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합

“나와 함께 가요, 미 루스1).”

복도 한가운데, 화염에 휘감긴 형체를 아마릴리스는 겁에 질려서 바라보았다. 불꽃이 날름거리며 뱀처럼 감아올라가는 불기둥 한가운데서도 멀쩡하게 움직이는 사람은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었다. 큰 키, 불꽃의 움직임에 따라 날리는 긴 검은 머리가 언뜻언뜻 보일 뿐. 주변에는 저택 여기저기서 오르는 불꽃과 연기가 매캐했다. 불이 났을 때 그녀와 함께 나오던 식솔들도 공포에 질려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릴리스…”

화염 한가운데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는 우르렁거리는 불길의 울부짖음처럼 비인간적이었다. 화염기둥 한가운데의 사내는 한 발짝 다가서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물러났다. 그녀는 남편과 계약을 했고, 디오스 앞에서 맹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마릴리스!”

다시 말하는 목소리에는 이제 주변에 점점 높아가는 불길과 같은 분노가 묻어났다. 그를 둘러싼 화염들이 더욱 높아가면서 복도 천장에까지 불이 옮겨붙었다. 화염기둥이 다시 한 발짝 다가서자 아마릴리스는 움츠러들며 물러났다. 귓가에 심장박동이 쿵쾅거렸다.

“마님에게서 떨어져!”

조그마하고 용감한 마리. 자신 앞을 가로막는 하녀를 보며 아마릴리스는 비켜서게 하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마리의 몸이 잠시 정지하더니 천천히 무너져내렸다. 하녀의 몸을 꿰뚫고 등으로 나온 화염의 창을 아마릴리스는 이해하지 못한 채 지켜보았다.

”..엘리아스?”

그녀가 아주 작게 속삭이는 동안 불기둥에서 촉수처럼 뻗어나왔던 창은 다시 흐물흐물해지며 불꽃으로 화했다. 그리고 마리의 옷와 살을 태우기 시작했다.

'아아.. 마님..'

이미 시력이 사라져가는 눈으로 허공을 보며 마리가 중얼거리는 입모양이 주변에 터져나오는 공포와 분노의 혼란 사이로 보였다. 세리가 흐느껴 울며 기도하는 소리는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 순간 총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네 상대는 나다, 마법사.”

이렌느의 목소리는 총성만큼이나 또렷하고 선명하게 울렸다. 밖으로 통하는 복도 입구에는 불꽃을 뚫고 들어온 '늑대'들이 보였다. 새로 장전한 총을 옆의 부하에게 건네받은 이렌느는 다시 총을 겨누었다.

“모두 이쪽으로 피하십시오.”

마법사가 움직이자 다시 총성이 울렸고, 그는 멈칫했다. 집안 사람들은 서둘러 이렌느와 늑대들이 지키는 출구로 향했다. 멍하니 서있던 아마릴리스도 나이든 프란치스카의 손에 이끌려 출구로 향하는 순간, 그들 앞에 불의 벽이 확 솟아오르며 가로막았다.

아마릴리스는 심하게 기침하며 마법사를 돌아보았다. 쉴새없이 타는 불기둥 한가운데는 붉게 이글거리는 눈빛만 선명히 보였다. 불타는 창고에서 구출받았을 때 보았던 붉은 눈, 마법사의 표식. 하지만 지금은…

불의 너울 너머로 그림자가 움직인다 싶더니 이렌느가 불길 너머로 뛰어들어왔다.

“이렌느!”

그러는 동안에도 불길은 더 거세어지고 있었다. 이렌느는 콜록거리며 주변을 돌아보다가, 아마릴리스의 팔을 우악스럽게 붙잡아 그녀가 방금 나온 서재에 프란치스카와 함께 밀어넣었다.

“나오지 말아요!”

하는 명령과 함께 문은 쾅 닫혔다.

“안 돼요! 이렌느!!”

아마릴리스는 문을 열려고 했지만, 너무 뜨거워서 문고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렌느의 두터운 가죽 장갑과 달리 그녀가 손에 낀 얇은 실크 장갑은 순식간에 그을렸고, 손끝과 손바닥이 화상으로 화끈거렸다. 엘리아스는 그녀를 찾으러 왔다. 다른 사람이 휘말릴 이유는 없었다. 이미 마리가 저렇게 되었는데 어째서 또 다른 사람이..!

