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한가로운 아침에 창문으로는 환하지만 뜨겁지는 않은 햇살이 비쳐든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던 젊은 여자는 정중한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들어오세요.”

사제복을 입은 준수한 젊은이가 접대실에 들어서자 그녀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일어난다.

“오랜만이에요, 아르미체.”

“안녕하셨습니까, 아마릴리스.”

사제—아르미체—는 아마릴리스가 내민 손에 허리숙여 입맞춘다. 눈가에 어린 슬픔과 피로의 기색에도 불구하고 아마릴리스는 반가이 아르미체에게 자리를 권하고, 문간에 기웃거리던 하녀에게 음료를 내올 것을 지시한다.

두 사람은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는다. 자리에 앉는 그의 움직임이 다소 어색하고 얼굴에 순간 고통의 기색이 스쳐가는 것을 그녀의 고요한 눈은 놓치지 않는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르미체는 진심어린 걱정을 담아 묻는다.

“그때 다치신 이후로 처음 뵙습니다.”

“당신은 피해버리지 않는군요.”

아마릴리스의 미소는 슬프지만 밝다.

“관심 고마워요… 이제 많이 나아졌답니다.”

하녀가 음료를 내어오자 두 사람은 감사를 표하고, 차의 향과 맛에 대해 몇 마디 하다가 잠잠해진다. 한 모금 마신 찻잔을 내려놓고 잠시 젓던 아마릴리스는 아르미체의 안색을 살핀다.

“아르미체야말로 괜찮았나요? 다쳤다고 들었는데…”

“아아, 별일은 아닙니다. 전투가 있었습니다. 데우스의 품으로 간 형제들도 있는데, 저는 운이 좋았지요.”

아르미체는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입을 다문다. 아마릴리스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를 본다.

“얘기 들었어요. 도밍고 사제님, 에밀리오 사제님들이…”

사제는 고통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린다. 입을 악물자 잠시 턱선이 부르르 떨린다.

“아르미체… 괜찮아요?”

그녀가 근심스럽게 손을 잡자 아르미체는 순간 흠칫했다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입을 연다.

“그런 식으로… 종부성사를 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그렇게 끔찍한… 어떻게 그가…”

그는 퍼뜩 말을 멈춘다. 아마릴리스는 조용히 묻는다.

“그가?”

“그들이… 로스 바고스가 말입니다.”

아르미체는 손을 빼면서 테이블 위로 두 손을 맞잡는다. 손의 가벼운 떨림에 찻잔이 찰칵거린다.

“교회에 도전하는 그들의 이단적 행태에도 정당성은 있다 하나… 그것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복수였습니다.”

“두 분은… 화상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아마릴리스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산 채로 불타셨죠.”

대답하는 아르미체의 목이 메인다.

잠시 방안에는 침묵이 감돈다. 그러다가 뒷마당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아마릴리스는 일어나서 창가로 간다.

“무슨 일입니까?”

불편하게 일어나려는 아르미체를 향해 아마릴리스는 손을 저어 보인다.

“앉아 계세요. 브리사를 데리러 사람들이 왔어요.”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르미체는 일어서서 역시 창가에 선다. 마굿간지기들이 날씬한 은회색 암말을 끌어내는 모습에 그는 작게 한숨을 쉰다.

“그래도 미겔을 보냈군요. 란초 야녜스 거의 최고의 말몰이니까 가는 길에 브리사를 잘 돌봐줄 겁니다.”

“거의…”

아마릴리스는 창밖의 암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린다. 어떤 생각, 혹은 기억에 빠진 눈으로.

“그렇겠지요. 저 아이는 란초 야녜스의 자랑이니까요.”

창 밑으로 지나가던 브리사는 갑자기 몸부림을 친다. 마굿간지기가 고삐를 끄는 동안 란초 야녜스에서 온 말몰이가 말을 진정시키려고 애쓰고, 암말이 히힝거리는 소리가 아르미체와 아마릴리스가 있는 곳까지 들려온다.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며 눈을 하얗게 굴리는 말의 시선은 분명 두 사람이 선 창가에 향해 있다.

“괜찮아, 괜찮아.”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입술을 거의 창에 갖다댄 아마릴리스는 마치 브리사가 곁에 있는 것처럼 부드럽게 속삭인다.

“집으로 가는 거야. 넓은 초장과 더 넓은 하늘, 거침없는 바람. 착하지, 가서 행복하게 지내렴 우리 이쁜이. 나의 바람, 나의 자유, 내 사랑.”

