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니아카

2010/6/6 플레이 이후 편집본

출처:리니지 2

“그렇게 쳐다보지 말거라, 자매여. 오래지 않아 나도 따라갈 테니…”

“켈냐가 니아더러 왜 사냬! 왜 살지? 히히.”

요약

다크엘프의 공주 (프리야 마타)인 샤나에리스의 친우이며 의자매로, 이샬헤브라가 죽은 전투에서 샤나에리스의 퇴로를 확보하다가 포로로 잡혀 노예생활을 하고 딸을 잃었다. 탈출 이후 노스탤지어와 협력하는 샤나에리스와 반목하다가 노스탤지어 요원을 죽이고, 샤나에리스의 자비로 사형만은 면하고 대신 노스탤지어 유격대 임무를 떠나게 되었다.

이하 내용은 일처다부제와 동성애, 성적 폭력에 대한 암시 등 수위높은 대목들이 있습니다.

시작

아라니아카는 허무의 대지 동쪽과 동남쪽을 주 영역으로 하는 바이두르야 부족의 유력한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다크엘프 기준으로는 유복했다. 식수를 찾아 가축떼를 끌고 유랑해야 했지만, 다크엘프에 원조를 베풀고 교역도 하는 오만의 땅의 드워프들과 접촉하는 입지였기에 생활은 (역시 허무의 대지 기준이지만) 크게 부족하지 않았다. 다크엘프 아이가 당연히 그렇듯 가축을 치고 물을 길어오고 가축떼에 변이생물들이 접근하면 내쫓거나 어른들에게 알리고, 죽어가는 적의 목숨을 끊고 시체를 터는 등 부족에 필요한 노동을 하면서 자란 평범한 어린시절이었다.

아라가 사춘기 초입일 때 어머니 카하드세야는 옆 부족과 식수원을 두고 일어난 분쟁 중 전사했고, 이런 경우에 흔히 그렇듯 아라는 동생과 아버지들과 함께 어머니의 라카'마 (Raka'ma: 피로 맺은 의자매/연인)인 라스카야의 가문에 들어갔다. (이후 그녀가 '어머니'라고 할 때는 물론 라스카야를 가리킨다.) 카하드세야의 죽음 이후 부족 간 분쟁 해소의 일환으로 마샤라 부족에서 가축과 보석, 그리고 가장 중요한 샘물 사용권 등 배상을 전달하러 왔을 때 아라니아카는 마샤라의 샤나에리스를 처음으로 만났다.

이후 라스카야의 뛰어난 정치 감각에 힘입어 바이두르야와 마샤라 두 부족은 협력관계가 긴밀해졌고, 아라는 부족 원로들의 결정으로 마샤라 부족의 청년 쟈타간트와 약혼식을 올렸고, 샤나에리스와는 전장에서도, 평원에서도, 메타포노비아에서도 종종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샬헤브라의 라카'쟈나인 취임을 둘러싼 쉴새없는 거래와 뒷거래, 배신의 연속 속에서 두 전우는 처음으로 밤을 같이 보내고 라카'마의 맹세를 했고, 굳건한 신뢰의 바탕 위에 이샬헤브라와 샤나에리스의 취임을 이루어냈다. 이샬헤브라를 저지하러 다우르가하 휘하 연합부족의 정예 기수들이 메타포노비아에 진군했을 때, 그들을 맞으러 나가는 샤나에리스와 아라니아카가 한손에는 무기를 들고 다른 손을 맞잡은 채 나란히 가우르를 몰던 모습은 당대 시인의 노래에 남기도 했다.

두 친구는 반려를 맞아들이고 아이를 낳으며 안정적으로 삶을 꾸려나갔고, 경계지역에서 오크를 몰아낼 때나 교역 교섭을 할 때 등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갑게 해후했다. 아라니아카는 백일 넘어 생존한 첫 딸의 이름을 샤나에리스를 따서 지었다. 샤나에리스가 다음 라카'쟈나인에 등극하면 프리야 마타는 아라니아카가 유력하지 않느냐는 추측이 주변에 팽배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평온했다.

