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과 S의 사이 (1)

푸른 하늘에는 조각구름이 떠다니고, 푸르른 잔디는 기분 좋게 부는 바람에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다. 따스하고 기분 좋은 날이었다. 학교 곳곳에 있는 잔디밭에는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과제를 하기 위해 모인 학생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짓고 잔디밭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중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적당히 햇볕을 가려 그림자를 드리우는, 소위 명당이라 불리는 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청년 둘이 있었다. 한 청년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한 모양인지, 연신 주위에 있는 종이 쪼가리를 뒤적이며 알아보기 힘든 어려운 식들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고, 다른 한 청년은 바쁘게 무언가를 하고 있는 다른 청년의 무릎을 베고 누워 연신 바빠 보이는 청년을 향해 말을 걸며 훼방을 놓고 있었다. 하고 있는 행동은 상반됐지만, 둘의 모습은 쌍둥이처럼 꼭 닮아 있었다. 똑 닮은 둘의 모습을 지나가는 학생들 모두가 신기해하며 한 번씩 쳐다보곤 했지만, 둘에게 직접 다가가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아래 만들어진 그늘에는 그 둘 외에 다른 이도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했으나, 그 둘 곁으로 다가가 두 사람이 존재하는 공간에 발을 들이미는 이는 없었다.

“네가 마법학부 S지?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니?”

한동안 둘 만이 존재할 것 같던 그들만의 공간에 한 여학생이 불청객처럼 찾아들었다. 둘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다른 한 청년의 무릎을 베고 있던, ‘S’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맞아. 내가 S야.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옆에서 바쁘게 식을 써 내려가던 다른 청년도 궁금한 듯,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새로 찾아든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의문을 가지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표정까지 똑같아지자, 둘을 구분하긴 더 어려워보였다. 이렇게 똑같이 생긴 둘 중에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안 거지? 둘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연금술학부 톱을 달리는 쌍둥이 형과 달리 낙제만 겨우 면하면서 뒤에서 놀고 있는 동생 쪽이 파우스트의 정의에 대해 논리적으로 서술하라는 어려운 과제를 열심히 풀고 있을 것 같진 않거든.”

말에 뼈가 있는 듯 보이는 그녀의 짓궂은 말에 S는 표정을 확 구기고 뭐 씹은 표정을 지었지만, 형 쪽은 눈빛을 빛내며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보였다.

“제가 하고 있는 과제에 대해서 알고 있군요?”

아는 얼굴은 아니었던지라,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은 과제를 받은 학생이 아니란 것은 단번에 알았지만, 혹시라도 학년이 높은 연금술학부 학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청년은 그녀가 연금술학부 학생인지 알아보기 위해 자세히 그녀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연금술학부인지 그녀를 관찰하는 그의 눈엔 그녀의 교복 자락에 달려있는 ‘버클’만이 눈에 띄었다. 마법학부 학생들의 넘쳐나는 마력을 제어하기 위해 학원 측에서 제공하는 버클이 그녀의 교복에 달려있었다. 여학생은 자신의 교복을 관찰하는 시선을 느끼곤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대답했다.

“아, 저는 보다시피 마법학부에요. 다만 연금술학부에 친한 사람이 있어서, 그래서 알고 있었어요. 그 친구도 같은 과제를 받았거든요.”

대대로 마법학부와 연금술학부는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이 전통이었다. 그런데 마법학부 여학생이 연금술학부의 학생과 친하다? 연금술학부 소속이었던 청년은 자신이 속한 연금술학부 학생들을 떠올려봤지만, 마법학부 학생과 친하게 지낼 것 같은 이를 떠올리지는 못했다. 사실 같은 학부 학생들에게 그렇게 큰 관심이 있지도 않았으니, 생각해 보는 것이 그리 의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다른 학생들은 모두 과제하느라 바쁜 모양인데, 과제 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었던 거야?”

여학생의 말은 분명 S를 향한 것이었지만, 어느새 S는 베고 있던 청년의 무릎에서 일어나 앉아, 무릎을 베고 있던 청년의 뒤로 숨어 어깨에 기댄 채 경계어린 눈초리만을 보내고 있었다. 여학생은 그런 S의 시선에 눈을 맞추며 말을 걸었지만, S는 오히려 고개를 팽하니 고개를 돌려버릴 뿐이었다. 대신 연금술학부 소속의 청년, 쌍둥이의 형 쪽이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

“마법학부의 니콜라스와 에바가 학교 시계탑 앞에서 고백해서 사귀게 되었다던가, 요즘 시계탑 앞에서 고백해서 이루어진 커플이 3쌍이나 된다거나 하는, 말하자면 연애 가십이랄까. 남 연애 사에 왜 그리 관심이 많은지….”

안 듣는 척 해도 옆에서 떠들던 S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있었던 모양인지, 꽤나 상세한 대화 내용이 연금술학부 청년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한심해하는 건지 귀여워하는 건지 영문 모를 표정으로 S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꾹 다물고 있던 S의 입이 열렸다.

“R, 너는 모르겠지만, 요즘 학원 중앙광장에 있는 시계탑에서 고백을 하면 그 고백이 이루어져서 커플이 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네가 그런 이야기에 너무 무심한 거지~ 난 소문에 둔감해져서 네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대화주제를 못 따라갈까 걱정 되는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고. 나 아니면 누가 너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 주겠어?”

‘내가 네 옆에서 수다를 떨었던 건 다 널 위해서였다.’며, 열을 내며 반박하는 S에 말에, R이라고 불린 청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S의 말을 반박해 왔다.

