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제안

내가 벨가스트 왕국의 상황을 멸망 직전으로 묘사한 것은 과장된 것이었음을 인정한다. 데네란 부족과 다른 부족들의 반란은 초기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큰 규모가 아니었으며, 벨가스트 왕국은 본업인 해적 활동을 하기에 충분한 해군력을 기적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반트족들은 해적 활동을 왕국의 단결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으며, 그 정책은 충분히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끝났다. 보기 좋게 지고 말았다.

노교수의 영향력은 아직도 대단했다. 나같은 애송이가 그에게 도전하는 것은 아직까진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전날 밤, 싸구려 독주를 연거푸 세 잔을 마시고는 정신없이 잤다(아무리 놀림을 받아도 주량은 늘지를 않는다)

눈을 떴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몸이 좋지 않았다. 감기에라도 걸린 것일까.

뜨거운 물을 가져다달라고 하려고 하인을 불렀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빌어먹을, 필모스였다.

지금까지 주무시고 계셨는 줄은 몰랐소. 연구 때문에 정신없이 바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보지요?

전날 먹은 싸구려 독주의 기운을 빌어 엿이나 먹으라고 정중히 말해주었다. 그는 내 예의바른 인사에 퍽이나 놀란 것 같았다.

이 양반, 또 흥분하셨군. 진정해요. 감기에 걸린 것 같은데 하인에게 뜨거운 차라도 가져다 달라고 하시오.

그래, 이미 그렇게 했다. 그런데 하인놈은 뜨거운 물을 길러 지옥에라도 간 모양이다. 혹시 하인놈이 늦을 거라고 말을 전하려고 당신을 보낸거라면 당신도 그냥 지옥으로 썩 꺼지는게 어떻겠나.

허 참, 이거 왜이러는거요, 점잖은 사람이. 혹시 내가 당신에게 나쁜 소식이라도 가져왔을까봐 그런거요? 그렇다면 안심하시오. 그 분은 당신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계시오.

노교수가 오랫동안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학계에 영향력이며 인맥이 대단하지요. 그는 가만히 있더라도 그를 위해 일해줄 친구가 많단 말이오. 하지만 당신은 겨우 스물 넷 아니오. 이제 막 시작선에 선 사람과 이미 저 멀리 달리고 있는 사람이 경주를 하면 전자가 불리한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소. 하지만 이제 그 분이 손을 쓰시기로 한 이상 당신은 그 노교수와 같은 출발선에 선 것이나 다름없소.

펜을 드시오. 글을 쓰시오. 전투는 졌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이오.

다 소용없다. 당신들이 어떻게 손을 쓸 지는 모르지만, 생각처럼 되지는 않은 것이다. 승리의 열쇠는 내게 유리한 자료가 얼마나 많이 있느냐다. 하지만 건국 초기의 자료들은 모두 반트족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호의적이다. 건국왕의 반려가 반트족이 아니었나.

이것 보시오, 바르삭 씨. 나는 당신이 좀 더 영리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자료가 없다고? 그게 대수인가? 오늘날 남아있는 사료란 아흔 아홉 개의 유리조각과 한 개의 구슬이라고 말한 건 당신 아니오. 그렇다면 그 많은 유리조각 중 하나를 보석으로 둔갑시킨들 표시라도 나겠소?

이 악당!

아니, 나는 이기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일 뿐이오.

이 사기꾼!

아니, 나는 당신에게 도움을 주려고 온 사람이오.

이…이…!

더 이상 말을 해봐야 소용 없겠군. 나는 돌아가겠소. 내 조언을 잘 생각해보시오.

댓글

정석한, %2007/%10/%22 %21:%Oct:

기다리고 기다리던 피디아스의 굴욕일기군요 +_+

 
로키, %2007/%10/%24 %02:%Oct:

우와~ 멋져요. 인물과 감정 표현이 정말 생생한걸요. 이걸 보려고 가산을 탕진했습..(퍽)

 
_엔, %2007/%10/%27 %00:%Oct:

저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굴욕일기 잘 봤습니다. 이 분처럼 굴욕이 멋지게 어울리는 분도 없을 거라는 것이 저의 소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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