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무덤 위에

—1년 전—

햇살이 쏟아지는 정원 위에는 나무 그림자가 시원하게 드리웠다. 따스한 바람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리는 그늘 속에 앉은 젊은 여자는 주변에 피어난 정갈한 꽃들과 같은 획으로 그려낸 듯 단정하고 조화로웠다. 여자의 무릎을 베고 길게 누운 사내의 모습 외에는 모든 것이 잘 어울렸다. 비올라와 장미의 고운 빛깔 사이에 가예고스의 산지에 자라는 거친 풀이 껑충 돋아난 듯, 가죽을 덧댄 초라한 옷을 입은 채 모자로 얼굴을 덮고 아가씨의 모슬린 치마폭에 긴 머리를 흩뜨린 모습은 다 완성한 그림에 거칠게 덧칠한 것 같은 이질감이 있었다.

가예고스 초원을 가로지르는 사나운 바람이 가지고 놀던 머리카락을 가느다란 손으로 만지며 아가씨는 가만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말은 까스띠예어였고 맑은 목소리에는 타오르는 태양과 격렬한 볼레로의 음악이 그대로 살아있었지만, 조용하고 정숙한 까스띠예 정원의 정경에는 다시 한 꺼풀 이질감이 씌웠다. 바위투성이 해안에 부서지는 포말과 길들여진 적 없는 녹색 숲, 걷잡을 수 없는 사랑과 슬픔의 선율이.

당신의 무덤 위에 누워1)
이대로 영원히 있으리라
그대 손을 잡았더면
결코 놓지 않을 텐데
나의 사과나무, 나의 밝음이여
이제는 우리 함께할 때
내게는 흙냄새가 나고
비바람에 지쳐가니…

“너무 우울한 곡 아닙니까, 도냐 아마릴리스?”

얼굴을 덮은 말몰이꾼 모자 밑으로 사내의 미소가 보였다.

“어디 노래에요?”

“이니스모어 민요라네요. 가예고스 민요하고도 비슷한 느낌이 들고, 엘리아스 당신이 좋아할 것 같았죠.”

“우울해 죽어버릴 것 같은 노래라니, 아주 좋습니다. 이런 노래를 들으면 내 생각이 난단 말이죠?”

“어머, 그게 감사인사에요?”

아마릴리스는 애인의 얼굴을 덮은 모자를 휙 빼앗았다. 엘리아스는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얼굴에 바로 내리자 눈을 질끈 감으며 손을 뻗었지만, 눈이 보이지 않은 채로는 모자를 되찾기는 역부족이었다. 아마릴리스는 웃으며 모자를 머리 위로 쳐들고 다른 손으로 초승달 제국 혈통이 매부리코와 높은 광대뼈에 드러나는 얼굴을 쓸어주었다.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가 엘리아스는 햇살 속에 웃는 그녀의 얼굴을 눈부시게 올려다보았다.

“미 만사노, 미 브리요.2)

그는 중얼거리며 손을 그녀가 든 모자가 아닌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칼에 가져가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 당신을 보면 눈이 부셔요…”

아마릴리스는 미소지으며 몸을 숙여 그에게 입맞추었다. 모자가 잊혀진 채 풀밭에 툭 떨어지는 동안 오후 햇살은 정원을 금빛으로 물들였고, 그 열기 속에 여름 정원은 숨막히도록 향기로웠다.

—4개월 전—

내가 방에 누워 잔다고
가족이 생각할 때에
나는 밤부터 아침까지
그대 머리맡에 누웠네

시트에 엉켜 침대에 누운 채 아르미체는 아내가 경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직도 낯선 여인, 조금씩 함께 깨달아가는 친밀감도 하루하루 새롭기만 한. 이국의 노래를 그가 한두 마디밖에 모르는 언어로 부르는 이렌느를 보며 그는 새삼 아내가 그에게 얼마나 낯선 사람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조금씩 그녀에게 이니스모어의 흔적들을 발견했다. 붉은 기가 도는 머리, 그 먼 땅의 숲과 들을 닮은 녹색 눈.

“무슨 일이죠?”

뚫어져라 보는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렌느는 빗을 내려놓으며 돌아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사무적이었지만, 동시에 의심의 여지 없는 따스한 애정을 담아서.

“노래가… 좋군요.”

아르미체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키기라도 한 듯 눈을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키르크에서 보낸 쾌락과 공허의 나날들은 다른 사람의 과거이기라도 한 듯, 이렌느 앞에서 그는 언제나 수줍고 숫기 없었다. 전혀 달랐으니까. 겉보기에 가장 친밀한 순간에마저 망각이라는 목표를 위해 철저하게 사무적으로 협력했던 키르크의 제니들과는 너무나.

몸을 주는 데는 익숙했지만, 마음을 열 생각이라도 한 것은 아마릴리스 이후 처음이었다. 낯선 육체들과 보낸 열락의 밤보다도 이 평온한 아침에 주고받는 일상의 대화가 그에게는 훨씬 위험하고 두려운 경험인 것을 두근거리는 심장은 깨닫고 있었다.

“선술집의 선원들에게 배운 노래에요. 좀 슬프지만 아름답더군요.”

