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흩어졌던 늑대들이 하나 둘 야영지로 모여들었다. 지금까지 돌아온 그 누구도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용병들이 모여 수근거리는 것을 들으며 아르미체는 쓰게 웃음지었다. 이미 예상한 일이 아니던가. 발로르가 불에 타버렸으니 엘리아스가 작정하고 숨어버린다면 찾을 방법이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추격이라기보다는 그의 애마가 남긴 흔적을 따라다닌 것에 가까웠으니까. 카를이 가져온 소식도 어느 틈에 퍼지기 시작한 모양인지 주변은 어수선했다.

그의 애마는 흥미롭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셀레나.” 우아하고 아리따운 은빛의 카바요 델 크레시엔떼는 귀를 쫑긋 세우고 바라보았다. 입가에 띈 미소는 사랑스럽기 그지 없었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에게서 받았으니까 서너 살이 되지 않았나 싶었다. 죽은 이렌느 역시 이 말을 무척이나 아꼈다. '아름다워요. 정말 저희 주시는 건가요?' 갓 태어난 망아지를 무척이나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내, 곱게 웃으면서 고개를 작게 끄덕이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져봐도 되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망아지에게 손을 가져다 대었다. 어린 카바요 델 크레시엔떼는 킁킁거리다가 두어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이렌느의 몸에 뺨을 문질러대며 기뻐서 흥분한 듯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마치 웃는 것처럼. 다들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었다. 아마도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녀가 조금씩 마음을 차지하기 시작한 건.

아르미체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는 걸 깨달았다. 이렌느를 잃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아픈데, 셀레나까지 죽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의외로 죽은 아내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침대에서 살을 맞대며 콧소리를 내기 시작한 건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살아온 경험도 달랐고 취향마저 틀려서 공유했던 것이 거의 없었다. 이렌느는 부모가 없었고, 그 역을 맡은 요제프는 결혼 지참금을 주기는 하겠지만 그건 이렌느가 아이를 가진 후라고 못박았다. 그러니까 결혼 초기엔 잠자리가 아이를 가지기 위한 노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었다. 내내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끝났다 싶으면 옷을 입고 홱 나가버리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애정보다는 의무감에 가까웠던 결혼. 언제부터인가 바로 나가버리지 않고 몇 분이나마 아내를 바라보게 되었더란다. 그러다보니 잠자리에서 농담을 주고 받았고..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다가가 부드럽게 갈기를 매만지자, 셀레나는 얼굴로 주인의 몸 여기저기를 비벼댔다. 아르미체는 옷소매로 고인 눈물을 살짝 닦아냈다. 그리고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위로하지 않아도 돼. 괜찮아, 정말로.

그 순간 숲 저 멀리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이어서 불기둥이 두어번 확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말들이 화들짝 놀란 듯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는 놀란 셀레나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불기둥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놀란 건 말들만이 아니었다. 대부분 혼이라도 빠져나간 듯 멍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았으니까. 어떤 이들은 성호를 긋거나 그 자리에 주저앉기도 했다. 아르미체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밤의 늑대는 20여명의 형제 자매이며 친구이며 동료인 존재를 잃었다.

죽은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아르미체는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대부분 아는 얼굴이었다. 다친 상처를 치료해 준 적도, 음식을 대접한 적도 있고, 같이 낑겨서 잔 적도 있었다. 이렌느의 죽음에 같이 슬퍼해줬고, 엘리아스를 추격하는 내내 죽은 아내의 추억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했던 이들이었다.

대부분 야영지로 옮기는 중 숨을 거두었다. 야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살아남은 건 필립 혼자였다. “살릴 수 있겠는가?” 프란츠가 쾡한 눈을 하고 물었다. 아르미체는 고개를 내저었다. 거의 불에 타 일그러지고 두 다리가 잘려 나갔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숲이 아니라, 알타미라 같은 도시였다고 할지라도 살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다리를 지져 지혈을 하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갈아서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것이었다. 아르미체의 설명을 들은 프란츠는 판자 두세 조각을 불에 던져넣었다. “빌어먹을!” 모닥불이 세게 타올랐다.

짧으면 오늘, 길면 며칠일까. 아르미체는 죽을 것이 확실한 사람에게 왜 매달리는지 그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첫 만남이 좋은 것도 아니고, 이렌느와 결혼 후에도 살갑게 지냈던 게 아닌데. 필립이 눈을 뜨자, 그는 다른 이들을 부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부님.. ” 필립은 고개를 내저으며 있는 힘을 다해 팔을 붙잡았다. 누군가를 부르러 간 사이에 숨이 넘어갈 수도 있다. 혼자 죽게 놔두는 것보다 이야기를 들어두는 편이 나았다. 아르미체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째서 연락하지 않았냐고 다그쳤더니 필립은 피식 웃었다.

