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2

“그 사람들은 갔어요.”

토굴 입구를 가린 덩쿨 사이로 간신히 햇살이 한 줄기 비쳐들다가 입구에서 멀지 않아 멈추었다. 덩쿨을 헤치고 햇빛이 비쳐드는 입구를 지난 소년은 어두컴컴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굴 안쪽에 누운 남자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희미하게 비치는 빛줄기 속에 어깨에 걸친 망토 밑으로는 어깨에 피가 붉게 비치는 붕대와 삼각대에 고정한 팔이 보였다. 눈은 열에 들뜨고 긴 머리는 땀에 젖은 채 그는 힘없이 물었다.

“란초는 괜찮고?”

“예. 가만히 계세요.”

소년은 가져온 자루에서 음식을 꺼내 사내 옆에 내려놓았다. 바위 위에 있는 양초를 켠 그는 붕대를 꺼내고 사내가 걸친 망토를 벗겼다. 어깨에서 붕대를 풀어내리자 피투성이 상처가 드러났다.

“별로 안 좋아보여요, 엘리아스 삼촌. 의사에게 보여야 하는데…”

엘리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는 사람은 적을 수록 좋다. 벌써 미겔과 네가 휘말렸어.”

조카가 상처에 붙인 약을 떼어내고 상처를 조심조심 닦아내는 동안 엘리아스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와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란초를 위험에 빠뜨리고…”

“여기 안 왔으면 삼촌 죽었어요.”

화가 나서 뻣뻣하게 말하며 소년은 상처에 새 약초를 붙였다.

“늑대들은 삼촌이 왔든 안 왔든 여길 찾아왔을 테고요.”

“그래… 여기 오는 길에 누가 쫓아오지는 않았지?”

“제가 바보에요? 걱정 마세요.”

짐짓 가볍게 말하면서도 붕대를 감는 소년은 걱정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윽고 붕대를 마무리한 그는 엘리아스의 팔을 고정한 삼각대를 확인하고 망토를 걸쳐주었다.

“고맙다, 카를로스.”

팔을 조금 움직여 보고는 엘리아스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다치지 않은 쪽 손으로 물통을 집어 목마르게 마셨다.

“넌 분명 좋은 의사가 될 거다.”

“삼촌…”

카를로스는 엘리아스 앞쪽으로 와서 앉았다.

“열이 심해요. 어떻게든 해봤지만 상처가 감염됐어요. 피도 많이 흘렸고요.”

“안다.”

엘리아스는 빵을 집어 한입 베어물었다. 촛불빛 속에 눈과 여윈 볼이 깊게 그늘졌다.

“그 팔… 앞으로도 움직이기 어려울 것 같아요. 몇 년 치료하고 잘 관리하면 조금은 움직임이 돌아올 수도 있지만…”

“이전에도 총에 맞았던 어깨다. 못쓰게 돼도 이상하지 않아.”

엘리아스는 무표정하게 스튜를 떠먹었다. 식욕이 없어도 억지로 먹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에요?”

“모르는 게 나아.”

엘리아스는 남은 빵을 두 입에 베어먹었다.

“또 나가려는 거죠! 하지 마요, 그랬다간…”

“죽겠지?”

조카가 차마 말을 못 잇자 엘리아스가 대신 말했다.

“아마릴리스 누나 일은… 들었어요.”

카를로스는 삼촌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넌 신경쓰지 않는 게 좋아.”

엘리아스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삼촌…”

카를로스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내가 한 짓이 돌아오는 거다, 카를로스.”

촛불 너머로 조카를 마주보는 엘리아스의 눈빛은 차분했다.

“내가 거짓말하고 배신해서 이꼴이 된 거야. 그래서 크리스 녀석도 날 찾는 거고…”

그가 한손으로 물통 뚜껑을 잘 닫지 못하자 카를로스가 물통을 받아서 닫아주었다.

“삼촌 나쁜 사람 아니잖아요.”

카를로스는 물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마릴리스 누나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고요.”

“그래…”

엘리아스는 토굴 벽에 기대앉아 아련하게 미소지었다.

“별로 잘하고 산 거 없는데, 그거 하나는 내가 잘한 것 같아.”

카를로스를 마주보는 그의 얼굴은 슬프면서도 묘하게 환했다.

“아마릴리스를 좋아한 놈이라고, 그렇게 기억해주면 좋겠다.”

그런 그를 보는 카를로스의 표정에는 슬픔과 이해가 엇갈렸다. 침묵 후 소년은 입을 열었다.

“삼촌, 타고갈 말 없죠.”

엘리아스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나쁜 기억을 털어내듯 고개를 젓고 그는 카를로스를 궁금하게 보았다.

“라 브리사 데 플라타… 란초에 돌아왔어요. 그… 아이젠 사람이 돌려보내서요.”

말이 없는 엘리아스와 눈을 맞추지 않은 채 카를로스는 말을 이었다.

“자꾸 도망치려고 그래서 몇 번이나 잡아왔어요.”

소년은 고개를 들어 삼촌과 시선을 맞추었다. 엘리아스는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카를로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했다.

“남쪽 시내가 초장에서 풀 뜯기는데… 만약 문이 조금 열려있으면 또 도망갈 거에요.”

“델 에스테 길로 통하는 문 얘기냐?”

카를로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눈빛은 겁에 질려 있었다.

“여기에서 언덕을 넘어서 가면… 그래, 거의 직선 거리구나.”

엘리아스는 혼잣말처럼 말하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는 카를로스를 날카롭게 보았다.

“오늘 저녁, 말떼를 데리고 들어가는 시간이다. 할 수 있어?”

“오늘 저녁? 벌써요?”

카를로스의 눈이 커졌다.

“좀 더 쉬고…”

“카를로스.”

엘리아스는 카를로스의 시선을 붙들고 놓지 않았다.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카를로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마치 도망칠 길을 찾듯 양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결국 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맙다.”

엘리아스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정말 고마워.”

“삼촌…”

“음식은 여기 있는 거면 되니까 걱정 마라. 누가 눈치챌 지도 모르니까 가는 게 좋겠어.”

말하던 엘리아스는 카를로스의 얼굴을 보고는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카를로스에게 내밀었다.

“가기전에 한 번 안아보자, 녀석.”

카를로스는 말없이 다가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엘리아스를 끌어안았다. 엘리아스는 그런 조카에게 한쪽 팔을 두르고 등을 툭툭 쳐주었다.

“공부 열심히 해라. 아버지 말 잘 듣고.”

그는 조카의 머리를 손으로 훑어주고는 놓았다. 카를로스는 아쉽게 팔을 풀며 물러났다.

“이제 가봐라. 저녁에 울타리 문, 잊지 말고.”

“예, 삼촌.”

자루를 주섬주섬 챙겨서 일어나서 카를로스는 삼촌을 돌아보았다.

“건강…하세요.”

“건강해라.”

멈칫멈칫 돌아서서 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엘리아스는 카를로스의 발걸음이 토굴 밖으로 멀어지자 자루의 음식과 물을 확인하고 손 곁에 끌어다 놓았다. 이윽고 그는 촛불을 불어서 껐다. 다시 토굴은 입구에만 더러 햇빛이 비쳐드는 어둑한 그늘에 잠겼다. 그 속에서 토굴 입구를 지켜보는 눈빛만이 간간이 미약한 햇살 줄기에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