준비를 마치고 일어선 이렌느는 그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마치 겁먹은 동물이 도망가지 않게 하려는 듯 천천히 몸을 숙여 그의 이마에 입맞추었다. 그리고 조금은 주저하는 그 부드러운 입술에서 아르미체는 그녀에게도 모든 것이 새롭다는 것을, 설레면서 두려워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안도감으로 다가온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반쯤 일어나 앉으면서 막 돌아서려는 이렌느를 당겨 입술에 길게 입맞추었다. 그에게 익숙한 열정의 놀이였지만 이제 더 이상 유희나 연기가 아닌, 불안하게 흔들리는 진심을 담은 도박으로.

긴 입맞춤 끝에 이렌느는 숨을 가쁘게 쉬며 물러났다. 맑은 녹색 눈이 햇살 속에 흔들리다가 그녀는 간신히 말했다.

“늦겠어요.”

자신이 방금 낸 용기가 채 믿어지지 않은 채 아르미체는 다리가 풀려서 침대에 주저앉았다.

“다녀와요.”

멍하니 침대에 앉아서 아르미체는 아내가 집 밖으로 나서는 소리를 들었다. 자신도 곧 나가야겠지. 두근거리는 심장이 조금만 진정되면. 이렌느가 이어서 부르는 노래가 맑은 아침 공기를 타고 울렸다.

걷잡을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을 담아 외치네
내 어려서 사랑한
소녀를 위한 슬픔을

—이틀 전—

“나는 알타미라로 간다.”

모닥불을 들여다보는 요제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마법사는 그곳으로 갔을 테니.”

그는 고개를 들어 이제 수가 한층 줄어버린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밤의 늑대들'의 대장이 아니다. 나는 그자와 대등하다. 복수를 구하는 미치광이이지.”

쓴웃음을 짓는 얼굴에 모닥불빛이 비추었다. 잠시 침묵 속에 불이 타닥거렸다.

“저도 알타미라로 가겠습니다.”

카를의 표정은 결연했다.

“제 스스로 하는 선택이니 못 따라오게 하려면 때려눕히고 가셔야 할 겁니다.”

“저도 역시…” “저도…”

남은 부하들이 하나같이 그를 따라가겠다는 말을 들은 후 요제프는 대답 없이 불을 들여다보며 한 번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아르미체에게 향하자 다시 주변은 조용해졌다. 아르미체는 그들을 쳐다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저도 알타미라로 갑니다. 심문회에 보고해야겠지요.”

모인 늑대들 사이에는 나지막한 한숨 같은 것이 지나갔다. 아르미체는 그들의 의문 혹은 불안에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돌리는 반지가 불빛에 밝게 반짝였다.

—현재—

“아르미체 형제…?”

알타미라의 이단심문회에 조용히 들어선 그의 모습을 보고 심문관들은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아내가 끔찍하게 죽기 이전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어떤 거역할 수 없는 위엄 때문일까.

“새로 들어온 포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낮았지만, 그 뒤에는 전에 없던 단단함이 있었다.

“제가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잠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 그러도록 하시오. 당신이 설득하면 신성모독에서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니.”

호세 신부는 간수에게 손짓해 아르미체를 안내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이 복도를 따라 사라져간 후 부하 이단심문관을 불러 낮게 말했다.

“셀레스띠나 심문관님을 오시라고 하게.”


사제와 수도사들은
나를 두렵게 보네
내 사랑, 죽은 당신을
여전히 사랑하는 나를

어두운 감방 복도를 따라 들려오는 익숙한 노래에 아르미체는 멈칫했다.

“사제님?”

돌아보는 간수에게 아르미체는 손짓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간수가 짤랑거리며 열쇠를 찾는 동안 아르미체는 아내가 부르던 노래의 선율을 따라 흘러드는 추억에 잠시 마음을 빼앗겼다. 손짓 하나, 향기 하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에게 남아있는 아내, 오래 전에 그를 파괴할 뻔했던 집착보다 한결 진실하고 지속적인 애정을 생각하며.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고 맹세했지만, 사실 죽음은 아무것도 끝내지 못했다. 그녀의 흔적이 그의 영혼에 남은 동안은.

비바람과 폭풍 속에
나 그대 은신처 되리
당신이 찬 무덤에 누웠는데
내 어찌 편히 잠들까

“들어가십시오, 사제님.”

반쯤 꿈을 꾸며 아르미체는 낮은 문간에 몸을 숙이며 들어섰다. 아내가 구하려다 죽은 여자와 대면하고자.


(엘리아스가 아마릴리스를 부르는 애칭은 글에서처럼 17세기 아일랜드 시에 곡을 붙인 I Am Stretched on Your Grave에서 따온 것입니다. 특히 아일랜드 가수 시네이드 오코너의 노래로 유명해졌죠. 그걸 번외편으로 쓰려고 하다가 이렌느가 이니스모어 혈통도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고 가사는 어찌 보면 아르미체에게 더 어울리는 것도 같아서 엮어보았습니다.)

2) Mi manzano, mi brillo: 나의 사과나무, 나의 밝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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