창밖에서는 미겔이 마치 아마릴리스를 따라하듯 브리사의 귓가에 속삭이며 고삐를 끌고, 브리사는 고개를 신경질적으로 저으면서도 결국 따라간다. 아마릴리스가 선 창가를 몇 번이나 돌아보며. 아마릴리스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염없이 지켜본다. 말발굽소리가 사라져가자 그녀는 창에 이마를 기댄다.

“아마릴리스…”

조심스럽고 따뜻하게 부르는 아르미체를 쳐다보지 않고 아마릴리스는 묻는다.

“엘리아스가… 그곳에 있었죠?”

팽팽하게 긴장한 아르미체의 침묵은 어떤 대답보다 웅변적이다.

“그가 당신을 다치게 했나요, 아르미체?”

“보내주었다고 하는 것이 옳겠지요.”

아르미체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깝다.

“저는 쓰러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 그들이 죽어가는 동안, 저는…”

“알았어요.”

아마릴리스의 대답은 또렷하고, 눈빛은 흔들림이 없다. 아르미체는 진정하려고 애쓰며 인사한다.

“미안합니다, 아마릴리스. 가서 쉬어야 할 것 같군요.”

“살펴가세요. 이렌느에게 안부 전해주시길.”

그가 하녀의 안내를 받아 나가는 동안 아마릴리스는 창가에 그대로 서 있다. 오후를 향해 환해져가는 햇살이 무심히 아랫배에 손을 댄 그녀의 머리에, 옷에, 피부에 황금빛으로 물든다.


알바도 숙부님께,

평안하신지요? 저는 이제 몸을 회복하여 편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보내주신 약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 상태에 대해 써주신 마음에는 이루 감사를 표시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몸 못지않게 마음을 걱정해 주셨지만, 몸만큼이나 마음도 무사히 회복하고 있습니다. 집에 있는 예배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또 근처 산 마리아 성당에 성물을 바치면서 영혼의 위안을 얻고 있습니다.

동시에 예언자의 서를 떠올리며 그 진리의 말씀에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디오스의 뜻은 빛과 같으니, 진정 밝은 빛이라면 숨긴다 하더라도 지혜로운 눈에는 보이지 않을까요? 빛은 결국에는 드러나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앞으로도 점차 나아질 것이니 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아주세요. 빠른 시일 내에 또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숙모님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사랑하는 조카딸 아마릴리스 드림.


산 마리아 성당의 고요에는 어떤 거룩함이 있다. 밤에 그 숙연한 어둠을 밝히는 것은 수많은 기원의 마음과 사연을 담은 무수한 촛불뿐. 예배당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남자의 모습은 그 따스한 빛 속에 조용한 그림자가 된다. 성물 진열대에 다가간 남자는 촛불에 의지해 봉헌자의 이름을 눈으로 훑는다.

예배당이 빈 것을 확인한 남자는 재빨리 성물이 든 상자 하나에 손을 넣고 더듬는다. 손을 다시 뺐을 때에는 몇 겹 접은 종이쪽지를 쥐고 있다. 종이를 펴서 내용을 확인한 그는 예배당의 어둑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작은 탄식을 내뱉고는, 다시 접어 품에 고이 넣는다. 그는 나지막히 중얼거린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예배당 관리인이 들어와서 꺼진 초 몇 개를 켜고 완전히 타버린 초를 치우는 동안 남자는 걸음을 옮긴다. 관리인과 인사를 주고받은 그는 알타미라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성물 진열대 옆의 꺼진 초를 관리인이 켜자 그 빛은 반짝 되살아나면서 좀 전의 남자가 손을 넣었던 성물 상자 밑에 있는 이름, '아마릴리스 베버'를 비춘다.


알타미라의, 그리고 까스띠예의 시민들이여!

우리 중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언자의 말씀을 모르는 이가 있는가?

그리고 우리 중 세계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곧 데우스의 뜻에 접근하는 길이라는 것을, 그분은 모든 진실을 밝게 비추시는 빛이시라는 것을 의심하는 이가 있는가?

그 빛 속에서 똑바로 보라, 데우스의 뜻에 거역하고 그분의 빛을 가리려는 자들이 바로 이곳 까스띠예에서 활보하고 있음을!

이들은 데우스의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를 잡아가두고 죽이는 자들이다.

