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보다 강한 것

예로부터 불 구경과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게 없다고 한 것처럼, 역사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을 강하게 끄는 것은 역시 전쟁사일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우리의 건국사에도 여전사 세렌을 필두로 한 많은 명장들이 있었고, 그들이 신비로운 전술로 적을 농락해 온 사실을 모르는 이는 왕국 어디에도 없겠지요.

그런데 의외로 난공불락이라 일컬어진 요새를 아군의 희생 없이 점령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략) 2주간 성 일곱개를 점령하였다. 10월 17일. 라인부르크가 항복하였다.

위의 글은 건국왕 칼라인 듀리온 전하께서 손수 남긴 기록입니다.

위의 무미건조한 기록으로는, 남부 최후의 보루라고 불린 라인부르크의 항복에 얽힌 이야기를 짐작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필자는 우연히 타이샨의 기록을 검토하던 중, 라인부르크 항복의 해답을 던져주는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하였습니다. 아래에 소개할 기록은 진 뤠이신이 식량을 무기로 하여 민심을 흔들고, 결국 한 사람의 전사자도 없이 성을 점령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타이샨의 기록이라 지명이 자세하지 못한 점이 있으나, 기록에서 드러나는 주변 정황으로 볼때 라인부르크 이외에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이 기록은 그간 단순히 건국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것으로만 알려져 있던 진 뤠이신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보여줍니다. 한 사람의 전사자도 없이 성을 점령한 그 공로는 실로 전무후무한 위업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민심을 외면한 집단은 패망하기 마련이라는 평범한 진리에 더욱 눈길을 돌리고 싶습니다. 결국 라인부르크의 성문을 연 것은 성의 민중들, 그 자신들이었으니까요.

기록에는 진 뤠이신의 재략을 “칼보다 강하다” 고 감탄한 부분이 나오지만, 사실, 진정으로 “칼보다 강한 것” 은 민심이 아닐까 합니다.

건국왕이 뤠이신을 불러 말하였다.

“선생의 뜻이 높고 학식이 고명함은 이 땅에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이 군무의 일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졸병부터 장군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평할 일이니 가당치 못하다.”

뤠이신이 박장대소하며 말하였다. “그런 자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들이니 더불어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달포의 말미를 주시면 성은 저절로 떨어져 주상의 것이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의 군졸도 상하면 공으로 치지 않겠습니다.”

이에 돈울프가 짐짓 말하기를 “군중에는 허언이 없는 법인데 선생은 어찌 말을 함부로 하시오.” 라 하니 뤠이신이 즉시 건국왕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으며 말하였다.

“달포가 지난 후에도 낙성이 되지 않으면 신의 처분을 어의대로 하소서.”

그 말에 돈울프가 다시 말하기를 “선생이 이렇게 말하니 필시 흉심에 품은 계교가 있음이니. 달포의 말미를 두고 낙성되지 아니하면 군령으로 다스린다 발표하시면 휘하 장졸들도 불평이 없을 것입니다.” 라 하였다.

건국왕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였다. “선생의 뜻대로 행하라.”

이에 뤠이신이 병졸 수백을 시켜 성 가까이에서 밤낮으로 소리를 쳤다.

“이미 주위의 성이 모두 떨어졌거늘 혼자 저항해서 무엇하리오. 속히 항복하라.”

이에 적장은 성문을 더욱 굳게 잠그고 응전하지 아니하였다. 뤠이신이 다시 부관을 시켜 매일 북쪽 언덕 위에서 밀로 죽을 끓이되 약초를 많이 넣고, 솥의 뚜껑은 덮지 않으라 명하였다.

이레가 지나자 성 내가 한 차례 크게 소란스러우니 부관이 말하였다.

“지금이 성을 들이칠 호기올시다.”

뤠이신이 고개를 저으며 “아직 때가 되지 아니하였느니라.” 라고 말하였다.

보름이 지나고 성 내의 민심이 흉흉해지니 뤠이신이 다시 병졸들을 시켜 외쳤다.

“주상께서 하늘의 뜻을 얻어 너희를 다스리시니 어찌 너희를 상하게 하리오. 문을 열고 엎드리는 이에게 우선적으로 곡식을 줄 것이다.” 라 하니 모두들 앞다투어 항복하더라.

(중략)

돈울프가 미소하며 가로되 “짐짓 주상께 아뢰어 군령장을 쓰라 하여 군심을 위무한 것이외다. 그런데 선생이 오늘 한 사람의 병졸도 상하지 않게 낙성을 한 것에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인데 소생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라고 하자 뤠이신이 말하였다.

“그것은 가장 쉬운 일이지요. 대저 성을 방비하는 자는 곡식 모으기를 우선시하니 병졸들은 배부르되 백성들은 배가 주립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그 일대의 농사가 좋지 못했으니 제 아무리 재주가 있다 한들 어찌 창고에 곡식이 풍족하리오. 마침 주위의 성이 모두 낙성되니 이는 입술이 상하면 이가 시린 법이라. 적장이 필시 대경하여 민심을 무시하고 군량미를 모으기에 혈안이 될 것이 아니겠소? 이에 내가 크게 밀죽을 만들되, 약초를 많이 넣어 향기가 천지에 진동하게 함이요. 성내에선 허기가 배로 졌을 것이니, 곡식을 주겠다는 약속에 앞다투어 백성들이 항복한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백성들은 병졸들의 부모요, 형제이며, 가솔이 아니겠소. 그러니 자연 병졸들도 따라서 항복하니 성이 낙성됨은 손바닥 뒤집듯 되는 것이오.”

그러자 돈울프가 크게 감복하였다. “가히 선생의 경세재략은 칼보다 강하다 하겠소이다.”

댓글

로키, %2007/%10/%15 %11:%Oct:

재밌게 봤습니다. 특히 기록 부분은 딱 중국 고사 풍이라서 너무 재밌었어요..^^ 역시 돈울프와 진대인은 손발이 척척 맞네요.

 
_엔, %2007/%10/%15 %12:%Oct:

어떻게 하면 이렇게 삼국지스러운 문체로 쓰실 수 있나요! 복스 씨는 좋아하지 않으시겠지만 전 민심보다, 제갈량을 연상케하는 뤠이신 씨의 매력에 주목해버렸답니다.

 
오승한, %2007/%10/%15 %13:%Oct:

원래 저도 이런 풍으로 써보고 싶었는데…(멋집니다!)

 
정석한, %2007/%10/%15 %19:%Oct:

역시 돈울프 - 진대인 커플링(..)은 망상록에서 첫 등장한 이후 역사의 대세가 되어가는것 같습니다.

뤠이신이 타이샨 출신이라는 점에서 착안해서 동양 고전스러운 풍으로 써 봤는데, 다들 재미있게 봐주셨다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나저나 첫 제안 당시에는 중동 상인 모티프였던 진 뤠이신이 갈수록 여불위가 되는 듯 해서 두려워집니다. (아스파, 실은 진대인이 니 애비다!) 아아. 이런 망상은 안되는데.

 
_엔, %2007/%10/%16 %21:%Oct:

진 대인과 아스파의 혈연설! 새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