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데타(Vendetta)

요제프는 반쯤 타버린 저택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상자들을 모아둔 저택 옆 천막에서는 신음과 비명, 흐느낌과 통곡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요제프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가가, 낯익은 시신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마리는 마법사에게 가장 먼저 죽었다고 한다. 같이 가자는 제안을 거절당한 성난 마법사가 아내에게 다가갔을 때, 마리는 그 앞을 용감하게 막았다가 불꽃의 창에 몸을 꿰뚫렸다고 한다. 요제프는 미처 감지 못한 그녀의 눈을 감겨주었다.

…세리의 시체는 무너진 기둥 밑에서 발견되었다. 그녀의 손에는 그을린 십자가가 쥐어져 있었다. 이제는 투덜거릴 때 내뱉던 정겨운 아이전 사투리도, 그 종알거리는 목소리도 들을 수 없으리라.

…그리고 이렌느.

“이렌느 아가씨는 마님을 지키기 위해 최후까지 노력하셨어요… 온 몸에 불이 붙으면서까지 그 마법사와 싸워서…”

이렌느가 날린 최후의 일격은 마법사를 심하게 상처입혔고, 마법사는 도망갈 수 밖에 없었다. 이렌느가 아니었다면 마님을 빼앗겼을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온통 숯검댕이가 된 예나는 울먹이면서 요제프에게 말했다.

불꽃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아낸 대가는 참혹했다. 이렌느의 시신은 심하게 타버려서 아예 형체를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렌느의 시신은 천막 한 켠에 비단 천으로 덮여있었다. 그 옆에는 유령처럼 생기를 잃어버린 아르미체가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요제프는 아르미체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렌느를 덮은 천을 펼치려 했다. 아르미체가 그를 붙잡았다.

“보지 마십시오.”

“봐야겠네.”

“그녀의 남편으로서, 부탁입니다. 이런 모습… 아마 이렌느 역시 당신께 보여드리고 싶지 않을 겁니다.”

“봐야겠네.”

저항할 수 없는 위엄과 분노를 마주하고는, 아르미체는 마지 못해 뒤로 물러섰다. 천을 펼친 그 곳에는 이미 사람이라고 보기 힘든, 흉측하게 뒤틀리고 녹아내린 뼈와 살과 숯이 뒤섞인 덩어리가 있었다. 요제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그것을 망막에 새겨놓기라도 하겠다듯이 오랫동안 응시했다.

와락, 아르미체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요제프는 아르미체를 굳게 포옹했다.

“이렌느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조차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을 걸세.”

”…데오스에게 맹세코, 그녀는 제 사랑하는 아내였습니다.”

“내 딸과 같은 아이였지.”

포옹을 풀고 요제프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아직 저택 안에 타다 남은 불씨가 있을 거라면서 말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였다.




화마가 휩쓴 저택 안은 온통 매캐한 냄새와 그을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요제프는 검게 타 버린 복도를 지나 아내의 서재로 들어갔다.

“오셨군요.”

아마릴리스는 마치 중벌을 기다리는 죄인인마냥 무릎을 꿇은 채로 창백한 얼굴로 서재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계속하여 떨리고 있었다.

“무사했군.”

”……예.”

“지나치게 무사해.”

”……”

불타던 저택에서 유일하게 무사했던 것은 그녀와 그녀의 서재 뿐. 그 격렬한 불꽃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그녀와 그녀가 아끼던 책들은 검정 티끌 하나 묻어있지 않았다.

“당신 잘못은 없소. 당신은 계약을 지킨 것 뿐이니까.”

”……”

“하지만 차라리…… 당신이 계약을 깨고 그 놈과 도망쳤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있소.”

“미안해요.”

“당신 잘못이 아니오.”

요제프는 몸을 돌려 서재에서 나왔다. 아마릴리스 역시 뒤따라 나왔다. 순백같이 희던 그녀의 드레스가 금새 검정 숯에 더럽혀졌으나, 그녀는 상관하지 않고 요제프를 뒤쫓았다.




요제프의 방은 저택 안에서 가장 심하게 타버린 장소였다. 반쯤 타다 남은 다른 장소와는 달리 요제프의 방은 레기온의 화염이 내려온 것 마냥 처참하게 불살라져 방 안에 성한 것을 남겨 놓지 않았다. 아직도 그 불꽃의 열기가 남았는지 방안의 온도는 후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불꽃도 사람을 가리는군.”

메마른 농담을 던지면서 요제프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마릴리스는 침묵을 지킨채 문저귀에 서서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그 때.

“조심해요!”

요제프가 방 한복판으로 들어서자마자, 방 한 구석에서 다시 불꽃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불꽃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면서 방안을 감싸기 시작했다.

“다가오지 마시오.”

요제프는 경악에 사로잡힌 아마릴리스를 뒤에 놔둔 채 잿덩어리가 된 옷장으로 다가갔다.