“전.. 아니 우린 맹세했습니다. 그 새끼를 찾는다면 심장에 총알을 박아넣기로요. 설령 레기온 끝까지라도 따라가서.” 마법사를 막다른 곳까지 몰았다고 생각했더니 미리 파둔 함정이었다고 했다.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걸 깨달았을 때 멈췄어야 했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폭발에 놀란 말들이 날뛰고, 그 말에 밟혀서 비명을 지르고 그 순간 불이 확 덮쳐오고.. 혼란한 틈을 타서 마법사가 말 하나를 훔쳐 달아났다고 했다. 아르미체는 그들이 죽어가는 과정에 대해서 들으며 이를 작게 갈았다. 평상시 엘리아스가 미리 함정을 파두고 뒷통수를 치던 성격이었던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발로르를 태워버린 걸 보면 미쳐서 제 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형님들 말대로 조금 냉정하게 행동할 걸 그랬어요.” 필립은 킬킬 웃어대다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삿대질을 해댔다. “신부님 때문입니다. 다 신부님 때문이예요.” 죽어가는 순간 못할 말 안할 말 가리지 않는 사람이 더러 있다. 게다가 바로 앞에서 원수를 놓쳤다. 원망을 돌릴 상대가 필요할 것이다. 자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이전에 있었을 때의 누님이라면 그렇게 어이없게 죽지 않았을 겁니다. 누님은 맨손으로 바위를 부시고 쇠도 씹어먹을 강인한 여성이었다구요. 신부님을 만나 어울리면서 약해진 거예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은 두어번 눈을 끔벅거렸다. 고여있던 눈물이 빰을 타고 흘러내렸다. 갑자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을 해도 소용이 없겠지만… 둘을 닮아 사랑스러웠을 거예요. 그러고보니까 누님이 죽던 날, 우리 모두 제각각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내어놓고 싸웠어요. 닥쳐, 남자든 여자든 대장 이름으로 낙찰되었다고 깔끔하게 정리시키더군요. 그러니까 제가 우리 대장이 휼륭하고 존경스러운 아이전 남자이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까 그만 티내고 신부님이랑 헤어지고 첩으로 들어가라고 했다가 죽을 뻔 했어요. 그게 누님의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나에게 누님은 어머니같은 존재였어요.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살아있다면 꼭 닮았을거라 혼자 생각했죠.”

그는 조금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후회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 잘못이예요. 그날 누님을 부르러 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대장은 안 계시지.. 누님이 생각났어요. 우린 함께 죽을 고비를 여럿 넘겼거든요. 악한을 추격했을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아.. 그래요. 몽테뉴 놈들만 골라 죽인다는 미친 새끼. 교회에게 장렬하게 물 먹었지요.” 오락가락하던 정신이 잠깐 돌아온 듯 싶었다. 필립은 또렷하게 아르미체를 응시했다.

“그 때도.. 지금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이런 건 하나도 아깝지 않은데.” 그는 팔을 들어올렸다. 시커멓게 타버린 피부 사이로, 흰 뼈가 반짝였다. “아무렇지도… ” 그는 말을 채잇지 못하고 피를 토해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났.. 한 가지… 말할 것이…” 뭔가 말하려고 하는 듯 입가가 들썩였다.

“오.. 오해…. 누님을… 해친 마.. 마법사의 얼굴… 보았.. 그는.. 진짜 원수.. 아까.. 의.. 마법사.. 다.. 른.. 악한….” 필립의 두어번 몸이 들썩이더니 고개가 젖혀졌다. 아르미체는 눈을 감겨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에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고 한 것 같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요제프에게 죽었다는 말을 전해야했다. 후원자에게 말을 전하는 내내,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핏자국을 따라 숲 깊숙히 들어갔던 이들이 돌아와 있었다. 그들의 말로는 숲 언저리에서 말 발자국이고 핏자국이고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했다. 아르미체는 눈을 흘낏 들어 요제프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늑대들의 대장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서 그가 타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댓글

orches, %2008/%10/%20 %17:%Oct:

