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 (狂人)

가을의 숲은 추웠다. 엄격한 경비처럼 내려다보는 나무 사이의 검은 어둠에서는 가끔 조그만 짐승이 내는 부스럭 소리와 부엉이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속에 가끔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겁먹은 동물이 낑낑거리는 소리, 생과 사 앞에 선 생명체 공통의 공포가.

탁, 탁하는 파열음과 함께 불꽃이 튀더니 숲속에 조그마한 빛이 켜졌다. 퍼득거리던 불씨는 순식간에 커지다가 차가운 바람에 불안하게 날리는 작은 연기투성이 모닥불이 되었고, 그 빛이 나무에 묶이고 재갈이 물린 채 벌벌 떠는 남자를 비추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는지 알고 있나?”

망토를 둘러쓴 채 불 앞에 앉아 홀린 듯 불꽃을 들여다보는 형체가 조용히 물었다. 젊은 남자의 낮고 음악적인 목소리가 공기를 부드럽게 감쌌다.

몽테뉴 병사의 군복을 입고 결박당한 남자는 마구 고개를 저었다. 창백해진 얼굴에 솟은 식은땀이 불빛에 번들거렸고, 뭐라고 열심히 말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재갈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불 앞에 앉았던 남자가 망토를 풀어내리며 일어서자 긴 검은 머리와 단정한 얼굴, 세련된 귀족적 옷차림이 드러났다. 마치 표범처럼 우아한 움직임으로 그는 몽테뉴 병사 앞에 가서 섰다.

“산 후안을 기억하는지?”

몽테뉴 병사는 재갈에 대고 계속 소용없이 웅얼거렸지만, 남자의 속삭임은 개의치 않고 이어졌다.

“내 가족이 그 불길 속에서 죽었다. 내 이름은 돈 로렌소 세뻬다 델 아세도이다.”

말하는 그의 눈빛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모닥불이 스멀거리더니 한 줄로 천천히 퍼지면서 풀 위를 기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마치 살아있는 불의 뱀처럼. 그 모습을 본 몽테뉴 병사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했지만, 로렌소의 엷은 미소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때 수풀이 부스럭거렸다. 로렌소와 몽테뉴 병사는 한쪽은 차가운 긴장감, 한쪽은 절박한 희망을 담아 휙 돌아보았지만, 불빛 속으로 걸어들어온 사람의 모습에는 둘 다 허를 찔린 것 같았다. 새로 나타난 사내의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은 불빛에 긴 그늘을 드리웠고, 거친 망토 위로는 대충 묶은 머리가 흘러내렸다.

“여깄었구만.”

가예고스 사투리로 말하는 사내를 향해 돈 로렌소가 뽑는 칼이 숲속에 챙.. 울렸다.

“누구냐?”

“엘리아스 가르시아 데 야녜스.”

사내는 긴 팔을 벌렸다.

“적은 아니오. 굳이 말하면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달까.”

“관심없다. 돌아가지 않으면 죽이겠다.”

로렌소가 돌아서는 동안 엘리아스가 손가락을 딱 튀기자 모닥불이 갑자기 확 타올랐다. 천천히 돌아보는 로렌소에게 엘리아스는 조금 전의 로렌소와 마찬가지로 눈을 붉게 빛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도 이렇다고 로스 바고스에서 그러더군… '엘 말바도1).'”

“로스 바고스…”

로렌소가 칼을 고쳐잡자 칼에 붉게 비친 불길이 칼날을 따라 흘렀다.

“그들과 한패인가.”

“적의 적은 나의 친구이니까.”

로렌소는 엘리아스를 돌아보았다.

“이단심문회 얘기인가?”

“놈들 덕에 잃은 것이 있다.”

악문 이 사이로 엘리아스의 목소리는 억눌려서 나왔다.

“하지만 이단심문관 몇 놈 죽이는 걸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냐. 당장 죽을 놈은 따로 있다.”

“흐음, 여자 문제인가.”

엘리아스가 흠칫 놀라자 로렌소는 빙글빙글 웃었다.

“알아볼 수 있지. 하지만 내게는 할 일이 있다.”

그는 다시 시선이 얼음처럼 차가워지더니, 몸부림치느라 탈진해서 겁먹은 눈만 하얗게 굴리는 몽테뉴 병사를 바라보았다.

“들었어. 당신 가족 일인가.”