항복

인간들의 안힐라스 상륙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처음에는 새로운 교역 상대이자 어쩌면 새로운 동맹이 될 것 같았던 그들은 얼마 안 가 대륙 전체를 정복하고 약탈하려는 본심을 드러냈고, '약탈자들을 이 땅에 남겨두지 말라'는 신탁에 따른 전쟁의 시작은 모두에게 너무나 많은 용기와 희생을 요구했다.

니르나이스 아르노이디아드(Nirnaeth Arnoediad,한없는 눈물의 전투)에서 이샬헤브라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그녀의 뒤를 이어야 할 프리야 마타인 샤나에리스 역시 위험에 처해 있었다. 즉시 후퇴해 전열을 정비해야 했지만 등뒤에는 협곡을 통해서만 지날 수 있는 험난한 에레드 고르고로스가 버티고 있었고, 앞으로는 다크엘프 노예를 획득할 생각에 들뜬 제국 군대가 육박해 오고 있었다. 아라니아카는 자신이 퇴로를 지킬 테니 퇴각하라고 친구의 등을 떠밀고 제국군에게 맞섰다. 목숨으로 시간을 벌면서도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남편들과 딸 샤나는 평생의 친우, 다음 라카'쟈나인이 될 샤나에리스가 돌봐줄 것을 알았기에 마음은 오히려 편안했다.

거기서 끝났더라면 아라니아카의 이야기는 한결 단순하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녀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라카'마이자 프리야 마타의 퇴로를 시체가 되는 순간까지 막아섰을 것이고, 그녀 자신이 어려서 그랬듯 딸은 새로운 어머니가 훌륭하게 키워주었을 것이다. 라카'쟈나인이 전사한 상태에서 프리야 마타마저 후계가 불명확한 채 죽었더라면 다크엘프들은 회복하기 어려운 혼란에 빠졌을지도 모르는 만큼 그녀의 희생은 더욱 숭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혼란은 그런 단순하고 거의 운명적인 경로를 흩어버리고, 분명했던 것을 불명확하게 흐려버리곤 한다. 한떼의 노예 사냥꾼이 퇴각의 혼란 중에 본대에서 떨어진 다크엘프 남자와 아이 일행을 덮쳐 저항하는 남자들을 죽이고 아이들을 포획하지 못했더라면 아라는 원하는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혹은 그 일행 중에 아라의 딸, 어린 샤나가 속해 있지 않았더라면 역시 아라는 장렬히 전사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머리회전이 빠른 장교 하나가 그 민간인 포로들을 협곡에서 저항 중인 다크엘프들에게 보이는 곳으로 끌고 오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도 아니면 샤나가 엄마를 보는 순간 울면서 부르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그 소리에 아라가 창백해지며 돌아보지 않았더라면.

샤나를 죽이겠다고 했다면 아라는 결코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당초 아이들까지 전장으로 데려가는 것은 함께 죽음을 불사한다는 각오였기에 전사의 딸로서 샤나는 전쟁의 위험도 무릅쓸 의무가 있었다. 지켜주지 못한 것이 슬프고 미안하기는 해도 딸이 죽고 아라도 싸우다가 뒤를 따르는 것도 나쁜 결론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위협은 샤나를 죽이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아라가 항복하지 않으면 샤나에게 어떤 짓을 할지 듣는 순간 아라는 그들 다크엘프가 그동안 너무나 순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국과 인간 국가들은 그 어떤 피의 원한이 맺힌 다크엘프 부족과도, 그 어떤 거만하고 무책임한 엘프와도 근본부터가 다른 적이라는 것을. 적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순간부터 전쟁에는 넘을 수 없는 어떤 선도 없다는 것을… 구토감을 느끼며 그녀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에서 무기를 떨어뜨렸고, 그 순간부터 전사가 아닌 전리품이 되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은 당시에도, 이후에도 사무치도록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위협한 그대로 하는 한이 있어도 항복해서는 안 되는 것은 알았다. 어차피 항복한다 해도 그들이 마음을 먹으면 막을 방법도 없었다. 도의도, 한계도 없는 적에게 붙잡힌 순간부터 이미 샤나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적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는 것이 옳았을 텐데도 그 순간 무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나약함은 지울 수 없는 회한으로 남았다.

