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연의 밤

피로연의 밤이 깊어간다.

아이전의 거칠고 투박한 노래와 까스띠예의 매끄럽고 정열적인 노래가 묘한 이중창을 이룬다. 피로연장 한 편에서는 용병들이 즉석에서 벌어진 팔씨름 대회를 벌이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거나하게 취한 하객 두 명이 맥주와 포도주 중 어느 것이 더 훌륭한 술인지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다. 오늘만큼은 모두가 전쟁을 잊은 채 흥겨운 시간을 즐기고 있다.

요제프는 더부룩한 배를 느끼며 벨트를 약간 풀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평소보다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떠들고, 더 많이 먹었다. 이제는 쉴 때도 됐다고 생각하면서 피로연장 구석진 곳에 앉아 축하를 받는 신랑 신부를 바라보았다.

이렌느. 용병시절 초창기 시절, 어찌 어찌해서 같이 다니게 된 꼬맹이 소녀가 이제는 완연한 여성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게 되었다. 먼저 결혼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노총각 대장님. 이라고 놀리는 그녀를 펜저핸드(Panzerhand)로 쥐어박을까 생각도 했지만 오늘의 주인공 대접을 해 주느라 참았다.

아르미체. 요제프는 새 신랑을 보면서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기쁨과 망설임이 교차하는 저 얼굴. 아직 무언가를 다 털어내지 못한 얼굴이다. 옛 여자라도 떠올리는 건가, 바람둥이 녀석.

요제프는 이전에 아마릴리스가 왔을 때, 그녀를 본 아르미체의 눈빛이 약간 흔들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뭐, 아마릴리스에게는 구혼자가 한 중대만큼 붙어있었다고 하니 저 친구도 그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도 잊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거슬려.

최근 들어 아르미체의 얼굴을 보면서 점점 더 느끼는 감정. 처음에는 질투심이라고 생각했다. 화려한 외모에 뛰어난 집안, 교양과 학식 등등등. 하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전장에서 그런 것들이 자신에게 별 필요가 없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안 사실이다. 지금은 오히려 저들이 자신의 도움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사항이다.

그렇다면 아마릴리스에 대한 눈빛 때문에?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결혼식 당일 행복에 가득 찬 이렌느의 모습을 본 순간 그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렌느는 젊고, 눈부시게 아름답고, 온 마음을 기울여 아르미체를 사랑한다. 요제프가 본 아르미체는 자신을 사랑하는 이를 외면할 만큼 냉혈한도, 목석도 아니었다. 분명히 이렌느는 아르미체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고, 저 둘은 좋은 부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마음 속의 불편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가- 요제프는 그 감정의 정체를 알기 위해 사색에 빠져들었다.



열 아홉 살의 요제프는 호숫가 수풀 속에서 낮게 엎드린 채 길 저편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옆에 있는 것은 손수 깎아 만든 나무창. 마음만 같았다면 총을 샀었겠지만 전쟁난민 출신인 그가 그럴 돈을 구할 리는 만무하였다. 하지만 괜찮아. 오늘을 위해서 수없이 연습했다. 요제프는 입술을 악물며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일어나, 달려서, 목을 찌른다.”

용병들의 창 쓰는 방법을 멀리서 몰래 훔쳐보고,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그 모습을 모방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능욕당하고 죽어간 여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원수는 전쟁에서 승승장구하여, 얼마 있으면 대영주의 성에 불려간다고 들었다. 복수를 할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그가 방심한 채로 집으로 돌아가는 이 길에서 모든 것을 끝장낼 테다.

저 멀리 달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갑주가 보였다. 요제프는 창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저 놈이 입은 갑옷은 총알도 튕겨낸다는 드라첸아이전 갑옷이라 한다. 그러니 일격필살로 목을 노려야 한다.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밤이다. 기사의 흰 얼굴, 그리고 미처 갑주에 숨기지 못한 그의 목이 보인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 말을 타고 있는 어린아이도.

요제프는 이를 갈았다. 비겁하게 어린아이를 방패로 내세우기냐. 물론 그럴리가 없다는 것을 요제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분명 저 놈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다고 들었다. 한 때는 그 아이를 유괴해 볼까 생각도 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저 원수 한 명에게 국한된 일이었으니까.