돈 로렌소는 경계하는 시선을 던졌지만, 엘리아스는 풀 위에 점점 퍼지는 불길도 개의치 않고 그의 옆에 와서 섰다. 풀이 타오르면서 연기가 오르자 몽테뉴 병사는 콜록거렸지만, 엘리아스와 로렌소는 똑같이 붉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태연히 병사를 지켜보았다.

“정말 이자가 당신 가족을 죽였나?”

엘리아스는 무덤덤하게 물었다.

“별로 높은 녀석 같지도 않은데.”

“상관없어. 그 자리에 있던 몽테뉴놈은 모두 죽인다.”

로렌소의 눈빛이 한결 격렬한 붉은빛으로 타오르더니 불길은 다시 한 번 살아있는 뱀의 형상이 되어 몽테뉴 병사에게 꿈틀거리며 다가갔다. 병사가 내지르는 비명은 재갈에 묻혔다. 엘리아스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불의 뱀이 몽테뉴 병사를 친친 휘감고 살이 타는 역한 냄새가 주변에 진동하는 동안, 그리고 횃불처럼 타오르는 병사가 내지르는 사람 소리 같지 않은 비명에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로렌소가 환희에 차 조용히 웃는 모습 역시.

마침내 몽테뉴 병사가 잿더미가 된 후 엘리아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당신을 '엘 말바도'라고 부르지만…”

그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사실 당신은 '엘 로코'2)로군.”

로렌소는 여전히 웃음을 띈 채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섰다. 그런 그를 엘리아스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불을 다루는 법.. 나에게도 가르쳐줘.”

“관심없다고 했을 텐데?”

로렌소는 어깨 너머로 싸늘하게 엘리아스를 바라보았다.

“게다가 이것은 혈통으로 타고나는 능력이다. 피의 순도 이상은 결코 능력을 낼 수 없어.”

“공짜로 가르쳐달라는 건 아냐! 가족의 복수를 하려는 것 아닌가?”

로렌소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걸음을 옮기지도 않았다. 엘리아스는 말을 이었다.

“로스 바고스가 당신을 찾는 건 알고 있겠지. 내가 그들에게 거짓 정보를 줘서 당신에게 떼어놓겠다. 그렇게 하면 당신도 활동하기 편해지지 않겠어?”

“이게 아무 상관 없다는 말인가.”

로렌소는 잿더미가 된 시체에 손짓했다.

“알 게 뭐야? 몽테뉴놈들이 나한테 뭐라고.”

엘리아스는 땅에 침을 뱉었다.

“어느 쪽이야? 받아들일 건가, 말 건가?”

로렌소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에게 다가왔다. 엘리아스는 긴장한 채 그를 지켜보았다.

“한 가지 조건을 더하도록 하지.”

빙긋 웃는 로렌소의 눈빛에는 다시 불길이 춤추었다.

“내 복수를 도와야 한다. 소중한 것을 잃는 것이 어떤 심정인지.. 자네라면 알겠지.”

엘리아스는 잠시 몽테뉴 병사의 타버린 시체를 보다가 다시 로렌소를 마주보았다. 얼굴이 핼쓱해져 잠시 망설이던 그는 손을 내밀었다.

“좋아.”

“환영하네… 동지.”

로렌소는 그의 손을 맞잡았고, 먼동이 터오는 하늘 아래 둘은 악수를 나누었다.

“자, 이제 로스 바고스의 '동료'들에게 돌아가면 내가 남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전해주겠나. 네가 말을 지켰다고 판단하면 이후에 올 곳은 내가 다시 알려주겠다.”

엘리아스는 끄덕이며 돌아섰다. 그가 가는 모습을 잠시 보다가 로렌소 역시 몸을 돌려 숲속으로 사라졌다. 재로 화한 밧줄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툭.. 끊어지자 사람 형상의 잿더미는 풀 위로 푹 무너져내렸다. 비명을 지르는 모습 그대로 재가 된 얼굴은 새벽 바람에 흩어지며 천천히 형상을 잃어버렸다.

1) El Malvado: 악한
2) El Loco: 미치광이

댓글

orches, %2008/%10/%20 %23:%Oct:

우와, 이렇게 만난거군요. 역시 우리 엘리는 문어발 (여자 관계가 아닙니다..)! 그럼 그럭저럭 지내다가 엘리가 배신때리고 분노한 엘 로꼬가 요제프 집을 습격하는 건가요 [;ㅅ;] 이젠 아마냥과 엘리아스를 만났으니 나머지 두 남정네도 만나는 장면이 나오면 좋겠네요! 하는 저였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