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렌가르드의 결심

약속한 장소에서 이렌가르드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머리와 하얀 옷자락이 세찬 바람에 나부끼고 다가오는 폭풍에 몸부림치는 잿빛 바다는 차디찬 물방울을 공중에 안개처럼 뿌렸지만, 덮개 하나 두르지 않고 곧게 선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닐은 서둘러 망토를 벗으며 다가갔다.

“이렌가르드! 곧 비가 내릴 겁니다. 어서 안으로…”

이렌가르드는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다닐은 이미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다닐…”

“안 됩니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을 뻗으며 한 발짝 다가섰지만, 다닐은 둘러주려 했던 망토는 잊은 채 마치 독사를 피하듯 물러섰다. 검은 하늘에 섬광이 번쩍하더니 거대한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은 소리가 하늘에 울렸다.

“제발…”

“재고해 주십시오.”

다닐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악몽이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하려고 그를 불러냈을 리 없었다. 이런 식으로 그를, 그들의 민족을 배신할 리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이 날 지지해 준다면 내게 그게 어떤 의미일지, 다닐-”

“이번만은 그렇게 못합니다!”

다닐의 목소리는 해안에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이길 듯 쩌렁쩌렁 울리다가 부서지듯 끊기며 쉬어 나왔다.

“차라리 목숨을 버리라고 해주십시오. 전투에서 명예롭게 죽을 수 있게… 우리 조상의 신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이렌가르드는 절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의 죽음을 바라겠어요? 다닐, 내 형제여, 이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잖아요! 브란이 벨가스트를 다스릴 수 있으려면.. 반트족이 이 땅에서 내몰리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반트족이란 무엇입니까!”

그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반듀아의 아들이 아니면 우리에게 무슨 생명이, 무슨 명예가 있단 말입니까! 이렌가르드…”

그는 무너지듯 축축한 모래에 무릎을 꿇었다.

“여왕이시여… 제발… 이 결정만은 재고해 주십시오. 내게 반듀아 여신은 바로 당신입니다…”

다시 천둥 소리가 울리더니 굵은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져 모래에 패인 자국을 남겼다. 마치 반듀아의 울음처럼 바다의 함성이 울리고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자박자박 모래를 밟고 다가오는 가벼운 발걸음은 또렷하게 들려왔다.

“미안해요, 다닐.”

이렌가르드가 허리를 숙여 그의 어깨를 끌어안자 흐드러진 작약 향이, 뜨거운 체온이, 흘러 떨어지는 붉은 금빛이 그를 덮었다. 어깨가 들썩였지만 눈물도, 흐느낌도 나오지 않았다. 육체와 심장을, 마음과 혼을 분리시키는 고통뿐. 그래서 그의 머리를 타고 떨어지는 눈물방울은 그녀가 대신 흘려주는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는 이렌가르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가 알던 세상이 끝나가고 시간은 그를 남겨두고 지나가는데, 그녀 외에는 아무것도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마침내 하늘이 열리고 차디찬 빗물이 쏟아지는 동안에도 그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들을 기다리지 않고 무심히 변해가는 세상 한가운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