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오늘도 세리는 일이 많았다고 투덜거려요. 1층 홀부터 응접실, 옥상까지를 혼자서 쓸고 닦아야 했거든요. 주인님은 급료를 넉넉하게 주시지만, 집에 사람을 많이 두는 걸 좋아하지 않으세요. 덕분에 우리는 늘 고되지요. 그래도 세리는 마리보다 나을거에요. 마리는 오전에 동쪽 방, 아니 이제는 서재…라고 하나요? 책을 많이 두는 방. 그 서재를 치우다가 책 한 권을 못쓰게 했어요. 주인님이 크게 화가 나셔서 난리를 치셨지요. 어쩌면 이번달 급료가 깎일지도 몰라요. 불쌍한 마리!

그래요. 그 동쪽 방이 모든 악의 근원이에요. 예전에는 손님들에게 내어드리는 방 중 하나였는데, 마님이 오신 다음부터 서재가 되었어요. 두꺼운 책들이 굉장히 많답니다. 그런데 그 책들이 묘한 것이, 글씨가 아니라 다른 이상한 꼬부랑 모양들로 가득해요. 제가 읽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매일 일기를 쓰고 있잖아요? 우리끼린 틀림없이 무언가 수상한 물건일거라고 이야기해요. 어쩌면 악마를 불러내기 위한 주문들일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저는 이 집에서 수 년간 일했지만 주인님이 책을 읽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단 한 차례도. 마님도 묘한 것이, 가끔 책을 가져다가 휙휙 넘겨 보다가 (제대로 읽지 않으시는게 분명해요!) 내려두신답니다. 그리고는 그 책은 다시는 손에 대는 일이 없어요. 어쩌면 상류 사회의 귀부인들을 흉내내고 싶으신 걸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가엾은 마님! 마님은 틀림없이 공부를 못 배워서 글을 읽지 못하시는 게 틀림없어요. 그러니 글씨도 써 있지 않은 이상한 책을 (세리는 마법서라고 소근거려요) 잔뜩 사오시는 거지요. 그러고보니 이 나라에는 아르… 뭐의 꽃인가 하는 부인이 그렇게 똑똑하고 교양이 있다고 소문이 났다고 예전에 주인님이 이렌느 님과 말씀하시는 걸 마리가 들은 적이 있대요. 제 생각에는 주인님이 그 아르 무슨 꽃? 그 부인에게 마음이 있으신 거에요. 그래서 마님이 그 부인을 흉내내려다 이런 가짜 책들을 사서 제대로 읽지도 않고 휙휙 넘기시는 거지요. 가엾은 마님.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보면, 누구라도 마님이 책 읽는 시늉만 내신다는 걸 아실 텐데. 가엾어라. 어디 파티에라도 나가셔서 그런 흉내를 내시는 날이 오면… 아아, 제 얼굴까지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마님은 파티는 커녕 한 번도 밖에 나가신 적이 없어요. 아름다운 분이신데도. 어쩌면 스스로가 교양이 없음이 부끄러운 걸지도 몰라요. 틀림없이 밖에 나가고 싶으실 거에요. 날씨가 좋은 날이면 이층의 테라스에서 저 멀리 남쪽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하시니까요. (세리는 악마를 불러오려고 살피는 거라고 하지만요) 그리고 때때로 한숨도 쉬시구요. 제 생각에 마님은 용기가 부족하신 것 같아요. 설령 글을 읽지 못하는 교양 없는 여자라 하더라도 마님처럼 곱고 기품있는 분이면 어느 파티에서나 환영받을 텐데. 그런데도 늘 울타리 밖만 바라보시고, 밖으로 나가려 하시지는 않으세요. 이상한 분이죠?

