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후안

“단 하나. 용병으로서 한 평생 지킨 명예가 있소. 전장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검을 겨누지 말 것. 아무리 적이라도 말이지. 그것만큼은 내 가슴을 펴고 자랑할 수 있소.”
— 요제프 베버



도시 가운데, 주변에 상점과 집이 둘러선 광장은 사람이 많이 모였는데도 기묘하게 조용했다.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광장에 몰려선 시민들은 겁에 질려 무장한 병사들의 눈치를 보았고, 몽테뉴의 태양 제복을 입은 병사들은 민간인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총을 겨누고 주변에 삼엄하게 포진한 채 침묵했다. 광장을 두른 병사들과 따로 선 무장 부대는 제복이 달랐다. 검은 제복에 소맷자락에는 늑대머리 문양이 눈에 띄는 그들은 멀리 행군하려는 듯 말과 장비, 행장을 갖추었다. 그런 그들 앞에 몽테뉴 장교와 병사 몇이 가로막듯 마주서 있었다.

“어디로 가시오, 베버 대장?”

장군 계급장을 단 우아한 중년 사내의 목소리는 불안한 침묵 속에 크게 울렸다. 매끄러운 몽테뉴 억양은 자신감 넘치고 세련된 목소리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계약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 텐데.”

“밤의 늑대는 이런 싸움을 하지 않소.”

늑대를 단 검은 제복의 집단 필두에 선, 검은 갑옷을 입은 남자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묵묵한 눈빛이 순간 광장에 향했다가 장군의 눈을 마주쳤다.

“남은 계약금은 이미 장군의 집무실에 배달했소. 정 막으려면 막으시오.”

몽테뉴 장군은 직업 군인답게 주변을 찰나에 살피고 상황을 파악했다. 그의 병력은 밤의 늑대들의 네 배에 달했지만, 생명의 위협에 마주한 민간인들과 그들을 몰아넣고 대치하는 병사들의 무자비한 균형은 또 다른 적을 만들지 않고도 충분히 위태로웠다. 장군의 눈은 베버와 밤의 늑대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 훑고, 그들을 묵살했다.

“그렇다면 가보도록 하시오. 다음번에 일자리를 알아볼 때 내 추천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

희미하게 웃음지으며 우아하게 손짓해 그들을 물리고 몽테뉴인은 늑대들을 지나 말을 몰았다. 광장에서는 이제 가축처럼 몰아넣은 남자와 여자들, 노인과 아이들의 불안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까스띠예어 욕설과 애원, 노호가 도시 위의 맑은 하늘에 울렸다.

“가자.”

몽테뉴 장군과 등뒤의 광장을 돌아보지 않은 채 베버는 말에 올랐다. 그가 말에 박차를 가하자 말발굽과 군화발, 무기와 마구가 울리는 금속음을 내며 늑대들은 그의 뒤를 따랐다.

“대장-”

베버의 뒤에 말을 달리는 청년이 아이젠어로 말을 꺼냈지만, 옆의 여자가 그의 팔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저었다. 청년은 멀어져가는 광장을 돌아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 말을 달렸다.



“어째서 막지 않은 겁니까!”

도시를 뒤로 하고 행군하는 소음 위로 청년은 언성을 높였다.

“아무리 우리가 용병이지만 이건 아니잖아요. 몽테뉴놈들이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할지는 뻔한데-”

“계약 중인 고용주와 전투를 벌이자고 말하는 거야, 필립?”

그와 나란히 말을 달리는 붉은머리 여자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냉정했다.

“네 배가 넘는 몽테뉴군과 싸워서 이 외국 땅에서 죽자고?”

“그건 아니지만 이렌느 누님…!”

“대장님은 그 명령을 내리실 수가 없는 거다, 필립. 우리는 용병이지, 옛날이야기 속의 용사가 아냐.”

필립이 착잡한 표정으로 고삐를 쥔 손을 내려다보는 동안 이렌느는 그들의 한참 앞에 말을 달리는 베버의 모습을 응시했다.

“대장님은 우리의 대장이시니까.”

고개 하나를 넘은 후에 베버는 잠시 말고삐를 당겨 부하들이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말 없이 조용한 부하들이 그의 앞에 모이자 그는 태산처럼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전쟁 중 나는 이제 몽테뉴와는 계약하지 않겠다.”

그는 고개를 들며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프란츠.”

“예, 대장!”

등에 총을 멘 남자가 대열 앞으로 나섰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까스띠예 군영은 어디인가?”

“산 도밍고입니다, 대장. 동쪽으로 이틀 행군 거리입니다.”

베버가 고개를 끄덕이자 드라켄아이젠이 태양의 광채를 어둑하게 반사했다.

“지금부터 산 도밍고로 간다. 최대한 속도를 내서 몽테뉴 점령지를 벗어난다.”

동쪽으로 말머리를 돌리고 행군을 재개한 후에 필립은 이렌느에게 물었다.

“이제는 우리가 몽테뉴 놈들 표적인 거군요, 누님?”

이렌느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래.”

“뭐, 것도 나쁘지 않지요.”

필립은 어깨를 으쓱했다.

“까스띠예놈들은 또 어떤지 구경이나 해봅시다.”

능선을 따라 이동하고 있는데 용병 몇몇이 돌아보며 산 후안 방향을 가리켰다. 그들은 전쟁이라면 이골이 난 용병이었지만, 이 거리에서도 도시에서 선명히 오르는 불길과 연기에, 그리고 바람을 타고 간간히 들려오는 절규에는 잠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선두의 베버 대장만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표정없이 굳게 다문 입 뒤로는 이를 악문 채 그는 동으로 동으로 말을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