향수

뉴 임페리얼에 있는 부총독의 소유가 된 아라는 몇 년 동안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노예생활을 겪었고, 딸아이의 목숨이 걸린 만큼 저항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끊을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 자신을 끝없이 경멸하면서도… 의도적으로 멀리 떨어뜨려놓고 종종 위치를 옮기는 딸아이를 가끔 만나거나 먼발치에서 보는 시간이 그 어두운 날들의 유일한 빛이었고, 나락처럼 까마득한 밤을 견딜 수 있는 힘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라는 샤나에게 뭔가 심상찮은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딸을 만나게 해주는 간극이 점점 길어졌을 뿐 아니라 가끔 만나도 아이는 자꾸 여위고 말이 없었다. 로브를 입은 사내들이 다른 이종족 노예의 아이들도 여러 명 데려갔고, 그렇게 사라진 아이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도시 외곽의 성채에서 자꾸 이종족 아이들이 죽어나간다는 소문을 들은 아라는 샤나 때문에 불안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차가운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슬픔은 차라리 익숙했지만, 아이를 잃고 울부짖는 다른 여자 노예들의 고통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년만에 그녀는 두려움에 떠는 노예가 아닌 전사가 되어 있었다.

뉴 임페리얼의 노예들 사이에서 '노스탤지아'라는 조직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노스탤지아와 협력했다가, 혹은 협력했다는 의심만으로 처참하게 죽어간 노예도 여럿이었다. 아이들이 사라진 후 또 그런 처형식이 있었을 때 주인은 집안의 모든 노예가 나와서 지켜보게 했고, 아라는 반나절도 넘게 걸린 그 죽음을 주인의 발치에 앉아 주시하며 하나하나 눈에 새겼다. 다음날 그녀는 노예 중 노스탤지아와 연락이 닿는 이를 은밀히 수소문해 부총독 곁에 있는 위치에서 줄 수 있는 도움은 모두 줄 용의가 되어있다는 뜻을 전했다.

이후 식사를 하고 난 접시 밑에서, 화초의 잎사귀 사이에서, 지나가는 노예의 작은 속삭임에서 노스탤지아의 지령을 받으며 아라는 자신이 거대한 계획의 작은 톱니바퀴가 된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 조직의 치밀한 조직력과 신중함 역시… 노스탤지아 협력자라고 죽은 이들은 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거나 애당초 노스탤지아와는 상관도 없었을 확률이 높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녀는 노스탤지아에 꾸준히 주인과 부총독궁 주변 정보를 전달했다. 딸과 함께 탈출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이렇게라도 싸우다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는 행복은 아니지만 어떤 차갑고 깨끗한 기쁨이 있었다.

탈출

노스탤지아의 뉴임페리얼 공략은 빠르고 갑작스러웠다. 아라도, 그리고 도시의 어떤 노예도 침공이 그렇게 가까웠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노스탤지아의 정보 보안은 철저했고, 행동은 신속하고도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아라를 포함해 노스탤지아와 협력하는 노예들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할지 이미 지시를 받고 있었기에 혼란은 없었다. 혼란에 빠진 것은 갑자기 성벽을 넘어 나타난 노스탤지어 대원들과 맞선 제국군이었다.

아라 역시 받은 지령이 있었다. 잠들었던 부총독이 놀라서 창가로 달려갔을 때 그녀는 노스탤지아에서 지시한 그대로 보석함을 열어 저녁나절만 해도 없었던 칼을 찾았다. 나가려고 돌아섰다가 부총독은 칼을 든 아라와 마주했고, 그녀는 태연히 그의 피로 비싼 양탄자를 적셨다. 방에서 나오던 아라는 불안한 마음에 아버지를 찾으러 달려온 부총독의 어린 아들과 마주쳤고, 부총독의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든 채 아이에게 방에 들어가지 말라고 충고한 뒤 (따르지 않을 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아이를 지나쳐서 나왔다. 가는 길에 금팔찌와 귀걸이와 반지, 거추장스러운 실크를 잡아뜯어 바닥에 버리면서 그녀는 도시 외곽에 샤나가 잡힌 성채를 향했다.