마님의 본가도 참 이상해요. 옆집 하녀들이 그러는데, 보통 귀부인들이 결혼을 하면 어릴때부터 시중을 들던 하녀 한둘 정도는 꼭 따라온다고 하던데, 마님은 하녀 한 명 데려오지 않으셨어요. 집이 가난해서 그런가보다 생각도 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좋은 옷이며, (가짜긴 하지만) 책들, 그리고 이런 저런 가구들을 들여오셨거든요. 그런 것을 보면 마님의 본가도 틀림없이 잘 사는 집일 텐데… 이상하죠? 그래서 세리는 마님이 악마를 불러내려다가 쫓겨나서 이 집에 오셨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도 마님은 저희들에게 잘 해주시고, 특히 저를 많이 귀여워하신답니다. 덕분에 제가 마님을 모시게 되어, 일이 많이 편해졌어요. (그리고 세리와 마리의 일이 늘어났지요.) 제가 낮에 일기장에 무언가를 쓰고 있는 걸 마님이 보신 다음날부터 그렇게 되었어요. 제 생각엔 저한테 글을 배우고 싶으신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귀족 부인이 하녀에게 글을 배우는 것이 체면이 안 나니까 말씀을 못 하시는 거겠지요. 그 대신 마님은 가끔씩 이상한 말씀을 하신답니다. 신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느냐는 둥, 아이전이 어떻다는 둥… 그럴 때마다 마님의 탁자에는 늘 같은 책이 놓여 있어요. 마님이 가진 몇 권 안 되는 진짜 책 중 하나지요. 호기심에 마님이 안 계실 때 한번 뒤적인 적이 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로 어려워요. 글을 아는 사람도 어려워하는 것을 글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을 테지요. 아마 책을 적당히 뒤적여서 알아볼 수 있는 단어가 나오면 그걸 가지고 화제를 삼으시는 것 같아요. 그런 엉터리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어서 “모르겠어요 마님.” 이라고 하면 한숨을 쉬십니다. 얼마전에 귀신이 들렸다 나가신 다음에는 정신이 드셨는지 저를 붙잡고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으세요.

아, 그 귀신이 들린 이야기지만, 마님이 계속 며칠간 분위기가 어두우시더니 갑자기 식사를 안 하시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셨어요. 주인님께 알려서 의사를 부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지요. 그래서 주인님이 아르미체 신부님을 부르셨어요. 아아, 신의 은총이 온 천하에 깃들라! 신부님을 보시더니 마님이 깜짝 놀라셨고, 뒤이어 뭐라뭐라 주문을 외기 시작하셨었죠. 그러자 놀랍게도 신부님도 같이 주문 같은 것을 외셨어요. 아마도 마님께 들린 귀신을 내쫓으려는 주문이었겠죠. 그렇게 반나절간 서로간에 주문을 외운 끝에, 귀신이 물러갔는지 신부님은 웃으며 돌아가셨고, 마님은 다시 식사를 하시고, 예전보다도 더 밝아지셨어요.

그렇지만 귀신이 완전히 물러간 건 아닌가봐요. 이건 세리나 마리도 모르고, 저만 아는 거에요. 밤에 마님의 방문 앞을 지날 때면, 안에서 작은 흐느낌 소리가 들린답니다. 그제도, 어제도 말이에요. 가끔씩 “엘리아스” 라고 하시는 걸 보면, 그게 마님한테 붙은 귀신의 이름일지도 몰라요.

댓글

로키, %2008/%10/%05 %13:%Oct:

푸핫.. 아마릴리스의 속독이나 외국어 책 읽는 것을 하녀 눈을 통해서 보면 이런 코미디가! 감금이나 다름없이 살아가는 생활을 다른 시각으로 본 점이 생동감 있으면서도 애잔하군. 다만, 크리스가 왔을 때 둘이서 '주문'을 외운 건 뭔지 잘 모르겠어. 집안 사람들이 엿듣지 못하게 까스띠예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얘기한 건가?

그건 그렇고 엘리아스가 아마릴리스에게 붙은 마귀라는 건 왠지 지금까지 들은 모든 얘기 중 가장 설득력이..(먼산)

 
orches, %2008/%10/%05 %17:%Oct:

전 예나라는 아가씨, 그러니까 이 일기장의 주인이 아이전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어요.

 
정석한, %2008/%10/%06 %16:%Oct:

네. 아이전 사람 맞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