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일행이 언덕을 넘으면서 알타미라 성벽이 눈앞에 가까워 왔다. 강과 언덕, 숲의 정경 위에 까마득히 펼쳐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빛나는 망루와 첨탑, 한가로이 지나가는 마차와 수레, 말의 조용한 활기 가운데서 기수들은 잠시 멈추었다. 성문 초소에서 일행의 우두머리가 잠시 일행의 용건을 알리고 서류를 받는 동안, 일행 뒤편의 젊은이는 그와 나란히 말머리를 몰던 처녀에게 몸을 돌렸다.

“가볼게. 말떼하고 따라잡고 란쵸 베하라노까지 가려면 계속 달려야…”

말하면서 그는 차마 그녀를 마주보지 못했다. 서글서글한 표정과 조용한 눈빛에 드러나는 수줍은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그 이상으로 마치 부끄러운 듯, 아니면 하기 어려운 말을 간신히 하듯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고, 그가 탄 덩치 큰 갈색 말과 그녀가 탄 은회색빛 암말만 풀을 뜯으며 간간히 히힝거렸다. 그가 머뭇거리다가 말머리를 돌리려는 순간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를 잡았다.

“엘리아스.”

그는 주춤주춤 돌아보았다. 그리고 햇살 속에 잔잔한 그녀의 웃음에 불안하던 얼굴이 한결 풀렸다. 그는 말을 몰아 그녀 곁으로 붙이며 낮게 말했다.

“미안하다… 이렇게 가는 게.”

“아냐. 날 생각해서 그러는 걸 아니까.”

마주보는 두 사람의 시선 속에는 몽테뉴군이 습격하고 란쵸 야녜스가 불타던 밤의 기억이 아로새겨 있었다. 불길에도 타지 않던 엘리아스의 모습을, 눈동자 속에 춤추던 불꽃을 아르미체가 본 그 밤. 그리고 그 악몽 같던 밤 이후에 오고간 말들의 기억도 함께.

'알타미라로 돌아가 있어, 아마릴리스. 베하라노에서 주문한 말떼가 있으니까 난 말을 몰고 란쵸 베하라노로 간다. 혹시라도… 내가 붙잡힌다면 네가 내 곁에 있으면 안 돼. 나하고는 아무 상관 없어야 하는 거야, 알았지?'

'왜 가야 하는데! 아르미체씨가 우리를 배신할 리 없어. 제발, 엘리아스-'

'제기랄, 그가 사제인 걸 몰라? 나같은 사람 잡아다 고문해서 죽이는 놈들하고 한통속이라고!'

'그렇지 않아!'

'잘 알잖아, 아마릴리스. 그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눈치를 채이면 어떻게 되는지. 이단심문관들이 문책하기 시작하면..'

'알아… 잘 아는데… 그렇지만…!'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 그녀를 그는 꼭 안아주었었고, 머리카락에 연신 입맞추며 미안하다고 속삭였었다. 당신 말대로 아르미체가 우리를 배신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저 상황이 어떤지, 혹시 추적자가 없는지 살펴보고 확실해지면 당신을 찾으러 알타미라로 돌아가겠다고. 그렇게 한없이 불안한 어둠 속에서 서로 붙들고 비탄과 위안을 주고받은 밤의 기억은 환하고 한가로운 오후에도 생생했다.

“다녀와.”

아마릴리스는 그에게 미소지었지만, 말을 이으면서 목소리가 떨렸다.

“부디.. 무사히..”

그가 손을 뻗자 아마릴리스는 마주잡았다. 크고 투박한 그의 갈색 손과 섬세하고 가느다란 그녀의 손가락이 얽힌 위에는 강바람이 시원하게 지나가며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흩날렸다.

“맹세코 너에게 돌아올게, 아마릴리스.”

햇살이 쏟아지는 한가운데, 푸른 언덕 위로 울리는 새울음 속에서 엘리아스는 아마릴리스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때가 되면 평생을 함께하자. 미 브리요, 미 베르다드, 이 미 아모르.1)

그는 미세하게 떨리는 아마릴리스의 손 위로 몸을 숙여 입맞추고 아쉽게 손을 풀며 말머리를 돌렸다. 얽힌 손가락이 스르르 풀리면서 아마릴리스의 손은 툭 떨어졌고, 그녀는 언덕을 내려가는 그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가다가 그가 몸을 돌리며 모자를 벗어 흔들자 그녀는 손을 들어 한 번 흔들어 주었다.

“아가씨.”

하인이 다가와 은빛 암말의 고삐를 끌었다.

“가시지요.”

“예.”

그녀는 하인이 이끄는 대로 말머리를 돌려 알타미라의 성문으로 향했다. 들어서기 전에 한 번 돌아보았지만 엘리아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넓은 들판과 언덕, 굽이치며 반짝이는 강, 그리고 아득하도록 넓은 하늘뿐. 아마릴리스는 말을 몰아 성문에 들어섰고, 곧 그녀의 일행과 함께 알타미라의 인파 사이에 섞여들었다.

1) Mi brillo, mi verdad, y mi amor: 나의 밝음, 나의 진실, 그리고 내 사랑이여.

댓글

오승한, %2008/%09/%29 %19:%Sep:

안타까운 러브스토리! 하지만 이 둘의 사랑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하(게 만들)리!

 
로키, %2008/%09/%29 %20:%Sep:

과연 어찌 될 것인가!

 
orches, %2008/%09/%29 %19:%Sep:

안타까운 러브스토리군요 ;ㅅ; 근데.. 저 당시의 아르미체가 사제 서품을 받은 것은 맞지만요. 이단심문관이 되는 건, 리스냥 결혼 후로 생각하고 있습.. [썰린]

- 토큰 1 걸겠사와요

 
로키, %2008/%09/%29 %20:%Sep:

아, 그랬군요. (첫 반박이다!) 란쵸 야녜스가 불탄 게 계기라고 해서 이때쯤이면 괜찮지 않나 했는데, 시간이 좀 급박하긴 하네요. 그렇다면 이 시점에는 아직 이단심문관은 아니지만, 아르미체가 이단심문관하고 친해서 불안하다는 쪽으로 고쳐볼까요?

덧: 그리고 생각하시는 아르미체 설정하고 훨씬 안 어울리는 건 승한군 글인 듯도! (고자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