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하늘빛이 한결 같이 밝고 나뭇잎은 바람 불 때마다 울긋불긋 그림자지는, 그런 계절이 돌아왔어. 졸업식이 가까워오는 계절, 내가 다니는 수녀원 학교는 현실감 없는 들뜸으로 가득 차서, 가로수 잎이 깔린 우리의 통학길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부드러운 수런거림으로 채워진 요정의 숲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어. 그러나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학교들과 이곳의 다른 점은 이곳이, 무엇보다, 절대적으로, 한가하다는 점이겠지. 가을의 한기와 이 커다란 한가함 속에서 방향 없는 열정은 곧 소모되고 우리는 그 진짜 의미를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그것이 주인집이 되었든 수도원이 되었든- 평생 스스로를 먹이 삼아 버틸 건물 속으로 걸어들어가게 되겠지. 이 시기를 입시 준비로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보냈던 당신은 내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괜히 감상에 젖어서 보내지도 않을 편지를 써봐. 피디아스 선배, 선배는 내 졸업식에 와주겠다고 했었지.

선배가 올 수 있었더라면 좋을텐데. 그랬다면 내 졸업은 더욱 완전했을 거야. 이번의 졸업식은 내게 수녀원을 수료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기…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야. 조금 독창적이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올 가을 내 유년 시절 전체에 대한 작별을 고하고 싶어.

짐작하겠지만, 이 말은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이만 자유를 주고 싶다는 뜻이야. 열 다섯살 때 부모님 몰래 신문에 연재 소설을 기고하기 시작했던 그때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이었어. 글을 쓰는 것은 졸업할 때까지, 10대가 끝날 때까지만, 학창 시절 때의 추억으로.

지금이라면 어떨지 모르지만… 내가 알던 선배라면 이런 말 싫어했겠지. 패배주의적이고 운명 순응적인 사고 방식이라면서. 그러나 선배, 우리 부모님은 늙어가고 계셔. 나는 평생 동안 그들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꿈을 꾸며 살 수는 없기 때문에.

구름이 많은 날이야. 사람의 삶은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일에 적응하는 과정이라고 나는 내 소설의 주인공에게 말하게 한 일이 있어. 마법사가 아니라는 사실에 적응하는 일. 어느날 요정이 나타나서 출생의 비밀을 밝히고 바다 건너편 왕국으로 데려가주는 일은 없으리라는 사실에 적응하는 일. 평생 동안 글을 써보았자 중간치기 대중 소설 작가 이상이 될 수 없으리라는 사실에 적응하고, 아름답지 않은 몸에 적응하고, 익숙한 세상 속에서 매일매일을 보내면서 늙어가다 언젠가 죽으리라는 사실에 적응하는 과정. 나는 나의 적응이 잔인할 정도로 빈틈없는 것이어야 한다고 마음 먹었을 뿐이야. 평생을 미성년자처럼 불완전한 방식으로 한 발을 환상의 세계에, 한 발을 현실의 세계에 걸치고 살지는 않겠다고. 나의 졸업은 완전한 것이어야 할 거야.

그러나 어른들의 세상으로 들어서기 전, 아직 내게 남아있는 시간 동안 마무리짓고 싶은 일이 있어. 이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소설을 쓰는 일이야. 나는 영웅적인 인물들의 사랑과 꿈이 -사회경제적 조건들을 이기고-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던 마지막 시대에 관해 쓰고 싶어. 끝내는 그 인물들이 자기 자신들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방식에 관해서도. 소녀 시절의 꿈처럼 몰락해가서 지금은 그 추억마저 의심의 대상이 되어버린 요정과 마법의 시대에 대해 난 쓸 거야. 내 마지막 작품은 이 세상의 유년 시절과 그 졸업에 관한 글이 될 거야.

댓글

_엔, %2007/%10/%20 %16:%Oct:

피디아스와 릴리의 관계 멋대로 상상해서 써봤습니다. 세인님 죄송해요;ㅁ;

 
BlackMarquis, %2007/%10/%21 %18:%Oct:

이런 멋진 글을 볼 수 있었는데 사과라뇨… 오히려 제가 더 영광이옵니다. 피디아스라는 못난 자식이 과분한 관심을 받고 있네요(웃음)

 
_엔, %2007/%10/%21 %19:%Oct:

피디아스에게 제가 반해버려서 릴리가 반한 얘기를 쓰는건 문제 없을 것 같아요!

 
로키, %2007/%10/%21 %02:%Oct:

와, 예쁜 글! 릴리가 요정파(..)가 된 개인적 동기가 보여서 더욱 좋네요. 불완전한 육체의 제약과 여자로서 주어진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이라도 생각하면 맞을지 모르겠지만요. 아마 펜너옹도 재주는 있는데 펼칠 기회는 거의 없는 손녀가 많이 안타깝지 않을까 싶어요..;_;

 
_엔, %2007/%10/%21 %19:%Oct:

몽상가적 기질과 요정에 대한 동경이 맞아 떨어진 거죠. 할아버지 너무 자상하세요. 후후;

 
오승한, %2007/%10/%21 %21:%Oct:

(비록 적(!)이지만) _엔님의 글은 항상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좀 더 빨리, 많이 쓰세요!(재촉)

 
_엔, %2007/%10/%22 %16:%Oct:

저도 적!이지만 승한님의 열정적인 글은 늘 즐겁게 보고 있답니다 ^^* 글 속도는… 이미 반쯤 포기하고 일주일에 두 개 업을 목표로 달리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