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치다

필립은 나뭇가지를 발로 차며 욕설을 내뱉었다. 쥐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이 마을에도 산 후안에 대한 소문이 퍼진 듯 했다. 대부분의 집이 비어었고, 아직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반응이 시큰둥했다. 난 당신들을 위해 싸우는 용병단의 일원이며 지금 우리 용병단은 다음 목적지까지 갈 때 필요한 물품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말했지만,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하긴, 필립 자신은 저들이 하는 말이 뭔지 알아들을 수 없었으니까. 그는 역시 여기 말 좀 할 줄 아는 동료랑 같이 올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도움이 될만한 걸 죄다 긁어모았다. 화약, 천, 밧줄, 총, 칼, 항아리, 농사기구 등등. 모은 물건의 절반 가까이 물에 젖거나 녹이 쓸어서 쓸모가 없었지만, 동료들에게 가져가면 어떻게든 활용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거의 멀쩡한 -게다가 건강하게 보이는 노새까지 달린- 마차를 발견했을 때, 그는 누구라도 좋으니 부둥켜안고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안에는 종류는 모르겠지만 어째든 술이 들어있는 병 4개, 과일 약간, 치즈 몇 조각, 거칠거칠한 빵, 말린 고기 여섯 덩어리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솥에다 넣고 뭉건하게 끓이면 그럭저럭 휼륭한 식사가 될 듯 싶었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나왔다.

마차에 모은 물건을 싣고 있는데,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잠시 하던 작업을 멈추었다. 마을사람? 아니면 부대를 잃어버리고 헤매는 몽테뉴 병사일까? 그는 침을 꼴깍 삼켰다. 운이 좋으면 장교일지도 모른다. 요제프 대장이나 이렌느 누님 같이 머리 좋은 몇 명은 얼마에 넘겨야 괜찮은지 잘 알겠지만, 어째든 좋아. 무사히 끌고 간다면 자신에게도 섭섭치 않게 댓가가 돌아올테니까. 필립은 기대감을 가지며 조심스럽게 수레 뒤의 수풀로 걸어가서 총을 들이댔다. 몽테뉴 병사였으면 하는 기대와 달리, 한 아이가 겁에 질린 채 주저앉아 있었다. 얼씨구? 게다가 아이는 언제 훔쳤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기 한 덩이까지 꼭 쥐고 있었다. 그는 뱁새 눈을 하며 꼬마를 바라보았다.

순간 총성이 울렸다. 볼이 시큰거렸다. 필립은 볼에 잠시 손을 대었다가 떼었다. 피가 살짝 나기는 하지만, 늑대가 되고 나서 겪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렌느 누님과 거의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사내가 자신을 향해 피스톨을 겨낭하고 있었다. 아이는 일어서서 사내에게로 달려갔다. 달려간 아이는 뭔가 말하면서 사내의 뒤로 쪼르르 숨었다. 빌어먹을 까스띠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 먹을 수 없다. 몇 번 자신을 가르키며 사내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걸 보면 그리 좋은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꼭 처음 마주쳤을 때의 대장과 닮았다고 필립은 생각했다. 옷 여기저기가 닳고 풀물과 흙물이 짙게 들었긴 했어도 상당히 고왔다. 옷 사이로 머리핀 같은 것이 반짝거렸다. 필립은 순간적으로 앞의 사내가 제니하우스에서 일하는 남창인가? 하고 생각했다. 나이 든 동료를 따라 몇 번 제니 하우스를 갔었고, 그들이 작은 나이프를 머리에 꽂거나 품에 품고 다니는 것을 종종 본 적이 있었기에. 필립은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곱상하기도 하고, 제니들처럼 던지는 나이프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한 남녀가 이야기 꽃을 피우며 복도를 걸었다. 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남자 쪽이었고, 여자는 듣는 쪽에 속했지만.

“야비하고 치사한 놈 같으니라구! 한스 형님이 손에 총이 들려있었다면 그 놈 얼굴을 확 날려버릴 수 있었다고 얼마나 아까워했다고요. 미쳐서 아무것도 생각 안하고 달려든다고 교회 측에서 그랬다며요. 거긴 대체 무슨 개뿔 뜯어먹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래요! 전 무엇보다 대장에게 혼날까봐 조마조마했다구요. 누님은 대장 밑에 오래 계셔서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전 대장이 절 바라본다는 상상만 해도 어휴. 그렇지요? 누님. 우와, 정신차려요. 이렌느 누님!”

이렌느는 반쯤 감긴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에게 보고를 마쳤으니 돌아가서 푹 쉬고 싶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피곤했다. 몇 명의 동료와 함께 20여일 넘게 '악한' 이라고 알려진 마법사를 추격했으나, 가예고스 근처에 와서 놓쳤던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교활하고 대담한 존재였다. 몇 번이나 그의 술수에 속아 넘어갈 뻔 했던가. 추격하면서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리면, 그녀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녀는 하품을 하며 옆을 슬며시 바라보았다. 어려서 그런지 피곤한 기색을 찾기 힘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필립은 미하엘에게 들었다며, 대장의 후원을 받게 되었더라는 한 까스띠에 인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영지가 몽테뉴에게 넘어가 개털이 되긴 했어도 귀족은 귀족인데다가 조만간 신부님이 될 것이라 순순히 후원자가 되었다느니. 근데 자기 생각으로는 대장이 어떤 위인인데 순순히 후원해주겠냐느니 등등의 이야기를 주륵 늘어놓았다. 이렌느는 그러냐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 순간 필립은 걸음을 멈췄다. 동료가 가르키는 방향을 따라 이렌느 역시 시선을 돌렸다. 대장이 누군가와 조용조용 뭔가 이야기를 나누며 반대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마주쳤을 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장갑을 툭하고 바닥에 떨어뜨렸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남자는 얼굴을 살짝 찌뿌리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정신이 확 깨는 듯 했다. 옆을 보니 동료 역시 인상을 푹 쓰고 있었다. 걸어가는 내내,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싶더니 예전에 자신이랑 대판 싸운 그 까스띠에 사내가 틀림없단다. 아니 자신은 주인 없는 마차인 줄 알았을 뿐이라며 그렇게 맞을 이유도 없었다고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줄줄 늘어놓았다.

댓글

로키, %2008/%10/%19 %20:%Oct:

이런 식으로 만난 거였군요! ㅋㅋ 망가지는 시절의 아르미체인가요?

 
orches, %2008/%10/%19 %21:%Oct:

아뇨, 서품 받기 직전입니다. 그렇긴 해도 망가진 시절의 잔재가 아직 남아있지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