부총독뿐 아니라 그 휘하 지휘관들도 상당수 혼란 중에 암살당해 뉴임페리얼 제국군의 지휘체계가 거의 무너진 가운데, 외부 침공군과 내부 노예들의 협조로 삽시간에 무기고가 털리고 노예들이 무기를 들면서 제국군은 압도당했다. 그 혼란을 헤치고 제국 군인이 공격해오면 싸우면서 도시 서쪽으로 나온 아라는 옛 성채가 불길에 휩싸인 채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진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흩어진 시체를 지나 무작정 달려들어가서 아라는 불이 난 안채 앞에서 샤나를 발견했다. 주변에 이종족 아이들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는 가운데 바들바들 떨면서 샤나는 로브를 입은 남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아라가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동안 노스탤지아 대원들이 샤나를 막아서며 마법사를 공격했지만, 그들은 마법사의 손짓 하나에 바로 나가떨어졌다. 아라가 미처 닿기 전에—활이 있기만 했다면, 세계의 어머니여 제게 힘을—마법사는 샤나를 향해 손을 내리쳤고, 섬광이 번쩍하면서 샤나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달려가 무릎을 꿇고 피투성이 딸을 안아올리면서 아라는 다가오는 죽음을 차라리 환영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딸과 함께 갔어야 했었다. 떨면서 엄마를 부르는 샤나에게 입맞추고 사랑한다고, 괜찮다고 속삭인 후 그녀는 천천히 딸을 안고 일어섰다. 무기는 이미 떨어뜨렸지만 아무 두려움 없이 마법사를 마주보며.

놀랍게도 마법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주받은 종족의 딸이 벌레같은 수명을 이어 이곳까지 왔느냐. 그 비참한 목숨을 어디까지 지탱할지 지켜보겠다, 프라드하나1)여.”

마법사가 냉소하는 동시에 딸의 가냘픈 흐느낌은 점점 약해졌다. 분노와 슬픔의 검은 심연 사이에 아라가 굳어있는 동안 공간이 이상하게 일그러졌고, 공격하는 대원들을 쉽게 쓰러뜨리고 돌아선 마법사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치유사가 곧 달려왔지만 샤나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아라는 움직일 수도, 눈물 흘릴 수조차 없었다. 몇 년만에 마음껏 안아볼 수 있었던 딸을 끌어안고 그 아비규환 한가운데 서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제국의 지원군이 오기 전에 어서 떠나야 한다는 독촉도, 바로 옆에서 불길을 뿜으며 쓰러져가는 건물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결국 노스탤지아 대원 하나가 그녀를 억지로 끌고나오지 않았더라면 제국군이 들이닥치는 순간까지 그 마당에 있었을 것이다. 식어가는 샤나를 안은 채 걷기 시작한 그녀는 이번에는 멈출 수가 없었다. 환호하고 노래하고 애도하는 도망노예 행렬 속에서 돌처럼 침묵하며 아라는 북쪽으로 걷고 또 걸었다.

니아가 눈을 뜬 것도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면 흘리지 않은 눈물에 얼굴이 젖어있고, 부르지 않은 노래의 메아리가 주변에 맴돌던 때에. 죽지도 못하고 노예살이를 한 전사, 딸을 지키지 못한 어미, 이제는 미친 여자. (그 비참한 목숨을 어디까지..) 자신을 구성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시간에도 품안에 죽은 딸의 시체가 품안에 차디찬 동안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친우

남쪽에서 다른 작전을 수행하고 북상한 다크엘프 전사들이 합류해서 아라를 데리러 왔을 때 아라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이 샤나를 데려가려고 하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흐느꼈다. 몇 년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또 헤어질 수가 없어서 아라는 샤나를 꼭 끌어안으며 맹목적으로 애원했다. 제발 함께 있게 해주세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자비로운 나으리 제발…

결국 그녀를 어둠에서 데리고 나온 것은 샤나에리스, 그녀의 아름다운 샤나에였다. 아라가 샤나에를 알아볼 때까지 다크엘프의 프리야 마타가 몇 시간을, 어쩌면 며칠을 친우 곁에 앉아있었는지 아라는 알지 못한다. 어느 순간 정신이 들었을 때 샤나에는 다가오지 않고 옆에 앉아 끝없이, 나직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나의 아라가 돌아와주어 얼마나 기쁜지, 너의 아픔을 함께하지 못해 얼마나 괴로운지, 나를 위해 다치고 죽은 너와 작은 샤나 앞에서 얼마나 죄스러운지, 내 평생의 친우이며 혈맹인 아라를 얼마나,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한결같은 목소리에 담긴 사랑과 고통에 영혼을 싣고 아라는 마침내 돌아올 수 있었고, 딸의 조그마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광기가 아닌 진짜 슬픔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그녀가 통곡하는 동안 샤나에리스는 아라와 그 품안의 꼬마 샤나를 꼭 안고 결코 놓지 않았다.