“20여년을 전장에서 살았고, 수많은 격전을 치뤘소. 어제의 고용주가 내일의 적이 되는 일은 허다했고, 저번 전투에서 등을 맡겼던 친우의 가슴에 칼을 꽂은 적도 있었소.”

요제프는 옷장의 손잡이를 잡았다. 우직. 타다 남은 옷장의 손잡이가 힘없이 떨어졌다. 불길이 날름날름 타오르면서 요제프의 주위를 맴돌았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돈만 받으면 싸우고, 죽였소. 그게 용병의 삶이오. 천국에 가는 건 포기해야겠지. 하지만!”

요제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불꽃은 아랑곳하지 않은채, 힘껏 옷장을 후려쳤다. 와지끈. 잿덩어리가 허물어졌다. 옷장 안에 있었던 수많은 연회복들 역시 검게 타 부스러져 있었다.

“단 하나. 용병으로서 한 평생 지킨 명예가 있소. 전장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검을 겨누지 말 것. 아무리 적이라도 말이지. 그것만큼은 내 가슴을 펴고 자랑할 수 있소.”

요제프는 잿더미를 헤치고 그 안에 파묻혀 있던 갑주를 꺼냈다. 지옥의 불꽃도 차마 범접하지 못한 용(龍)의 철, 드라첸아이전으로 만든 그의 투구와 갑옷은 한 치의 손상도 없이 늠름한 위용을 자랑하였다.

요제프는 갑옷에 묻은 그을음을 닦아냈다. 가슴에 새겨진 늑대 문장이 불꽃을 반사하여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일은 나와 당신, 그리고 그 자. 세 사람 간의 문제였소. 만일 그가 나에게 결투를 신청했다면 나는 언제든지 받아주려고 했소. 어찌보면 그 것은 그의 권리이기도 하니.”

”……”

“하지만 그는 내가 없는 틈을 타 당신을 빼앗아가려 했고, 그게 안 되자 무고한 전우들, 친구들, 나의 가족들을 죽였소.”

”……”

요제프는 불꽃을 짓밟고 방을 나섰다. 아마릴리스에게는 한 치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계약은 파기됐소. 당신은 이제 자유요. 나는 핏값을 받을 것이오.”

아마릴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요제프의 등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요제프가 갑주를 챙겨입고 저택 밖으로 나서자, 완전무장한 용병들이 대오를 갖춰 정렬한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인적인 일이다.”

“늑대는 형제자매의 원수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

요제프는 눈을 몇 번 깜박거리고, 군마에 올라탔다. 용병들은 신속히 행군 준비를 갖추었다.

“목표는 불꽃의 마법사다. 우리 앞 길을 막는 이들은 몽테뉴 군이든 까스띠예 군이든 모두 적으로 간주한다. 진군!”

“진군!”

“진군!”

늑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택이 다시금 불꽃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제 불을 끌 기력도 잃은 채 망연하게 그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

아르미체는 이렌느의 시신을 지키면서 무심한 표정으로 무너져 내리는 저택을 지켜보았다. 저 멀리 아마릴리스가 흐느끼는 모습이 눈 들어왔지만, 이제 그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녀는 살았고, 이렌느는 죽었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동안이나 이렌느의 시신 앞에서 떨어질 줄 몰랐던 그의 발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가야 할 곳. 이단심문회를 향해.

댓글

정석한, %2008/%10/%06 %16:%Oct:

아마릴리스가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기다리는 장면은 왠지 "나의 아마릴리스는 이렇지 않아!" 라고 해야 될 것 같습니다. […] 토큰 하나 겁니다.

 
오승한, %2008/%10/%06 %17:%Oct:

반격하겠어. 토큰 하나!

(이러면 토큰 내가 내야 하는지?)

 
정석한, %2008/%10/%06 %17:%Oct:

레이즈. 하나 받고 하나 더 […]

(룰에 대해서는 로키누나가 알아서 해주실 겁니다) [먼산]

 
오승한, %2008/%10/%06 %17:%Oct:

전화에서 이야기한대로 원칙적으로는 한 방.

2 정도는 재반박 할테니 더 내든지 포기하든지 선택하시오.

 
로키, %2008/%10/%06 %17:%Oct:

오.. 안으로 안으로 타들어가는 요제프의 분노가 아주 인상적이군. 마치 산처럼 꿈쩍없고 절대적인, 듬직한 모습이 말야. 참극의 결과도 표현이 잘 된 것 같아.

엘리아스가 왠만큼 미치지 않고서는 저 지경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에 대해서는 반박할 필요도 없이 다 방법이 있지..캬캬. 덕분에 꽤 재밌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음.

 
오승한, %2008/%10/%06 %17:%Oct:

"꿈이었어!" "그 자는 엘리아스가 아니었어!" 같은 것이면 용서 못해! (철썩철썩할 준비)

 
로키, %2008/%10/%06 %18:%Oct:

훗 후자 쪽이다..(..) 무엇보다 요제프는 직접 본 게 아니라는 거! 마침 까스띠예 서플먼트에 딱 맞는 녀석이 있는 김에 써먹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