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가스트의 진실

필자의 친구 중 한 명이 우리 왕국에서 손 꼽히는 석학 중 한 사람인 마티아스 펜너 교수가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펜을 들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늦게서야 접하게 된 노교수의 글을 읽으며 대담하게(때론 너무 대담해서 많은 논란을 야기하기는 했지만) 결론으로 이끌어가는 금솜씨가 전성기에 비해 전혀 녹슬지 않았음을 느꼈다. 노교수의 복귀는 다시 약동하고 있는 우리 학계에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해본다.

그러나 역사학에서 등을 돌린지 너무 오래되었음일까, 아니면 노안과 관절염이 그의 이성마저 흐리게 했음일까. 그의 글에서는 지나친 비약과, 역사의 전후 사정에 대한 무관심함이 엿보인다. 그의 첫 논문인 '해적 여왕과의 만남'에서는 마치 우리 왕국이 반트족에게 동맹을 구걸하러간 것처럼 묘사를 하고 있지만, 그 당시 벨가스트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면 아넬리아드의 기록(음유 시인 특유의 감성으로 새로운 문화와의 조우를 과장되고 들뜬 어조로 묘사했다)을 그렇게 해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칼라인 대왕이 사절을 보내셨던 무렵의 반트족 사회를 묘사한 다음의 글을 보자.

초기에 반트족은 그들이 벨가스트 혹은 벨게스트라고 부르는 해안 지역에 혈연이나 혼인을 통해 이어진 혈족들이 모여 크고 작은 부락을 이루어 살았다. 부락의 지도자는 '다누'라고 불리던 남자 어른이었지만, 여가장이 이끄는 무리도 적지 않았다. 부락들은 혼인과 전쟁을 통해 서서히 여덟 개의 큰 부족을 이루어갔으며…(중략)…부족의 지도자는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했다.

여덟 부족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비슷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중략)…그 중에서 마나그 부족과 다네란 부족이 가장 강력해졌다. 그러던 중 마나그 부족에서 강력한 지도자가 나왔는데, 그가 바로 아곤 마나그이다. 그는 외교력과 군사력으로 이웃 부족을 하나 둘씩 굴복시켜나가…(중략)…통일된 벨가스트 왕국의 건설을 눈 앞에 두었다. 그러나 마나그 부족의 부상에 위기감을 느낀 다네란 부족은…(중략)…동맹으로서 초대된 아곤 마나그를 암살했다.

강력한 지도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벨가스트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마나그 부족에게 흡수된 부족들의 족장들은 아곤의 동생 다닐 마나그를 왕으로 추대했으나, 다닐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대신 아곤의 미망인 이렌가르드에게 왕위를 넘길 것을 주장했다. 그 과정에서 두 부족이 다닐의 결정에 반발하여 다네란 부족의 편으로 돌아섬으로서…(중략)…벨가스트는 다시 길고 잔혹한 내전 속으로 빠져들었다.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벨가스트는 이렌가르드파과 반대파간의 내전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은 뒤였다. 따라서 칼라인 대왕께서 사절을 보냈을 때에는 아직 전쟁의 여파가 남아있었을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다음의 자료는 벨가스트 지방이 당시 비참한 상태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모년 모월 모일 바다가 피처럼 붉게 물들고 죽은 물고기들이 무수히 물 위로 떠올랐다. 곳곳에서 반듀아 여신의 저주가 아니냐는 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중략)…전쟁으로 농지가 불타 곡물 수확량은 크게 줄었는데, 창고가 비어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나눠줄 궁휼미가 없었다…(중략)…다네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여왕께서 다닐 장군을 보내시어 반란을 진압하시고 주동자들을 모두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포로로 잡힌 자들 중 귀족이 5명이나 되었다.

미신적인 반트족 백성들의 입에서 그들의 여신이 등을 돌렸다는 말이 나왔으니, 이렌가르드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내전이 끝난 뒤에도 왕국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나 혼란이 더해갔다고 한다. 통일 왕국을 이루었다고 하나 이, 삼년 전만 해도 여러 개의 부족 단위로 나뉘어 서로 전쟁을 일삼던 민족이 과연 이런 혼란 속에서도 단결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답은 너무나도 자명해 보인다.

칼라인 대왕께서 벨가스트 왕국에 식량과 사절을 보내 동맹을 청하신 것은, 자부심이 강하고 이렌가르드에 대한 충성이 높은 그녀의 측근들과 굶주리고 있던 반트족 백성들을 모두 포용하려고 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무력으로 굴복을 얻어내는 대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함으로서 칼라인 대왕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벨가스트를 고스란히 손에 넣으셨고, 또한 난공불락의 요새로 이름 높았던 라겐하임의 함락에 필요한 해군력을 얻어낼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기가막힌 지혜인가!