“아냐… 아냐…”

미쳐버린 세상 속에서 문 저편, 이렌느가 부하들에게 내리는 명령이, 총소리가, 그리고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불꽃의 탐욕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무력하게 문을 두 손으로 두드리고 흐느끼면서 아마릴리스는 저 밖에 있는 사람, 불기둥 한가운데서 레기온의 사자처럼 나타난 남자를 생각했다. 정말로 그녀의 엘리아스가 그녀를 잃고 절벽에 내몰려 살인마가 되어버렸다면 그녀가 한 계약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의 한 구석은 그를 따라가라고 외쳤었고, 영혼은 저 바깥세상의 자유를 그리며 새처럼 노래했었는데… 그런데도 의무감이 아닌 두려움에 그에게서 물러선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엘리아스에게 그녀는 언제나 수 브리요2)였으며, 그녀를 수 루스3)라고 부른 일은 한 번도 없었기에.


저택 울타리 밖에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그는 형체만 남은 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에 귀기울이고, 저택에 들락날락하는 병사들과 불길이 지나간 흔적을 관찰하며.

마법사의 불길은 너무나 강력해서 날아오는 총알이 녹을 정도였다고 했다. 아르미체의 아이젠인 처는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타버렸다고, 그리고 그자가 불길을 방어가 아닌 적에 집중하는 순간 마지막 일격으로 그에게 중상을 입힐 수 있었다고. 애꿎은 하녀들과 집안 식솔들이 죽고… 그는 이를 악물었다.

울리는 말발굽소리와 갑주 소리, 햇살에 번쩍이는 검은 무기와 더 검은 증오로 무장한 아이젠 용병들이 출격하는 모습을 그는 지켜보았다. 불길도 통하지 않는 저 저주스런 갑옷을 어둡게 빛내는 그들의 대장을 선두로 해서. 과연 저들이 마법사를 잡을 수 있을까.

다시 마당으로 눈을 돌리자 임시 천막에서 비틀비틀 걸어나오는 아르미체가 보였다.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 했던 모든 말에도 불구하고 다가가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은 것은 위선일까, 아니면 오랜 우정의 습관일까.

그리고 저 안 어디엔가는 아마릴리스도 있겠지. 가슴이 작게 찌르듯 아파왔지만, 지금 그녀를 찾아내 얘기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게다가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엘 로코.4)

그는 작게 중얼거리며 돌아서서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외딴 골목으로 향했다. 오후 그늘 속에서 그를 기다리던 말은 반갑게 콧김을 내뿜으며 꼬리를 들었다 떨구었다.

“가자, 발로르.”

발로르의 고삐를 나무에서 풀어준 그는 등자를 밟지 않고 한 달음에 뛰어 안장에 올랐다. 박차를 가하자 말은 골목에서 빠져나와 거리를 따라 경쾌하게 걸음을 옮겼다.

가면서 그는 아직 다른 집들 지붕 위로 보이는, 검게 탄 저택 지붕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 광경에 내심 만족감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젠놈의 코에 한 방 먹여준 엘 로코의 행동에.

그러나 사람을 죽인다면 그것은 그 아이젠 용병 자신이어야 했다. 그러려고 그 동안 집 주변을 정찰하고, 검술을 연습하고, 또 불길을 다루는 법을 배우려고 엘 로코를 찾아갔었던 것 아닌가. 그랬는데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그리고 크리스의 아내를… 불길이 끓어오르려는 것을 느끼며 그는 내면의 불을 억제하는 동시에 후드를 눈 위로 깊이 눌러썼다.

그자가 부상당했다면 지금이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불의 피'가 더 짙고, 검술도 더 뛰어난 그 미치광이를 죽이려면. 엘 로코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에 결과적으로 그 광인을 끌어들인 자신이 해야 하는 일, 그리고 어쩌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 희생자가 나기 전에.

엘리아스는 달리는 말에 다시 박차를 가했다. 마치 머뭇거리는 마음을 채찍질하듯.

1) mi luz:나의 빛
2) su brillo: 그의 밝음
3) su luz: 그의 빛
4) El Loco: 미치광이

댓글

오승한, %2008/%10/%06 %18:%Oct:

(철썩철썩철썩철썩)

 
로키, %2008/%10/%06 %20:%Oct:

(엥엥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