“그런 건 다 미신이야. 시계탑에 사랑의 마법이라도 걸려 있지 않은 이상 말이지. 그리고 진짜 서로 좋아해서 사귀는 게 아니라 마법으로 인해서 사귀는 거라면 그건 진실한 사랑이 아니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커플이 된다고 해서 정말 좋을까? 그건 자신을 속이는 행동이라고 봐. 아! 아니, 어쩌면 이런 걸 수도 있겠네. 이미 아는 사이라면 그냥 말하면 될 텐데, 굳이 시계탑 앞으로 따로 불러내서까지 해야 하는 말이면, 그 말이 어떤 말일지는 보통 웬만한 사람이라면 짐작할 수 있겠지. 하물며 시계탑 앞에서 고백하면 그 고백이 이루어진다는 소문까지 돈다면 말이야. 그러니 시계탑 앞까지 불러내서 대화할 수 있다는 건 이미 서로 어느 정도 마음이 있는 상태라는 거고, 몸과 정신이 건강하고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 청춘 남녀 둘이 만나 친구에서 연인 상태로 발전하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겠지. 도대체 왜 그런 소문이 도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조금만 지나면 다른 사람들도 그게 헛소문이라는 걸 깨달을 테고, 그 소문도 다른 소문들이 그랬듯이 금방 언제 있었는지도 모르게 사라질 텐데, 그런데 신경 쓰는 것보다 지금 당장 닥친 과제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너도 과제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 지금 당장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소문에 열을 올리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야.”

차분하고 신랄하게 요목조목 따져대며 쏟아져 나오는 R의 말에 S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R이 이렇게 이성적인 이유를 대가며 S의 말을 반박할 때면 S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들은 뒤 그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둘 이외에 다른 불청객 또한 이런 대화가 이루어지는 현장에 함께하고 있었다.

“아, 듣고 보니 그렇구나! 음, 사실 나도 그 소문 들어서 알아. 그런데 그 소문을 듣고 그런 생각을 해 내다니, 대단하다.”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야.”

순수하게 놀라워하며 칭찬하는 그녀의 말에 R이 쑥스러운 듯 별 거 아니라며 재빠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니콜라스와 에바가 사귄다고? 그건 아직 몰랐었는데, 잘 됐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둘 다 수줍음이 많아서 힘들지 않을까 했거든. 그 소문 덕분에 그 둘이 고백할 용기가 생겨서 사귀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소문에도 나름 순기능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 누가 누구랑 싸워서 틀어졌다거나, 누가 사실 어마어마한 귀족 가의 사생아라거나 하는 소문에 비하면, 굉장히 로맨틱한 소문인 거 같아.” “그럼~! 나름 순기능이 있고말고! 소문이 걔네 둘 이어준 거 맞아. 네가 니콜라스한테 시계탑 앞에서 보자고 에바한테 말해 보라고 했거든.”

S가 뿌듯해하며 그녀의 말에 신이 나 대답했다.

“아, 물론 이젠 다른 사람 다리 놔 주는 건 그만하고 과제를 해야지. 하하.”

물론 신이 나서 뿌듯해 하는 것도 잠시였고, S는 금세 말없이 자신을 지켜보며 잠자코 있는 R의 눈치를 보았다. 여학생은 그런 둘이 모습을 재밌게 지켜보다가, 갑자기 다가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갑작스럽게 둘에게 작별인사를 건네었다.

“그래, 나도 이만 과제하러 가야 할 것 같아. 둘의 시간을 너무 빼앗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 대화 즐거웠어.”

바람이 살며시 머물다 가듯, 그들 옆에 바람처럼 다가왔던 여학생은 처음 다가왔던 것처럼 조용히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왔다 간 흔적이 남지 않도록 살며시. S가 조용히 떠나가려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났을 것이었다.

“아! 그런데 넌 누구야? 같은 마법학부 맞지? 같은 학년이던가?”

S의 말에 조용히 떠나려던 여학생의 행동이 멈칫했다. 여학생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내 이름이 궁금한 거니? 아님 내가 궁금한 거니?”

“같은 거 아냐?”

영문 모를 답변에 어리둥절해진 S가 생각도 하지 않고 불쑥 대답했다. 어린아이 같이 보채는 S의 시선에 그녀는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둘 다 같은 거라고? 음, 하긴 너는 유명하니까 내가 너에 대해 알고 있어도 너는 날 모를 수도 있겠구나. 같은 학년이라고 해도 학생들이 많으니까.”

말하는 그녀의 눈에 짓궂어 보이는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만났을 때도 보였던 눈빛이었다.

“그럼 내일 있는 ‘마법의 상용화’ 수업에 나오지 않을래? 너 이번에 ‘마법의 상용화’ 수업 수강하지 않았니?”

“너 내일 수업 있었냐?”

S와 그녀의 대화에 R이 끼어들며 작게 중얼거렸다. ‘없었던 거 같은데? 그동안 농땡이 피운 건 뭐지?’ 이렇게 중얼거리며 R은 S를 향해 눈초리를 세웠다. S는 점점 사태를 파악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R의 눈빛에 식은땀을 흘리며, 더 이상 그녀가 문제될만한 말을 하지 않길 바랐으나,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장난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수업에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모르는 거 같은데, 난 이번에 너랑 ‘마법의 상용화’ 수업을 같이 듣고 있어. 그리고 그 수업에서 나온 조별과제에서 너랑 같은 조가 된 참이야. 네가 수업에 잘 나오지 않는 거 같아서, 교수님께 말해서 조원을 바꿔달라고 할까 싶었는데, 아까 네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 다리 놔 주는 걸 그만하고 수업도 나오고, 과제도 한다면 딱히 조원을 바꿀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여전히 하늘은 푸르고, 하얀 조각구름은 한가로이 떠다니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과 기분 좋은 마음이 부는 ‘좋은 날’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딱 한 사람에게만 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