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기둥

한 나라를 유지하려면 경제, 군사, 외교, 내정 등 많은 분야의 과업이 필요하다. 어느 하나든 능력 있는 인재가 많이 필요할진대, 신이 아닌 사람이 그 모든 것을 혼자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왕이란 그 모든 일을 실제로 해내는 사람들을 총괄하는 자리일 뿐이다. 결국 뛰어난 지도자 밑에서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유능한 관리자들의 존재야말로 부국강병의 근원이다.

건국 당시에 돈울프, 진 뤠이신 등 걸출한 인재들이 건국왕 칼라인 대왕을 보좌했다는 것이 최근 훌륭한 글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 이에 더해 최근 필자는 몇몇 서신과 기록을 통해 그런 그들의 가히 눈부신 협력을 엿볼 수 있었다. 다음은 한 익명의 첩자가 통일 전쟁 종전 이후 보낸 첩보 서신으로, 왕궁 지하에 보관되어 있던 문서들을 개방하고 정리하는 작업 중 발견된 것이다.

유테리아의 군수가 제국과 협력하고 있다는 의혹은 이곳에 있는 정보망의 조사 결과 의심의 여지가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아마란트가 보낸 요원들이 이미 유테리아를 기반으로 첩보와 민심 이반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믿을 수 있는 정보원에 따르면 저자거리에서 폐하에 대해 불만을 부추기고 있던 자가 늦은 밤 군수의 집무실에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상황이 지극히 위험하니 빠른 시일 내에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이 첩자가 경고한 위험이란 무엇일까. 통일 전쟁 중 유테리아는 통합에 대한 저항이 심하였고, 통일 왕국 초기이던 당시 아직 독립 왕국이던 기억이 생생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방의 유테리아는 왕국에서 돌아서기라도 하면 북쪽의 제국과 양면 협공을 할 수 있는 지리적 위치에 있었으며, 벨가스트에서 북으로 보내오는 보급을 차단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다. 거기에다가 곡창 지대인 유테리아의 제어를 잃으면 왕국은 치명적으로 약해졌을 것이다. 한 마디로 유테리아는 왕국으로서는 결코 잃을 수 없는 지방이었고, 아마도 유테리아 군수는 그러한 이점을 이용해 제국과 왕국을 대립시켜 이득을 취할 생각이었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위험에 대한 대응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돈울프공이 진 뤠이신과 자비에르 대주교에게 보낸 다음 서신에서 엿볼 수 있다.

진 대인께,

유테리아에서 인사드립니다. 저는 폐하의 명으로 유테리아 군수의 손님으로 잠시 있게 되었습니다. 대인께서는 웨스트랜드에서 편안하신지요. 그곳에서 하시는 거래도 잘 성사되기를 바라며.. (중략) 저도 유테리아에서 폐하의 은총으로 편하게 지내고 있지만, 치안 상황은 다소 불안하여 군수의 친척인 템프리안 성주만 해도 산적이나 반군에게 성을 지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양입니다. 용병과 무장 보강을 여러 번 군수에게 청하였으나 군수는 재정 부족을 이유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 아닙니까. 하루빨리 왕국에 평화가 찾아와야 치안에도 힘쓸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오는 길에 보니 카라스를 지나는 북서쪽 교역로는 이 계절에는 평탄합니다. (중략) 무사히 왕성에서 다시 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친우 돈울프 드림.



주교님께,

주교님에게 데오스의 빛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유테리아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으니, 참으로 풍요롭고 아름다운 땅이며 민심 또한 평안합니다. 주교님도 텔가렌에서 우리 주 데오스의 사업을 무사히 하고 계시기를 기도합니다. (중략) 이곳 유테리아 사람들은 통일 이래 급속히 참 신앙이 성장하고 있으니, 새싹과도 같은 그들의 믿음을 더욱 키워갈 자애로운 손이 필요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중략) 건강한 모습으로 케어 디나스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우리 주 데오스 안에서 돈울프 드림.

어떻게 보면 특별한 의미가 없는 안부 서신처럼 보이지만, 이어지는 기록을 보면 위 두 서신은 상당히 중대한 의미가 있었으며, 세 공신 사이에 있었던 발군의 협력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그해 유테리아 각지에서 거리 설교사들이 늘어나면서 군수를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그가 데오스의 뜻을 어기고 요정과 마법사들의 꼭두각시인 제국과 손잡으려고 한다고 설교하니 민심이 크게 동요하여 여러 곳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투옥하고 사형시켜도 오히려 봉기는 더욱 극심해졌고, 결국 템프리안 성주가 '민중이 탄압받는 것을 데오스의 이름으로 두고볼 수 없다'며 리테아1)로 진군하였다. 예상과는 달리 그의 군대는 많은 용병으로 보강하고 무장 상태도 훌륭하여 그는 결국 군수를 실각시키고 리테아를 점령하였다. 칼라인 듀리온 폐하께서는 그의 군수 승계를 승인하시고 그의 신심과 용맹을 치하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세 공신이 짧은 말 몇 마디만으로도 얼마나 서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필요한 행동을 취했는지 엿볼 수 있다. 돈울프가 외교 임무를 틈타 상황을 파악하고, 자비에르 주교가 사제들을 동원해 민심을 돌리고, 진 뤠이신이 용병과 무기를 공급해서 친제국 인사에서 친왕국 인사로 유테리아의 정권 교체를 이룬 과정이 실로 잘 안무된 춤처럼 정교하고 노련하지 않은가. 더 많은 피를 부르고 유테리아의 저항감을 한층 강하게 했을 왕국군 직접 동원마저 피한 채… 한편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와 재무대신에게 쓰는 편지의 색채가 사뭇 다른 점도 돈울프의 성격에 대해 많은 점을 시사한다. 한 마디로 그는 동료를 대할 때도 빈틈없는 외교관이었으며, 사람을 움직이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고 하겠다.

돈울프, 자비에르, 진 뤠이신… 이 세 사람이 개별적으로 뛰어난 인물이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바이나, 유테리아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이들이 각자의 재능과 자원을 활용해 긴밀하게 협조할 때면 그 결과는 개별적인 능력의 합 이상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세인들은 흔히 화려한 무공을 주목하고 칭찬하지만, 이들 문신(文臣)이 다진 탄탄한 외교와 내정의 기반이 없었더라면 이라하의 승리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듯 서로 재능도, 배경도, 신념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일할 때 나오는 업적에서는 삼백 년 후의 우리도 배울 것이 많다. 오늘날의 왕국을 형성한 초석이 된, 왕국의 세 기둥에게서.

1) 유테리아의 중심 도시

댓글

_엔, %2007/%10/%26 %23:%Oct:

건국 2시기의 글이 또 한 편 나왔군요. 돈울프의 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가 나중에야 아하 했어요. 돌려서 말하기의 귀재로군요. 착착 맞아떨어지는 전략이 멋집니다!

한편으로 (동료를 대할 때도 빈틈없는 외교관이었다, 같은 말이 나오니) 건국 공신 클럽이 사적으로는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에 대해서도 조금 궁금해지네요. 다들 자기 입장이 분명한 사람들이라 의외로 서로 으르렁댔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로키, %2007/%10/%28 %01:%Oct:

외교란 비정한 거죠! 건국 공신 클럽의 활약상! 사적인 이야기도 재밌을 것 같긴 한데 얼마나 기록이 남았을지 잘 모르겠군요. 생각나는 건 편지나 일기 정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