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부터의 서신

한밤에 눈을 떴다.

창 밖을 보니 올빼미 한 마리가 창 밖에서 서성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 안으로 들어왔다.

의자 위에 앉은 올빼미의 눈이 검푸른 빛을 발한다. 누군가가 이 새를 통해 나에게 이야기를 걸려 하고 있다.

- 돌아오라, 너는 용서받았다. -

감미롭고, 부드러운 목소리. 눈 앞에 차원의 소용돌이가 일렁거린다.

포탈(Portal) 저편에서는 그리운 고향의 흙과 재의 내음이 풍긴다.

- 돌아오라 -

아아. 이건 고향으로부터의 서신이다.


1.

태어날 때부터 네크로맨서의 운명을 지고 태어났다. 삶과 죽음, 그 모든 것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로서.

내가 맨 처음 익힌 단어는 시체를 일으키는 주문의 첫 음절이었으며, 글자를 익히기도 전에 시체를 해부하는 법부터 배웠다.

처음으로 생명을 빼앗은 때는 열 살. 네크로맨서를 모욕했다는 죄로 끌려온 어느 남자였다. 마비의 연기로 잠들게 하고 해부를 했다. 그렇게 나는 평범한 네크로맨서로서 자랐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단 한가지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처음으로 숲에 간 때였다. 참된 죽음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고민하던 내가 우연히 '숲'이라는 장소를 발견했을 때 그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천지에 충만한 생명력. 죽음의 길을 걷는 이들이라면 질색할 기운. 하지만 그 나는 그 이면을 볼 수 있었다.

울창한 숲 속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수많은 존재들의 죽음과 소멸.

길가에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하나부터 거대한 고목 밑에서 시들어가는 꽃과 들풀들. 서로 죽고 죽이는 조그마한 벌레들까지.

그 거대한 생명의 덩어리 속에서는 동시에 수많은 죽음이 잉태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 느낌을 잊지 못한다.

2.

누구와고도 연을 맺지 않고, 누구와고도 적을 지지 않았던 내가 추방된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가문 간 정쟁의 희생양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높은 장로 중 하나를 모욕했을지도 모른다.

시류를 잘 못 타, 더 이상 필요 없는 놈으로 찍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쫓겨났다.

3.

정처없이 헤메였다. 아주 오랫동안.

처음으로 굶주림을 체험하고, 처음으로 고통이라는 것을 느끼고,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라는 것을 맛본 것도 그 때이다. 죽음의 군주라고 불리우는 네크로맨서도 생명의 위기 앞에서는 한없이 벌벌 떠는 숨쉬는 피조물에 불과했다.

내 믿음 역시 산산히 깨지고 부서졌다. 멀티버스의 수많은 이적들 앞에서, '참된 죽음'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빛이 바래고 그 의미가 퇴색되는 장면을 수없이 보았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나는 속았다고. 참된 죽음이나 영원한 휴식 따위는 없으며, 존재의 의미 같은것을 생각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렇게 상처입고 지친 채로 시길로 통하는 차원문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4.

그리고 나는 발견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찬란한 생명력을 뿜어내며, 동시에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아름다운 대도시의 '숲'을.

내 안에서 완전히 사라진 줄만 알았던, '존재의 죽음'에 대한 작디 작은 탐구심을.

이제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다 - 더스트맨이나 둠가드들처럼 죽음만을 바라보는 이들은 결코 죽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어떤 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그 원류를 알아야 하는 법.

죽음은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생명이 무엇인가를 완전히 이해할 때, 비로소 죽음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

나는 여기에서 살아가며 지켜보겠다. 수많은 이들의 삶을. 그리고 그들의 생명이 죽음으로 향해가는 모습을.

그리고 내가 이 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역설적이지만 죽음을 다루는 일이다. 지금 와서 정원사나 변호사가 될 수는 없지 않는가.

나는 알 모르트. 더 이상 삶과 죽음의 지배자가 아닌, 평범한 소시민이자 관찰자.

이 곳, 시길을 제 2의 고향으로 삼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올빼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창문 밖으로 푸드득 날아가버렸다.

새도 포털도 사라지고 방 안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나는 창문을 닫고, 다시 편안한 잠을 취했다.

댓글

로키, %2007/%09/%20 %03:%Sep:

생을 긍정하는 네크로맨서의 탄생 과정이군요. 정부 선전원 네크로맨서와는 왠지 이미지가 겹치지 않는 면이? 뭔가 상당히(..) 살벌한 차원에서 살다 온 알 모르트인 것 같습.. 어린애가 생체해부를 하고 영문도 모르게 죽으라고 쫓아내고.. 뭘 잘못했는지조차 모르는데 용서했다는 말에 감흥이 없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할지도요. 알 모르트가 고향에 대해 특별한 그리움을 표시한 것도 아니라서 마지막에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거절한 부분은 극적 의미가 좀 덜한 점도 있네요. 대신 잔잔한 분위기는 더 살고.. 어쨌든 특이한 인물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재밌는 글입니다.

 
오승한, %2007/%09/%20 %12:%Sep:

로키님의 말씀을 듣고 약간 손 봤습니다.

알 모르트가 왜 시길 정부를 옹호하는 지는 나중에 '독자 편지'에 대한 반박글 형식으로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