이들은 자유로운 생각과 문필, 학문을 가로막는 두려움의 철퇴이다.

이들은 사상의 자유를 가로막는 벽, 데우스의 빛을 보려는 눈을 감으라 하고 감지 않는 눈을 지져버리는 인두, 데우스의 하늘을 가리려는 치졸한 손바닥이다.

우리는 이들을 '이단심문회'라고 부른다.

형제 자매들이여, 언제까지나 이들이 엮은 두려움의 사슬에 얽매여 있을 것인가?

얼마나 더 많은 무고한 시민이 이단의 오명을 쓰고 비참하게 죽어가야 하는가?

언제까지나 저들이 국왕폐하를 쥐고 휘두르는 것을 지켜볼 것인가?

그러니 이 어두운 때에 우리는 언제나 기억하도록 하자. 저 거짓 사제들의 폭압이 데우스의 참된 길이 아니며, 데우스의 참된 길은 오히려 그분을 갈구하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할지니!

— 라 안또르차1)


“요즘 마님이 참 밝아지시지 않았니?”

바느질감 위로 고개를 숙이며 마리가 말했다. 안쪽 방에서는 아마릴리스의 나지막한 노래가 들려왔다.

“다행이야, 정말로.”

세리가 말했다.

“성당에 봉물을 바치기 시작하신 이후로 위안을 많이 얻으신 것 같아.”

“하지만 나리도 참 무심하시지, 좀 찾아오시면..”

예나가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꺼내자 마리와 세리가 앞다퉈 말을 막았다.

“얘, 너 경칠 소리 한다?”

“그런 얘기는 함부로 하는 게 아냐!”

그 순간 아마릴리스의 방문이 열렸고, 셋은 일제히 굳었다.

“예나?”

아마릴리스가 빙긋 웃으면서 손짓하자 예나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 예, 예, 마님?”

“성당에 심부름 좀 다녀올 수 있니? 내가 봉헌할 성물을 준비한 게 있는데…”

“예, 물론이죠!”

아마릴리스가 내미는 상자를 예나는 덥썩 받았다. 아마릴리스가 문을 닫자마자 마리와 세리는 숨죽인 웃음을 터뜨렸고, 예나는 그런 두 사람에게 메롱~ 혀를 내밀어보인 후 성당으로 갈 채비를 했다.


두려워야 할 것 같은데, 이제는 어쩐지 상관할 수조차 없어. 우리가 결혼했더라면 낳을 수 있었을 아이… 그 아이 대신이라도 괜찮았던 걸까. 행복하게, 평온하게 그렇게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 아이는 이제 없지. 등골에 싸아한 고통, 빨아도 빨아도 옷과 이불에 계속 얼룩지는 피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어.

그래서 신경쓸 수 없게 된 걸까. 날 세상에 묶는 끈이 그만큼 사라져버려서.

그래서 당신은 당신의 싸움을, 나는 이렇게 나의 싸움을 하는 거야. 그래, 어쩌면 대가는 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그리고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게 된 순간부터 다시 세상은 숨막히도록 아름다워. 당신의 품안에 있던 순간처럼. 나의 바람과 함께 호흡하며 달리던 때처럼.

우리가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왠지 난 알 수 있어. 당신의 싸움은 내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는 몸부림이라는 것을. 어떤 먼 길을 돌아가도, 어떤 가시밭길을 걸어도 우리들의 길은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고 싶어. 어쩌면 데우스의 광휘 속에서, 혹은 레기온의 불길 속에서라도.

언제 빼앗길지 몰라 위태롭기에 순간순간이 소중한 이 세상 속에서, 어디 있을지 모를 당신에게 나의 마음을 보내.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향해, 미 푸에고, 미 비다, 이 미 아모르,2) 엘리아스.


“라 안또르차…”

책상에 펼쳐진 전단지들을 보는 셀레스띠나의 눈빛은 차갑다. 점점 호응과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익명의 이단자.

“이 자를 찾아라, 어떻게 해서든.”

1) La Antorcha: 횃불
2) Mi fuego, mi vida, y mi amor: 나의 불길, 나의 생명, 그리고 나의 사랑이여

댓글

오승한, %2008/%10/%24 %17:%Oct:

날갯짓이라고 해서 아마릴리스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줄 알았어(…)

 
로키, %2008/%10/%24 %17:%Oct: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렇게까지는(..) 제목이 글하고 안 맞는 것 같아서 고쳐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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