원수의 목덜미가 점점 작아지고, 아이의 몸이 터무니없이 거대하게 보였다. 말은 점점 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다음 기회는 없다.”

정신만 차리면 된다. 백 보 바깥에서 아이 머리 위에 얹인 사과를 화살로 명중시킨 궁수도 있다고 했는데, 그 것보다는 쉽지 않는가. 요제프는 심호흡을 깊게 들이쉬고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아이를 애써 눈 앞에서 지우면서 표적만을 바라보았다.

다그닥, 다그닥. 놈이 가까이 왔다.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요한나, 죽은 여동생의 이름을 입 안에서 뇌까리며, 요제프는 벼락같이 뛰쳐나와 창을 찔렀다.

요제프의 창은 아이의 몸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아이를 꿰뚫고 갑옷을 강타하는 강렬한 충격에 기사가 말에서 떨어졌다.



“으으으……”

말에서 떨어진 기사가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몸에는 생채기 하나 입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기사가 몸을 굴려 일어났다. 그다지 충격을 입지 않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얼굴에는 분노와 고통이 가득했다.

“마르틴!!!!”

실패다. 요제프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도망가? 어쩌면 도망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원수를 갚기는 커녕 레기온까지 쫓아올 불구대천의 추격자를 뒤에 달게 되겠지.

쓰러진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요제프의 가슴 속에 무언가가 치밀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아이는 잊어라.

“네 놈은 누구냐!!!”

기사가 칼을 뽑았다. 그의 눈은 요제프와 피흘리며 죽어가는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결국 여기서 싸울 수 밖에 없다. 드라첸아이전 갑옷을 입은, 전투의 달인인 저 기사와.

“으아아!!”

기사의 칼이 요제프를 일도양단하겠다는 듯 일직선으로 내리쳐왔다. 요제프는 황급히 창자루로 칼을 받았다. 우직. 단 일격에 창이 두 동강이 났다.

요제프는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정면으로 싸우는 건 자살행위이다.

“네 놈이 감히 마르틴을!”

기사는 분노의 고함을 지르며 요제프에게 달려들었다. 요제프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다 볼썽사납게 뒤로 넘어지고, 반사적으로 옆으로 몸을 굴렸다. 간발의 차이로 기사의 검이 바닥을 후려쳤다.

요제프는 재빨리 일어나 부러진 창을 움켜잡았다. 기사의 눈이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왜 나와 내 아들을 노린 거지?”

생각해라. 아직 포기할 수 없다.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쿵쿵뛰는 가슴과는 반대로 요제프의 머리는 냉철하게 돌아갔다.

“대답에 따라 쉽게 죽여줄 수도 있고, 사지를 잘라 호수에 던져버릴 수도 있다.”

호수라, 요제프는 문득 한 가지 작전을 떠올렸다. 그냥 죽는 것 보다는 낫겠지. 요제프의 입이 열렸다.

“젠장. 원수를 눈 앞에 두고 이렇게 실패하다니…”

“원수?”

저 자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켜라. 저 자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말아라.

스무 걸음……

“3년 전의 일이 기억 안나나? 그 날, 네 놈은 구걸을 하던 소녀를 욕보이고, 죽였지.”

요제프는 조금씩 뒷걸음칠 치면서 흘낏 기사의 눈치를 보았다. 기사는 요제프가 뒷걸음질 칠 때마다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열 다섯 걸음……

“네 놈은 혹시…”

열 걸음…..

“이제 기억 나나?”

기사의 얼굴이 당혹감과 수치심으로 일그러졌다.

“그래. 내가 그 옆에 있던 소년이었다. 어떻게 되다보니 이 질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지.”

“……”

기사의 발이 멈추었다.

안 돼. 좀 더 다가와. 요제프는 다시 열을 올리며 기사를 힐난했다.

“네 놈이 우리 떠돌이들을 인간취급하지 않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심심풀이로 우리를 죽이고, 강간하니까 기분이 좋았지?”

”…네 놈.”

“덕분에 나도 재미있는 걸 배웠다.”

요제프는 과장된 어조로 키득키득 웃었다.

