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

이젠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완전히 말라버린 것일까.

걸음이 무겁다. 피곤한 것은 아니다. 심장 뛰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난생 처음으로 거세게 뛰고 있었다.

사방에서 빛을 발하는 것 같던, 젊은 아마릴리스를 처음 만났을 때의 두근거림보다 훨씬 더 강하게. 그런 그녀가 엘리아스의 품에 안긴 것을 본 날의 분노보다 차갑게.

이렌느는 여느 까스띠예 여성처럼 애교스러운 아내는 아니었다. 처음 만난 이후 단 한 순간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불타버리기 전까지는.

품 속에 든 총의 감촉이 묵직하다. “가지고 있어요.” 라면서, 어느날 아내가 손에 꼭 쥐어주었던 물건. 아끼던 총이라고 했다. 구형 총이지만 이름 있는 병기공이 만든 것이라고. 반동이 강하지만 그 만큼 위력은 확실하다고 했다. “아니에요.” 아이전 억양이 묻어나는 강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이 총은 그저 그런 피스톨들처럼 빨리 쏘는 총이 아니에요. 두 손으로 감아쥐고.” 그녀의 말에 따르면 처음 총을 배울 때 버릇이 잘못 들었단다. 당연한 일이다. 어디까지나 총기라는 것은 검의 보조였으니. 자신이 이 총에 익숙해질 때까지, 이렌느는 늘 연습장에 따라와서 말참견을 하곤 했다. “근력이 나쁜 건 아닌데, 너무 긴장해서 팔이 떨리는 거에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멈춰요.” 때로는 등 뒤에서 손을 잡고 자세를 교정해 주기도 했었다.

새까맣게 타버린 그녀의 손에는 작은 호신용 권총이 들려 있었다. 처음 그녀가 그에게 사 주었던. 너무 가벼워서 조준이 안 된다고 툴툴거리지 않았더라면… 자신과 총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이렌느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나의 말로는, 이렌느가 총을 몇 발을 쏴 맞혀도 그 남자는 쓰러지지 않았다고 했으니.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 같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 대신 턱을 타고 뜨거운 게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비릿하다. 그리고, 희미하게 코에 닿는 탄 내.

숲 여기저기가, 검게 그을려 있다. 군데군데 상한 나무의 흔적. 그리고…

“발로르?”

발로르 까스떼야노. 수 년 전부터 엘리아스가 아끼던 애마의 큰 발굽과 특색있는 걸음을 놓칠 리가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와 아마릴리스는 엘리아스가 발로르를 타고 다니는 한 그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지금도 그 발자국에 의지해서 엘리아스를 추격하지 않았던가.

그 발로르의 걸음이 끊긴 작은 공터에는, 새까맣게 그을린 채 옆으로 쓰러져 있는 거대한 말의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아마릴리스는 살았다. 이렌느는 죽었지만. 그 처참한 화염의 흔적도 아마릴리스의 몸에는 작은 그을음 하나 남기지 않았었다. 리전의 불꽃이 그의 영혼을 온전히 다 삼킨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도 아닌 모양이다. 자신의 애마를 숯덩이로 만들어 놓은 그 모양새. 구역질이 날 것 같다.

이제, 그가 아는 엘리아스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엘리아스를 살린 것은 그의 선택이다. 그날, 편지를 쓰지 않았더라면 엘리아스는 죽었을 것이다. 그 편지는 무엇을 만들었을까? 아마릴리스는 연인을 잃었겠지만, 그 상처는 지금의 것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 엘리아스의 영혼 역시 리전의 불길에 삼켜지지 않았을 테고, 이렌느는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엘리아스를 죽이러 간다. 결국 그의 선택은 친구를 살리지 못했다.

걸음이 무거운 것은 몸이 둔해진 것이 아니라, 그만큼 주위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가 느꼈을 무렵, 벌레 소리 하나 없는 정적 속에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아르미체.”

인간의 형상을 한 불꽃이, 엘리아스의 목소리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 뒤에는, 까맣게 타들어간 시체가 한 구. 그 모습이 이렌느의 마지막과 자꾸만 겹쳐 보여서 아르미체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엘 로코는….”

불꽃이 무어라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귓가에 울리는 의미없는 단어들을 머릿속으로 조합해 보려는 대신에…

그는 총을 빼들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렌느가 알려 준 자세 그대로.

이단심문회에서 구해 온, 축복이 깃든 은총알이 불꽃을 향해 날아들었다.

댓글

정석한, %2008/%10/%08 %11:%Oct:

소나타 론도로 보내야 되려나 살짝 고민 중입니다. 뭐, 아르미체가 명사수일지 아닐지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차차 생각하기로 하죠. […] 시기상으로는 엘리아스가 상처입은 엘 로코를 추격해서 사투를 벌인 직후이니, 벤테타의 그 사건으로부터 멀지 않은 순간이라고 생각해서 일단 이곳에.

 
orches, %2008/%10/%08 %11:%Oct:

석한님 시점의 아르미체에에에에 >ㅂ< 이런 보배같은 글을 보다니 전 행운아군요. 아, 이렌느를 만나기 전에도 화기를 다룰 줄 알았습니다. 캐릭터 설정하면서 전투 쪽도 해두었거든요. 라스무센 유파에 가입한 상태인데다가, 한 제니에게서 카푸니타를 배웠지요. 개인적으로 카푸티나보다 라스무센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만.. 토큰 1개 겁니다 [수줍]

(라스무센은 피스톨 등의 화기를 사용합니다. 세븐스 시 룰에서 이 유파 소속이면 검사길드 회원권과 함께 은혜 3 배경을 자동적으로 가지는데요. 정식으로 인정받기는 했으되, 다른 검사 유파 쪽에서 저런 비겁한 것들! 화기를 사용하는 겁쟁이 녀석들! 하면서 싸움 거는 일이 많거든요. 그런 유파 특성상 다른 검사 유파 쪽과 결투를 벌일 일이 많으며, 같은 유파 사람이 곤경에 처하면 암묵적으로 도와줍니다)

 
정석한, %2008/%10/%08 %14:%Oct:

옙. 내용 수정했습니다.

 
로키, %2008/%10/%08 %18:%Oct:

아내를 잃은 아르미체의 분노와 슬픔을 잘 형상화한 것 같네. 총을 매개로 해서 이렌느가 그를 생각하던 마음을 표현한 것도 좋고.

불쌍한 발로르..;ㅅ; 사실 몇 년 간 아낀 애마라기보다는 화재사건 (화염) 이후로 엘리아스를 귀찮게 쫓아다녀서 울며 겨자먹기로(..) 애마로 삼았다는 쪽으로 생각했지만, 크게 중요하지는 않는 부분. 나중에 그 부분을 글로 쓰는 일이 있다면 정식으로 반박하기로 하지.

 
오승한, %2008/%10/%09 %00:%Oct:

엘리아스의 머리를 꿰뚫었다! 까지 썼어야지!

발로르는 정말로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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