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전의 고요

무슨 다급한 일이라도 생겼는지 한스가 문을 쾅쾅 두드리고 있었다. 이렌느는 눈을 떴다. 사실 그녀가 마음놓고 깊게 잠든 적은 드물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그녀 스스로도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까스띠에에 와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눈을 부릅뜨고 자신에게 부여된 일정한 지역을 감시했고, 때론 사냥감을 쫓아 까스띠에 여기저기 다니고는 했으니까.

그녀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자고 있는 남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가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채느라 -안 그래도 까스띠에 어 외우기 어려워 죽겠는데.. 테아 어는 그나마 낫지, 벤델 뒷골목에서 쓰는 은어라든지 옛날 귀족들이 쓸 법한 말이라던지 테오도란 등을 섞어서 말하기 일수였다- 머리가 아픈 걸 제외하면, 이 남자에게 불만 같은 것이 없었다. 오히려 설레고 두근거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갸냘프고 우아한데다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분위기까지 감돌던 남자. 지금까지 그녀가 알던 남자들과는 뭔가 달랐다. 충격에 가까운 놀라움을 느꼈고, 한참 말없이 훔쳐보았었다.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만날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고, 꽃잎을 한장한장 뜯기도 했다. 그걸 본 동료들이 살다보니 천하의 이렌느 아가씨가 제대로 사랑에 빠진 모양이라고, 어떤 용사인지 낮짝 보고 싶다고 크게 웃어댔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어깨에 손을 대었다. 남편은 얼굴을 찌뿌리며 몸을 웅크렸다. 작은 몸이 더욱 작게 보였다.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은 탓일 것이다. 그녀는 푹 자게 놔두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며칠 전, 큰 상처를 입고 간신히 돌아왔었다. 다친 이유는 말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가 요새 하는 일과 관계된 것 같았다. 그녀는 혀를 작게 찼다. 안 그래도 그녀는 그에 비해서 키와 몸집이 큰 편인데.

그녀는 옷을 대충 걸치고 총을 들면서 흠칫 놀랐다. 어느 틈엔가 남편은 벌떡 일어나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불안감으로 가득했고, 그의 눈은 왜 또 자신을 깨우지 않았냐고 추궁하고 있었다. 그는 준비할 때마다 혹 다치지 않을까 불안해했고, 그녀는 그걸 알기에 몰래 나가고는 했다. 그녀는 문 밖을 살짝 노려보았다. 머저리같으니라구. 그녀는 한스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차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없이 옷의 매듭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꼭꼭 묶고 있었다.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매듭을 짓는 그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자신을 보는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가지 않으면 안되냐고. 그렇게 묻고 있었다.

대답 대신, 그녀는 그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그녀는 입을 맞추면서 그의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 순간만큼은 돈을 받고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용병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거의 들은 적이 없었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표현을 자주 안할 뿐이지,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앞으로 살면서 많은 일을 겪고, 많은 느낌을 받겠지만.. 확실했고 변하지 않을 것이다. 희열감에 사로잡혔다.

빠른 걸음으로 방에서 나오면서, 그녀는 둥글게 부풀어오른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쿵쿵. 작은 새를 살짝 쥐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났다. 이렌느는 미소지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왠지 제 아비를 닮았고 고집이 셀 것 같았다. 남편은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쟁이같은 면이 있어서, 괜시리 안 아프다고 허세를 부릴 때도 있고 사소한 말다툼이 레슬링으로 발전한 적도 있다. 물론 레슬링을 실컷 즐긴데다가 결국 승리까지 얻은 건 그녀 자신이었지만 말이다.

댓글

정석한, %2008/%10/%08 %08:%Oct:

아이를 가진 상태였군요. 아르미체는 알고 있었으려나요? 알았다면 정말 엘리아스(혹은 제 3의 방화범)에 대한 원한은 […]

 
orches, %2008/%10/%08 %11:%Oct:

적어도 6개월은 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처음 임신을 한 여성이 태동을 느끼는 시기는 6개월 정도) 요제프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르미체는 알고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그렇게 보내면 안되었다고 죄책감을 가지는 동시에 엘리아스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린 상태. 잡아서 갈기갈기 찢고 씹어대도 모자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저야 엘 로꼬의 짓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아르미체는 모른다능.

사실 전 아르미체가 처음부터 이렌느를 좋아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마릴리스와 엘리아스에 대한 감정으로 자신을 한참 주체하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고요. 이런저런 일로 아마릴리스에 대한 감정을 접으면서 이성 자체에게 짜게 식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영지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되었고, 남은 가족들을 책임져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지요. 결혼은 해야겠고 남은 것이나마 보장할 수 있다면 누구랑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상태에서 (셀레스띠나의 펌프질이랄까 포장질이 있긴 했지만) 만나게 된 게 이렌느. 이런저런 일로 그녀랑 부대끼면서 애정이 서서히 들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주변에서도 은근히 부채질 해댔을 것 같고요)

 
정석한, %2008/%10/%08 %13:%Oct:

예. 제가 생각한 이미지도 그런 식이에요. 정략결혼 성격이 강한 만큼 처음에는 눈꼽만큼의 애정도 없었겠지만, 이렌느의 헌신과 함께한 세월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애정이 생겼고 그걸 이렌느가 죽고 나서 더욱 뼈저리게 실감하는 식.

 
로키, %2008/%10/%08 %18:%Oct:

임신이었다니 캐안습..;_; 아르미체에 대한 묘사가 좀 더 나온 점도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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