“확실히 저 아이를 푸욱- 찌르니까 짜릿하더라. 저 것 좀 봐. 피를 흘리면서 꿈틀꿈틀하는 게 마치 벌레 같지 않아?”

기사가 다시 분노의 함성을 지르면서 칼을 휘둘렀다. 요제프는 부러진 한 쪽 창자루를 내던지고, 나머지 부분을 칼처럼 잡아 상대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받아냈다.

얼마 안가 요제프의 몸이 피투성이가 되기 시작했다. 어깨죽지와 허벅지에는 깊은 상처가 생겼다. 요제프는 신음을 삼키고, 연신 뒷걸음질을 치면서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네놈의 소중한 것을 빼앗으니까 기분이 최고야. 하지만 좀 아쉬운걸. 원래 네 놈을 쓰러뜨린 다음 그 때와 똑같이 네 놈 눈 앞에서 아들녀석을 덮치려고 했는데. 난 남자도 가리지 않거든?”

계속 흥분해라.

“닥쳐!”

요제프는 거의 주저앉듯이 상반신을 숙였다. 그의 머리 위로 무자비한 검풍이 스치고 지나가고…

한 걸음.

“죽여 버리겠다!”

기적적으로 기사의 공격을 피하고는, 요제프는 기사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요제프의 뒤에는 가파른 비탈이 있었고, 비탈 밑에는 검푸른 호수가 입을 벌린채 둘을 환영하고 있었다. 기사는 그제서야 요제프의 속셈을 깨달았지만 너무 늦었다. 둘은 서로 엉켜 비탈길을 구르기 시작했다.

“죽을 놈은 네 놈이다!”

풍덩. 둘의 몸이 호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요제프는 차가운 물의 감촉을 느끼며 수면 위로 얼굴을 들이내밀었다.

기사가 옆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요제프는 한 모금 숨을 들이쉬고 기사에게 달라붙었다.

…비록 칼솜씨는 네 놈보다 못하지만,

기사가 몸부림을 치면서 호수 바깥으로 나가려 했지만, 요제프는 악착같이 그를 붙잡고 더 깊은 심연으로 끌어당겼다. 쉬운 일이었다. 드라첸아이전은 무척 무거운 물건이었으니까 갑옷을 입은 기사가 헤엄을 잘 칠리는 만무할테니까.

네 놈을 죽일 수 있는 무기는 가지고 있지.

기사는 칼을 휘두르면서 요제프를 떼어놓으려 했으나 물 속에서는 쉽지 않았다. 기사의 다른 한 손이 연신 요제프의 얼굴을 후려쳤다.

물, 네 놈의 무게, 한 모금 숨의 차이.

요제프는 정신이 아늑해지는 것을 참아가며 기사의 몸에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기사의 얼굴이 파리해지면서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몸부림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요제프의 폐가 산소를 요구하며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을 때, 마침내 기사의 몸이 축 늘어졌다. 요제프는 죽을 힘을 다해 수면으로 헤엄쳐갔다. 한계에 이르기 직전 간신히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 수 있었다.

그의 밑에서 기사는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누구세요?”

아이의 마지막 말. 분노도 증오도 아닌,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한 채 죽어간 아이의 질문이었다.

아름다운 아이였다. 아까, 마르틴이라고 불렸던가? 분명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아이였을테지.

요제프는 마르틴의 눈을 감겨주었다.



문득, 요제프는 아르미체의 얼굴이 그 아이와 너무나도 닯았다고 느꼈다.

분명히 그 아이가 컸다면,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으리라.

댓글

오승한, %2008/%10/%23 %00:%Oct:

본 이야기와는 상관이 없지만, 요제프의 과거를 한 번 그려보고 싶었어요.

 
로키, %2008/%10/%23 %11:%Oct:

오우, 절박한 싸움의 긴박감이 잘 살아있군. 요제프 머리쓰는 것도 기발하고, 감정 표현도 좋아. 드라켄아이젠 자체는 무겁지 않은 걸로 알고 있지만 (가벼운 게 장점 중 하나), 움직임이 불편하고 물이 차니 물에 빠지면 끝장이었을 듯.

 
오승한, %2008/%10/%23 %13:%Oct:

감사감사 :) 그나저나, 드라켄아이젠은 미스릴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