다.

“내 복수가 우선이었기에 당신들을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해할 수도 있었고요. 그냥 몽테뉴놈들인데 무슨 대수-”

빅토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아스의 얼굴을 후려쳤다. 의자째 나동그라진 엘리아스가 일어나려고 애쓰는 동안 빅토르는 무거운 걸음으로 엘리아스 앞에 와서 섰다.

“로스 바고스는, 아니 최소한의 명예가 있는 자라면 결코 하지 않는 일들이 있다. 무분별한 살인도 그 중 하나다.”

엘리아스는 피가 흐르는 입가를 닦으며 일어나 앉아 말없이 빅토르를 올려다보았다. 빅토르는 말을 이었다.

“엘 말바도의 광기가 무고한 이에게까지 미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런 그를 방조하고 도운 자네 역시 그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엘리아스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럼에도…”

침묵을 깨며 빅토르는 낮게 말했다.

“자네는 이곳으로 돌아왔군. 어째서인가?”

“그 자가 란초 리베라로 향하고 있을 겁니다.”

고개를 들어 빅토르와 다른 로스 바고스를 마주보는 엘리아스의 눈빛에는 등잔불이 비쳐 일렁였다.

“이번에야말로 붙잡을 수 있습니다.”

“란초 리베라… 참고하지.”

빅토르는 짧게 끄덕이고는 지켜보는 두 사내에게 고갯짓을 했다.

“지하실에 붙잡아 두게. 모든 불길과 접근을 차단하도록.”

빅토르가 문간으로 걸어가는 동안 두 사내가 엘리아스를 잡아 일으키자 그는 몸을 틀며 빅토르를 불렀다.

“같이 가겠습니다! 그 자가 그 힘을 쓴다면…'

“나더러 자네를 믿으라는 말인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빅토르의 대답은 차분하고 단호했다.

“돌아오면 다시 이야기하지.”

빅토르가 로살린을 지나쳐 거리로 나서는 동안 엘리아스는 아무 대꾸를 하지 못했다. 두 사내가 방 뒤편의 문을 열자 그 뒤에 드러난 지하실 층계로 저항 없이 끌려가며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창밖의 거리에는 어둠 속의 그림자가 빠르고 조용한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1) 실제 대답은 '왔십니더.'쯤 되려나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