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스띠나

아르미체는 여러 번 걸음을 멈추었다.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온 몸이 비명을 질러댔고, 무척이나 어지러웠다. 그는 현기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셀레스띠나 이사벨 라미레스 데 알다나 델 까스띠요는 두 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어서 오너라.” 그녀는 아르미체를 끌어안고 가볍게 빰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고 서둘러 의자에 앉히고 구석으로 걸어갔다. 아르미체는 괜찮다고 말하며 일어서려다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부렸다. 그녀는 일어서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잔들이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몸은 괜찮으냐?” 따뜻한 음료가 든 잔을 내려놓으면서 셀리스띠나가 물었다.

아르미체는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예의상 약간 입에 대었다. 좀 썼다. “의사들이 움직여도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렇다고 해두마.” 자리에 앉은 그녀는 잔을 들고 빙긋 웃었다.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구나.” 그녀의 말에, 아르미체가 약간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 생명을 건지기 위해 애를 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어서 무척 송구스럽습니다. 도냐 셀레스띠나.”

셀레스띠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서는 도움을 주는 자들이 흔히 짓는 자만이나 과시를 찾아볼 수 없었다.

“네 아버지에게 진 빚을 갚은 것 뿐이다. 난 늘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잔을 내려놓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네 결혼에 대해 애기해 보자꾸나.”

그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저는 행운아군요.”

“호, 어떤 아가씨인지 궁금하지 않느냐?”

“설령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들, 다른 선택권이 없을테지요.” 셀레스띠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저런, 그런 표정 짓지말거라. 이렌느는 아주 사랑스러운 여성이니까. 붉은 빛이 도는 탐스러운 금발 머리에 맑은 녹색 눈동자를 가졌어. 어머니가 아이니스모어에서 살았다던가 그랬다던가.. 아무튼 아발론 어를 읽고, 쓰고, 말할 줄 알더구나. 아발론 어 못지 않게 까스띠에 어도 제법 해.”

아르미체는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물어보았다. “보신 적이 있군요?” 그녀 역시 가볍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녀는 애정으로 가득 찬 눈을 빛내며 아르미체를 바라보았다. “싹싹한데다가 성격도 괜찮고, 신앙심도 깊어. 너도 만나보면 틀림없이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셀레스띠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르미체는 생각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영지의 대부분을 잃었다. 남은 것이나마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했다. 셀레스띠나의 칭찬이 없더라도, 가족의 안전과 생활이 보장될 수 있다면 기꺼이 누구와도 결혼할 수 있었다.

“네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뭔가 깊이 생각하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지. 역시 네 아버지를 닮았구나.” 셀레스띠나는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슬슬 돌아가서 푹 쉬는 것이 좋겠다. 이것저것 생각할 일도 있을 테고 마음의 준비도 해야겠지.”

“예, 도냐 셀레스띠나.”

셀레스띠나는, 아르미체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방에서 나가는 것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녀는 아르미체를 아꼈다. 그에 못지 않게 이렌느를 좋아했다. 결혼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을 때 기쁘게 받아들일 정도로. 마음 같아서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둘을 만나게 하고 싶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포장은 해주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르미체의 마음을 얻는 건 이렌느의 몫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둘의 시간을 알아보고 조정해서 만나기 적당한 때를 고르고, 아르미체의 가족에게 가서 슬쩍 결혼에 대해 운을 띄워봐야 했다. 그런데 아르미체의 어머니이자 그녀의 사촌이기도 한 안토니아 크리스티나 라미레스 데 아녜스는 만만한 성격의 소유자가 결코 아니었다. 사촌은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았다. 초승달어, 테아어는 물론이거니와 고 아이전어, 테오도란까지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 여자답게 처신하라는 말을 자주 듣긴 했지만, 자신이 글을 읽고 사용할 줄 안다는 사실을 굳히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꽉 막히지 않은 성격을 가진 남편을 만났다.

이렌느가 요제프와 함께 방으로 들어설 때까지, 셀레스띠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야기를 채 꺼내기도 전에, 안토니아는 엄연히 살아있는 자신을 제쳐두고 부모 노릇을 하기 시작한 거냐고 불쾌감을 나타낼 것이 뻔했고, 어짜피 당할 망신이라면 기녀 출신 며느리를 맞겠다고 딱 잘라 말할 것이 눈에 선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에 그녀를 찾아갔었다. 그녀는 잔뜩 독기에 올라있었다. 차근차근 설명을 하려고 해도 들을려고 하지 않았다. 상관도 없는 마법사랑 얽매여서 내 아이를 죽일 셈이었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당장 내 집에서 나가라고 손에 잡힌 물건들을 내던졌던 것이다.