옙. 감사합니다. 지금 완전히 링크 걸기 전에 이리저리 고쳐보고 있는 중이라 댓글 달린 거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 셀레나는 아르미체의 말 이름입니다. 품종은 아마냥의 브리사처럼 카바요 델 크레시엔떼. 아르미체의 어머니가 시집올 때 몇 마리를 데려왔고 그 말들 중 하나가 낳은 새끼라고 보고 있어요. 로키님이 글 남겨주실 때까지 브리사를 품종이라 생각했지 뭐예요. 근데 자칫 잘못하면 손가락이 잘라지는 건가요? 아직 어린 망아지여서 상처가 조금 나고 말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또 아니었군요.. [후덜덜덜] 쓰다보며 생각한 것은 역시 손대면 손댈수록 짧아지네요 ;ㅅ;

 
orches, %2008/%10/%20 %19:%Oct:

유언: '죽음에 이르러 말을 남김. 또는 그 말'

이 글은 마법사와 이어집니다. 필립을 비롯해 이렌느 밑에 있던 용병들은, 도망친 엘리아스가 남겼을 흔적을 찾던 도중 엘 로꼬 그러니까 엘 말바도와 마주쳤지요. 이 용병들은 이렌느와 함께 엘 말바도를 추격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엘 말바도에게 말려들어 치 떨리게 삽질한데다가 결국 놓쳤지만요. 이건 과거편 '마주치다'에서 미리 깔아두었습니다. 또한 이렌느가 죽던 당시 바로 근처에 있었기도 하구요. 벤데타와 부정합에서 깔아두신 설정 잘 받아먹겠습니다 >ㅂ< 이번에 엘 말바도에게 공격받으면서 진실을 들었다는 흉악한 설정을 살짝쿵. (정신이 오락가락하다가) 죽기 직전에서야 그걸 떠올린 필립이 사실을 말해주려고 했으나, 정작 아르미체가 못 알아듣고 엘리아스가 미쳐서 벌인 일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ㅇ←<

 
오승한, %2008/%10/%21 %14:%Oct:

마지막의 말을 짐작하자면! "누님을 해친 마법사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진짜 원수인 아까의 마법사이고, 다른 악한과 손을 잡았다!" (…)

 
orches, %2008/%10/%21 %17:%Oct:

사실 필립은 이렌느를 해친 건 엘 말바도고, 지금 애먼 마법사를 추격하고 있다는 걸 말하려고 했지요. 뭐랄까.. '복수의 대상을 잘못 잡고 삽질하고 있습둥' 내지는 현 대통령 님께서 하신 말씀을 빌려 '으허허허, 오해입니다.' 에 더 가까울지도 (웃음)

 
오승한, %2008/%10/%23 %16:%Oct:

수정 요구 : 필립의 마지막 유언을 "누님을 해친 범인은 아까 그 놈이 맞아요. 그놈은 요제프 대장님에 대한 저주를 퍼부으면서 레기온의 불꽃을 불러내… " , 라는 말로 바꿔주십시오! (두둥)

요제프에 대한 폭력 2(플레이 요소) + 레기온과 계약을 맺다 1(플레이 요소) + 토큰 10 걸겠어욤.

 
로키, %2008/%10/%23 %17:%Oct:

엘 로코에게 쓴 누명 3은 플레이 요소도 있고, 반박시 토큰으로 도와드리죠!

 
orches, %2008/%10/%23 %22:%Oct:

시험공부 중에 잠시 머리를 식히려고 들어왔다가 이게 무슨 테러를…. 승한님, 우리 이 이야기는 반박룰 확정된 다음에 진행하도록 하지요. 예? (한가지 확실하게 못박고 싶은 건 전 글을 고칠 의도가 절대 없으며, 현재 반박룰 규칙으로는 설사 이긴다 한들 저 혼자만 피박쓸게 확실함으로 아주아주 불쾌하답니다. 정말 말 그대로 수정요구라니! 어림반푼없는소리! 죽어마땅!)

 
로키, %2008/%10/%29 %13:%Oct:

이제 반박규칙을 양쪽 다 토큰 소모하는 방식으로 바꾸었으니 어느쪽으로든 결론을 내야 하지 않을까요? 전에 말씀드렸듯 제가 5점 도와드릴 테니..^^

 
orches, %2008/%10/%31 %19:%Oct:

좀 오래 끌어서 죄송합니다 [넙죽] 옙, 수정 요구 반박하겠어요! 엘 로꼬에게 쓴 누명 3 (플레이 요소) + 토큰 10 (대자대비하신 로키님께서 토큰 5 도와주시겠다고 하셨.. ;ㅅ;) !

 
오승한, %2008/%11/%01 %09:%Nov:

토큰 소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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