사정이 이러하니 반트족들이 스스로를 우리 왕국의 대등한 동맹자로 생각했다는 것은 우스운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마치 어린 아이가 어른의 어깨 위에 올라 앉았다고 제가 어른보다 더 커졌다고 뽐내는 것이나 다름없는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훗날 칼라인 대왕의 지원과 비호를 바탕으로 벨가스트 지방이 부유해졌지만, 제국은 물론 다른 외국 국가들마저도 벨가스트를 독립된 하나의 나라로 인정하여 외교 사절을 보낸 적이 없었었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마티아스 교수의 견해는 분명 흥미롭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녁 식탁 위에서 나눌 법한 이야깃 거리 이상의 엄정한 진실이다. 다시 펜을 들기로 한 그의 결심은 분명 환영할만한 것이지만, 왕국 건국사의 복원이라는 이 중요한 대사(大事)를 단지 노년의 취미 거리로 전락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그의 이성과 통찰력이 부디 다음 논문부터는 되살아나기를, 한때 그의 글을 읽으며 사학자의 꿈을 키웠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비는 바이다.

댓글

BlackMarquis, %2007/%10/%19 %18:%Oct:

…오늘 검열 준비 때문에 어제 준비했던 글을 미처 올리지 못했습니다. 최초의 반박 기사라는 의미로 이번만 용서해주시면 안될까요;;

 
로키, %2007/%10/%19 %21:%Oct:

네, 근데… 용서라뇨? 일주일에 한 편은 이미 채우셨는데..

그리고 경매 절차 시작하게 펜너 교수 글에 권위도와 사용할 연구자금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옛 은사를 박살내버리는 겁니다! (음?)

근데 페이지 편집 자체는 되시는 것 같은데, 긴 글을 올리는 게 안 되시는 건가요? 왜 첨부파일로 인식이 되는지 알면 해결할 수 있을지도요.

 
BlackMarquis, %2007/%10/%20 %09:%Oct:

아직 규칙에 완전히 익숙하지가 않아서 반박글을 올리면서 고민을 했던 게 사실입니다. 이미 반박 기사를 올릴 시간이 지난게 아닐까… 해서 미리 안전선으로 '죄송합니다'를 그었다고나 할까요(웃음)

 
정석한, %2007/%10/%20 %01:%Oct:

드디어 첫 반박 기사가 올라온 것이군요!

그런데 본문에서 “해적 여왕과의 만남” 을 언급하고, 또 “아넬리아드의 기록(음유 시인 특유의 감성으로 새로운 문화와의 조우를 과장되고 들뜬 어조로 묘사했다)을 그렇게 해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라고 표현하신 것으로 보아서는 “해적 여왕과의 만남” 을 반박하시는 기사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확정된 역사” 에 요약하신 것을 보면, 반박은 “뭍의 왕, 바다의 여왕” 에 들어가 있군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인가요? (어차피 두 기사 모두 펜너 옹의, “듀리온 - 벨가스드 대등 동맹설” 을 담은 기사라 엎어치나 메치나겠지만서도.)

덤으로, “노안과 관절염” 에서 뒤집어졌습니다.

 
BlackMarquis, %2007/%10/%20 %09:%Oct:

마티아스 옹의 두 기사가 서로 연결된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싸잡아서 반박을 해버렸습니다..;; 사실 마티아스 옹의 첫 기사 때문에 엄청 깨지기도 했고… 그 울분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안될까요…

 
백광열, %2007/%10/%20 %01:%Oct:

본격적으로 복수의 칼날이 드러나기 시작하는군요. 하하하;;

 
BlackMarquis, %2007/%10/%20 %09:%Oct:

…앞으로 마티아스 옹 뿐만 아니라 모든 연구원의 발목을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사옵니다… 시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웃음)

 
오승한, %2007/%10/%20 %10:%Oct:

반박 경매를 시작해주세요^^

 
_엔, %2007/%10/%20 %15:%Oct:

반트족 역사 서술한 부분 진짜 역사책에서 자주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어요…; 멋집니다! 피디아스의 학구적으로 빈정거리는 어투도 인상적이고요 ㅎㅎㅎ

첫 반박기사 화이팅입니다.

 
백광열, %2007/%10/%21 %22:%Oct:

어라, 반박경매 어떻게 된 것인가요…? ;;;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자동적으로 끝난 건가요? (긁적;)

 
_엔, %2007/%10/%22 %15:%Oct:

반박경매 윗 기사에서 이루어져서 마티아스 옹이 상처 뿐인 승리를 거두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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