최대한 사촌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강제로 일을 진행하고 싶지 않았다. 강제로 일을 진행시켰다간 사촌이 충동적으로 무슨 일을 벌일지 장담할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안토니아는 (집에서 벌어지는 일을 제외하고) 일체 아르미체가 뭘 하든 관여하지 않았다. 그건 그녀가 어릴 때 보다체에서 살았고, 여자는 남자들의 일에 '노골적으로' 끼어서는 안된다는 관습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댓글

orches, %2008/%10/%04 %10:%Oct: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승한님과 저는 아르미체의 여인이 될 이렌느에 대한 의견이 좀 달랐습니다. 생각해보니 승한님의 의견도 괜찮을 듯 했어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이렌느 설정을 토대로 아르미체의 어머니를 만들었습니다 +ㅂ+ (이렌느가 아르미체와 결혼을 할 때 최종보스 역을 맡으실 겝니다)

아르미체의 아버지 이름은 디에고 아르미체 아르시에네가 데 로차. 따지고 보면 아마릴리스의 친척이긴 해요 (실제론 성만 아르시에네가이고 그녀와 거의 접점이 없습니다) 아내의 영리함에 화를 내기보다는 존중하고, 다양한 서적과 경험을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지식을 이용해서 자신과 다투고 이기려고 하는 데에서 꽤나 아기자기한 재미를 느끼면서 살았을 것 같아요. 디에고가 어린 크리스를 무릎에 앉혀놓고 "네 어머니 말씀을 잘 들어라. 남자 흉내를 내려고 하는게 좀 꼴불견이기는 하다만, 아주 교활한 보다체인이거든. 게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쌓이는 지혜 역시 무시하지 못하지." 라는 말을 하고 있고, 옆에서 안토니아가 피식 웃고 있는 장면이 문득 생각나네요.

 
로키, %2008/%10/%04 %16:%Oct:

스승과 어머니의 정면대결입니까..+_+ 사실 가뜩이나 남편 잃고 상심했을 안토니아 머리 위로 셀레스띠나가 넘어가서 아르미체의 결혼을 추진하는 건 좋지 않겠죠. 똑같이 결혼시킨다 하더라도 안토니아하고 먼저 상의하고, 먼저 이렌느를 좀 만나게 하고 실속은 어떻든 안토니아의 승낙을 받는 편이 아마 현명할 것 같아요. '당신 아들 결혼을 내가 추진하겠다'고 해서 좋을 건 보통 없으니까요.

그리고 사실 아무리 예쁘고 착한 여자라 해도 자기 선택이 아닌 결혼이라면 썩 마음이 내킬 리는 없을 것 같은데, 그 점에 대해 이렌느가 (아르미체가 아닌 셀레스띠나가 보기에) 괜찮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르미체가 잘 받아들일 거라고 셀레스띠나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해요. 역시 이단심문관 님하들은 좀 일방적..(..?)

한편 셀레스띠나의 칭찬에 대해서는 '진짜?' 하는 생각이 드는 면도 있어요. 셀레스띠나가 추진하는 결혼인데 사실 신부감을 욕할 리도 없고 말이죠. 내키지 않는 마음을 일거에 극복할 정도로, 그것도 모든 취향에 맞는 완벽한 여자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 뭐랄까, 인물의 대사는 단순히 사실을 말한다기보다는 그 인물의 관점이나 이익을 반영하게 마련인데, 여기서는 그런 왜곡에 대한 고려가 별로 없이 이렌느가 정말로 그런 여자라는 방향이 것 같아서 의문이 드네요. (예 전 비뚤어졌습..)

어쨌든 크리스군의 결혼에 다가오는 정면대결!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하네요..ㅋㅋ

 
orches, %2008/%10/%04 %20:%Oct:

두 여성의 파워게임을 기대하셨던 거군요. 아까 이야기 중에 나온 것처럼, 아르미체의 아버지가 살아있었다면 모를까.. 어머니 혼자서 반대하기엔 벅차지요. 게다가 셀레스띠나는 몰라도 요제프가 확실히 이렌느 뒤에 있고요. 고로 아르미체만 이렌느에게 넘어가면 게임은 끝날 듯 (웃음) 약간 글을 수정했습니다 ^

저도 셀레스띠나가 아르미체에게 말한 게 100%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슬쩍 의사를 떠보고, 약간이나마 호감을 느끼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을테니까요. 그리고 그녀가 골머리를 앓는 건 자기 사촌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안토니아를 만나 상의를 하고 며느리감도 소개시켜주고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왠지 이렌느는 안토니아가 생각하는 며느리감과 상당히 거리가 있을 듯 하고) 상의 할 겸 말도 채 끝내기도 전에 딱지를 놓을 가능성이 크거든요. 개인적으로 아르미체는 아마릴리스에게 열중할 때만큼 정열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거의 없었을 것 같아요. 아마릴리스에 대한 감정이 식으면서, 여자 자체에 대한 감정이 짜게 식은 게 아닐까 생각도 들구요. 사실 지금 내가 지켜야 하는 것들 보장해주면 어떤 여자든 오케이랍니다. (이.. 이 놈!)

 

Fatal error: Allowed memory size of 50331648 bytes exhausted (tried to allocate 199 bytes) in /web/home/eldir/html/wiki/inc/auth/plain.class.php on line 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