귀환

샤나를 세계수의 잔해에 묻은 아라는 바이두르야 부족의 전사 자리로 돌아왔지만,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아라의 라카'마로서 샤나에는 아라가 죽었다고 알려졌을 때 쟈타간트를 비롯한 아라의 생존한 남편들과 결혼했다. 그런 상황에서 원래의 쟈나인2)이 살아돌아오면 라카'마로부터 식솔을 되찾아오는 무혈 결투 의식을 치를 수 있었지만, 아라는 오히려 샤나에리스에게 감사하고 남편들에게도 샤나에의 집안에서 계속 지내라는 뜻을 전했다.

그들의 출신 부족과의 연줄을 생각하면 어머니와 주변의 조언대로 도로 데려오는 것이 옳았겠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모든 접촉이 폭력이었던 아라는 다시 결혼생활을 시작하기가 버거웠고, 노예생활 동안 변한 모습을 남편들에게 보이기가 두려웠다. 또 라카'쟈나인이 공석인 전쟁 중에 프리야 마타의 권위를 희석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이유를 갖다대도 결국은 꼬마 샤나의 기억을 끝없이 상기시킬 그들에게서 도망쳤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딸을 지키지 못했듯 아이의 아버지들 역시 지키지 못한 근원적인 실패를, 비겁한 자신을 아라는 담담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이후 들어온 혼담은 모두 전쟁 때문에 눈을 돌릴 틈이 없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어차피 노예로 지냈던 전사에게 들어오는 혼담이란 보잘것 없기도 했고.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인간들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샤나에의 전략이었다. 어머니 라스카야와 다른 많은 부족장들과 마찬가지로 아라도 프리야 마타가 노스탤지어의 인간 및 인간 혼혈들과 협력하는 사실에 분노했다. 게다가 어린 샤나를 구하지도 못한 무능한 그들을 아라는 도저히 신뢰할 수 없었다. 누구를 정말 탓하는지, 샤나의 죽음에 대한 분노가 정말 노스탤지아에 대한 것인지도 모른 채 아라는 노스탤지아를, 믿을 수 없는 인간과 인간 잡종들을 힐난했다.

그러나 아라가 개인적으로 항의했을 때도 샤나에의 반응은 냉담했다. 인간 국가들은 절대 전면전만으로 이길 수 없으므로 그들의 사회 속에 움직일 수 있는 노스탤지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샤나에의 의지는 확고했으며, 라카'쟈나인에 등극하지 않았으면서도 복수의 맹세 때문에 그에 진배없는 권위를 얻은 프리야 마타를 움직일 방법이 없었다. 떠나간 동안 자신뿐 아니라 모든 것이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아라는 가슴에 한 줄기 찬바람이 불어왔다.

살인

프리야 마타에게 보고하고 노스탤지아 지도부의 뜻을 전하러 노스탤지아 대원 일단이 메타포노비아에 도착한 시점에 친 노스탤지아와 반 노스탤지아파의 긴장은 폭발하지 않았을 뿐 위험할 정도로 고조해 있었다. 찾아온 노스탤지아 대원 한 명이 아라는 왠지 낯이 익었다. 그가 인사를 해오자 마침내 아라는 자신을 불타는 성채에서 억지로 끌고 나온 대원을 알아보았다. 아시타라는 젊은 하프다크엘프는 남자이면서 마치 동격인 듯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고, 전사인 아라가 연약한 아이인 듯 위로하고 걱정했다. 아라는 그런 그를 기억에 새겨두었다.

