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서" 를 받아든 때

보기 드불게, 침대에 몸을 던졌다가 간신히 몸을 추스렸던 날이다. 오늘은 유래 없이 피곤하다. 모처럼의 휴일이, 하루종일 일을 한 날보다 더 피곤할 수가 있을까.

모든 사건의 발단은 어머님의 그 한마디셨다.

“아이덴. 오늘 저녁에”

“안 가요. 저녁에 할 일이 있거든요.”

지난번의 교훈을 잊지 않았던 때문에, 나는 딱 잘라서 거절했다. 들어볼 필요도 없이 어디 파티에 가자는 말씀이실 것이다. 공연히 미적거리다가 저번처럼 잡혀서 관심도 없는 남성들의 얼굴이나 들여다보는 처지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전번의 초상화가 나았다. 금방 끝났으니까. 어머님의 풀죽은 표정이 마음아팠지만,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어머님께서는 매일 집에 계시며 여기저기 파티에 다니시는 우아한 몸이시지만, 나는 주 5일을 성스러운 근로에 바쳐야 하는 몸이다. 나의 주말은 어머님의 주말보다 값지고 귀한 것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돌이켜보면, 당시의 나는 어머님을 너무 얕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무슨 일인데?”

나는 머리를 재빠르게 굴렸다. 평소의 대인관계를 놓고 보면, 외출한다고 하는 핑계가 통할 리가 없다. 업무가 밀려 있다는 핑계도 통할 리가 없다. 일거리가 있다면 지금 하라고 하시겠지. 순간 절묘한 핑계가 떠올랐다.

“결제해야할 서류가 있는데, 이따 저녁에 사람을 시켜서 받기로 했어요. 지금은 작업중이라고 하는군요.”

“어머. 잘 되었구나.”

어머님의 표정이 순간 환하게 피어나는 것을 보고 나는 아차 싶었다.

“그러면 오늘 오후에 티파티를 하기로 하자꾸나. 실은 뮤젤 백작 부인이 오랜만에 너를 보고 싶다고 하셔서 말이지. 저녁이라도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지만 네가 정 바쁘다면 다른 시간도 좋다고 하시더구나.”

그런 이유로 뮤젤 백작 부인을 비롯한, 수많은 귀부인들 틈에 끌려나가서 종일 수다를 떤 것이다. “아이덴 양은 처녀자리로군요. 역시.” “예전부터 딱 부러지는 점이 있었지요.” 와 같은 이야기들에 우아하게 맞장구치며. 마음속으로 최근 정독 중인 펜너 교수의 “듀아라르크” 를 수십번이나 되뇌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지루하고 따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적어도 여기서 실례를 했다가는 당장에 아버님의 설교를 날이 새도록 들어야 할 것이기에, 나는 필사적이었다.

그 결과로, 몸이 축 늘어져 버렸다. 이대로 눈을 감아 버리고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도 몇 차례 했지만 그랬다가는 “저녁에 일이 있다지 않았니.” 라는 어머님의 추궁이 두렵다. 그래도 티 파티가 식사 초대보다는 시간을 덜 뺏기는 법이니, 앞으로도 이런 핑계는 계속 대야 한다. 조용히 방에 불을 켜고 새로 구한 기사들을 읽었다. 기실 오늘 도착한 기사들은 운이 나쁜 셈이다. 거짓말로도 기분이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어떤 기사든 곱게 보일 리가 없겠지. 그중 하나의 기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 금서?”

그렇게 책장의 마지막을 덮고, 커다란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고이 숨겨오던 자료들을 지금에 와서 풀어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실의 공개” 라고 하지만, 역시나 그들에게 유리한 자료가 아니면 풀어놓지 않겠지.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요정과 마법사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그들의 사악함을 강조해서 교회의 승리를 주장하려고 하는 속셈일 것이다. 마그누스가 음모를 꾸몄다고 하는데, 역사의 어느 이야기인들 이런 뒷이야기가 전해지지 않는 것이 있으랴. 그런데 교회 쪽 학자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 같다. 뒤에서 꾸미는 음모가 역사를 움직인 적은 한 번도 없다. 배 위에서 손으로 물을 뒤로 휘젓는 것이 배의 진로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배를 움직이는 동력은 노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제이피리스 민중봉기가, 하나의 음모가의 소행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의 사악하고 잔혹한 요정과 마법사를 그리는 것은 간단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제이피리스 혁명의 뜻은 땅에 떨어져 내린 꼴이다. 최근 그쪽 학자들의 주장에는 슬슬 넌덜머리가 나던 참이었는데, 이번 글은 도저히 보고 넘길 수가 없었다. 당장에 종이를 꺼내, 크리소스토무스 수사께 보낼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수사님께. 아이데나이 에스카를라테 그웨나라르크가… ]