아시타가 사절단 대표로 마하라야3)의 홀에서 프리야 마타를 접견했을 때, 아라니아카는 주변의 전사들이 프리야 마타가 이제는 인간 혼혈을 마하라야에 들인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아시타가 노스탤지아 지도부의 의견을 전달하며 연합개척기지의 존재, 십자군의 내륙 개척 등을 이유로 들어 다크엘프 부대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이양할 것을 요구하자 자리에 모인 전사들은 크게 술렁였다. 고함을 치는 이도 있었다.

아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샤나에와 잠자리를 같이한지는 오래되었고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었지만 라카'마의 위치는 변함없는 그녀는 마하라야 안에서 무기를 지닐 수 있었다. 마하스트린4) 아라니아카는 순식간에 화살을 뽑아 시위에 매기고 노스탤지아 대원 아시타의 가슴에 화살을 박아넣었다.

삽시간에 샤나에의 전사들이 무기를 뽑아 아라를 포위했지만, 이미 활을 떨어뜨린 그녀는 태연하기만 했다. 분노로 창백해진 샤나에를 똑바로 마주보며 아라는 인간의 피가 흐르는 자가 프리야 마타 앞에서 건방진 소리를 지껄여대니 혹여 적이 아닌가 저어하여 그를 죽였다고 말했다. 요즘 프리야 마타 곁에 인간이나 인간 혼혈들이 너무 많아서 의자매의 안위를 염려하다보니 착각한 모양이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머, 실수.') 샤나에는 얼굴이 차갑게 굳었지만, 전사들에 둘러싸여 나오는 아라를 영웅 취급하는 이가 더 많았다.

마하라야의 남자 구역에 숨어들어 샤나에의 남편 전원과 정사행각을 벌였다 해도 프리야 마타를 이렇게까지 곤란하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5) 혼혈이든 무엇이든 프리야 마타가 마하라야에 출입을 허가한 자를 그녀의 눈앞에서 죽인 것은 프리야 마타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고, 암살 시도만큼이나 심각한 일이었다. 그러나 헌신적인 라카'마의 표본이나 다름없는 아라를 처형하는 것은 샤나에 자신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었고, 아라의 어머니가 이끄는 바이두르야 부족은 이미 샤나에의 오랜 동맹이었다. 게다가 아라의 행동이 비록 살인이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며 동정론을 펼치는 부족장들의 반응은 아라의 단독 행동을 넘어선 뿌리 깊은 불만을 드러냈다. 한 마디로 샤나에는 아라를 처형하지 않을 수도, 처형할 수도 없었다.

결국 샤나에는 아라를 처형하지도, 그렇다고 살리지도 않았다. 대신 노스탤지어의 알다론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면 감형을 고려하겠다는 것이 프리야 마타의 결정이었다. 아라가 임무 중에 명예롭게 전사하는 것이 프리야 마타에게는 더 좋은 결과일 것이다. 그것이 샤나에가 원하는 결과이기도 할지, 아라는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변해버린 세상에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그러나 싸우는 것이라면 할 수 있다. 영원한 복수의 맹세를 수행하는 것만이 그녀의 삶에 남은 유일한 가치이며 확실성이니까. 모든 슬픔과 고통과 혼돈을 넘어서는, 창검의 끝에 서린 그 차갑고 명백한 결말을 향해 아라는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벌레같이 이어온 비참한 목숨에 명예로운 종지부를 찍고자.

니아

안녕하세요 나는 니아에요! 니아아아옹 냐옹! 어제는 나비를 봤는데요, 저어기로 나풀나풀~ 날아갔어요. 샤나 혹시 봤어요? 나비다 가우르르릉~ 이뻐이뻐~

닥쳐 이 미친X아!! —아라

1) 다크엘프어로 전리품을 가리키는 말
2) 여인/여주인/여왕
3) 큰 집, 프리야 마타가 메타포노비아 있을 때의 거처이자 집무하는 곳
4) Mahastrin, 대궁(大弓)의 칭호. 일반 궁수인 아스트린과 명궁인 사브야스트린보다는 높고, 선궁(仙弓) 아나스트린이나 한 번에 최대 한 명씩만 있는 신궁(神弓) 데바스트린보다는 낮은 등급이다.
5) 여담이지만 오히려 라카'마 사이의 그런 장난은 꽤 유명한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아니 내 의자매가 안 죽었단 말인가, 흠흠. 이런 기쁜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