무심코 그렇게 쓰고 나서, 종이를 구겼다. 바보같이. 실명을 써서 어찌할 셈인가. 그렇잖아도 주위에 “복스 포풀리라는 불순한 자” 를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는 사람이 늘어난 판이다. 다들 가문이 좋고, 재력과 권력을 갖춘 자들이니만큼 맹수한테 쫓기고 숨어 있는 셈인데, 그 은신처의 안방에는 맹수 중에서도 제일 커다란, 숫사자쯤 되는 분이 계시니 난감한 일이다. 역사학에 대한 견해를 토론하기 시작하면, 설령 복스 포풀리임을 밝히지 않더라도 눈치 빠른 사람들이라면 손쉽게 알아차릴 텐데.

그렇다고 해서 종교인에게 필명으로 편지를 보내는 것은 실례되는 일이고, 무엇보다 사적인 편지로 남을 비판하면서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점은 스스로 참아넘길 수가 없었다. 사교 댄스를 못 추는 것은 귀족의 수치가 아니지만, 긍지를 잃어버린다면 그야말로 귀족의 수치다. 별달리 귀족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스스로의 자존심을 굳이 시궁창에 던져버릴 필요는 없겠지. 별 수 없이 편지는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다. 명색이 글을 기고하는 학자인 이상, 학회지에 글을 올리는 것은 공적이고 정정 당당한 일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조만간 안심하고 글을 쓸 만한 공간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식사 초대와, 티 파티와, 무도회와, 혼기가 찬 남성들의 초상화로부터 이 집은 전혀 안전하지 않으니까.

댓글

로키, %2007/%10/%29 %09:%Oct:

푸핫.. 남성분이 썼는데도 일하는 여성의 애환이 잘 드러나서 재밌네요. 어머니와의 세대차이도 그렇고.. 펜너 교수의 '듀아라르크'가 요즘 아이덴양의 애독 목록에 있다니 감격일 따름! 잘못 걸린 크림소스 수사님께 명복을..(..) 당당하고 야무진 아이덴의 성격을 보여주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정석한, %2007/%10/%29 %18:%Oct:

남자가 쓰다 보니까, 주위에서 접하는 사례라던가, 여러 매체에 등장하는 일하는 여성의 모습을 참고해서 "정형화" 된 모습이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아마 실제로는 보기 힘든 모습이겠죠. ^^;

 
오승한, %2007/%10/%29 %10:%Oct:

크리소스토무스 수사는 졸지에 여러 군데에서 악역으로 찍히게 되었군요(…)

 
정석한, %2007/%10/%29 %18:%Oct:

크림소스는 다이어트에도 적입니다. (…)

특별히 그 "금서" 가 그렇게 복스양이 분노할 만한 기사라고는 생각 안하지만 (저거 가지고 "민중봉기의 뜻을 짓밟을 셈이냐!" 라고 펄펄 뛸 것 같으면 올라온 기사의 반 - 복스 자신의 기사를 포함해서 - 은 까야 하겠죠) 복스양의 기분이 매우 나쁘다 보니 평소보다 민감하게 펄펄 뛴 게 아닌가 싶습니다.

뭐, 복스가 아니더라도 금서 - 왕의 그림자에 반박 거실 분은 많이 계신듯 합니다. (…)

 
_엔, %2007/%10/%30 %17:%Oct:

복스 포풀리는 추적의 대상이었던 건가요? 나중에 그거랑 관련되서 위기에 몰리는 사건 같은게 나온다던가 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본의 아니셨겠지만 마그누스를 옹호해주시다니.. (와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