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가지 선물

(본문에 글이 써지시지 않는다고 하셔서, 제가 대신 덧글에 쓴 기사를 옮겼습니다. - 승한 -)

칼라인 대왕의 출생은 사학자들의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마저도 그가 태어난 해나, 그의 출신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의 외모에 대한 묘사-갓 씻은 까마귀 깃털처럼 검은 머리, 쑥 들어간 눈, 큰 손-와, 스쳐가듯 언급된 몇가지 사소한 사실을 통해 그가 구 제국의 북쪽 속주 중 하나인 아킬라니에서 태어났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필자는 칼라인 대왕의 흔적을 찾아 제국 시절에는 아킬라니, 지금은 아킬라니아라고 불리는 곳을 여행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왕국의 변두리인 이 가난한 지방에는 엘레할 이교의 전통이나, 요정어로 전해지는 동요와 동화들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필자는 우연히 틸랴라는 작은 마을의 촌장 집에서 하루밤을 묵게 되었다. 그 선량한 노인은 필자가 칼라인 대왕의 기록을 찾아 여행 중인 사학자임을 밝히자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겠노라며 필자를 낡은 다락방으로 이끌었다. 하나뿐인 작은 창문이 못으로 막혀 빛이 한 점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다락방은 무척이나 어두웠고, 공기는 건조했다. 노인은 익숙한 몸놀림으로 양초에 불을 밝히고 다락방 안으로 필자를 이끌었다.

방 안은 하나의 책장을 제외하면 텅 비어있었는데, 촌장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그 책장에 쌓여있는 십여 개의 양피지 두루마리 중 낡고 낡은 두루마리 한 개를 건네 주었다. 대충 두루마리를 살폈으나, 이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을 뿐이었고, 사실 그런 종류의 문서는 딱히 놀라울 것이 못되었다(사실 필자의 고향에서도 이런 종류의 문서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노인은 왜 필자에게 이런 하찮은 문서를 대단한 것인양 보여준 것일까. 그의 나이가 그에게서 어떤 분별력마저 잃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러나, 독자들이여, 필자는 양피지의 맨 마지막 부분을 읽고 시력을 의심해야만 했다. 그 양피지는 무려 300년도 전에 씌여진 것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그제서야 그 문서에 대한 흥미가 솟아나는 것을 느꼈고, 처음부터 끝까지 양피지를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 줄 한 줄을 읽어갈 때마다 무한히 샘솟아나는 환희여! 다음은 그 문서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일한나의 서른번 째 날, 쿤론과 에렌의 사이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다. 아침 일찍 마을 사제가 그들의 집을 찾아가 샘물로 아이를 축복하고, 칼라누스라는 이름을 선물로 주었다.

신이시여, 이럴 수가 있는가. 이 '칼라누스'란 누구인가. 반도를 통일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 우리들의 위대한 대왕 칼라인 듀리온 폐하의 다른 이름이 칼라누스라는 것은 이 나라의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던가! 계속해서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자.

잠시 후 이웃 마을에 사는 사제가 도착해, 그 역시 아이를 축복 하고, 청동 거울을 선물로 주었다.

정오 무렵 또 다른 사제가 마을 입구에 도착했기 때문에 마을은 큰 기쁨에 잠겼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아이의 부모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세번 째 사제는 들고 온 칠현금을 선물로 주었다.

네번 째 사제가 도착한 것은 잔치가 막 시작하려는 무렵이었다. 한 아이에게 네 명의 사제가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그는 멀리 떨어진 숲에 사는 은자라고 자신을 밝혔다. 아이에게 축복을 하고, 등에 메고 있던 큰 활과 화살 열 개를 선물로 주었다.

밤이 깊어가고 잔치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한 여행자가 마을을 찾아왔다. 그는 수염을 길게 기르고, 체구가 장대한 남자였는데, 허리에 큰 칼을 매고 등에는 방패를 건 모습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들 겁을 먹었다. 여행자가 아이에게 걸어가 축복의 말을 읊고 허리에 매었던 칼을 풀어 아이 부모에게 건네 줄 때에야, 그가 사제이며, 이 아이를 찾아 먼 길을 찾아왔음을 알았다.

지금쯤 몇몇 영리한 독자들이라면 필가 왜 이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미친 자처럼 횡설수설했는지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 지식이 부족한 독자들이 있음을 필자는 잘 알고 있으므로, 간단히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다. 칼라인 대제가 태어날 당시 제국에는 초기 우노스 교회의 사도들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아직 그들의 영향력은 북쪽의 작은 속주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 당연히 칼라인 대제의 부모는 당시의 제국인들이 다들 그러했듯이 엘레할의 이교를 믿고 있었을 것이다. 엘레할 이교의 사제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집으로 찾아가 아이에게 축복을 내리고, 새의 깃털이나 개의 뼈, 상아 주사위 등으로 아이의 미래를 점쳐주거나 아이에게 선물을 주었는데, 이와 비슷한 풍습은 오늘날 벨가스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1) 위대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많은 선물을 기대할 수 있었는데, 세 명 이상의 사제가 같은 아이를 찾아오면 마을의 경사라고 해서 마을 전체가 큰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 칼라누스에게는 하루 동안 다섯 명의 사제들이 찾아왔으니,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고 두려워했을 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비범함과 위대함을 비록 이교도라하나 현명한 이들은 일찌감치 알아챘던 것이다. 그러나 놀라움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으니, 그 날이 끝나기 전에 두 명의 사제들이 더 찾아왔다. 앞서서의 기록에는 이 만남이 그려져 있지 않으나, 300년 전 이 마을의 촌장이 쓴 일기는 분명히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두 명의 사제가 동시에 아이의 집의 문을 두드린 것은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잔치도 파하고, 마을 사람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으나, 촌장인 나는 아이의 부모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만나볼 수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키가 껑충하니 크고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얼굴은 눈처럼 희고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나고 있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이 사실은 요정임을 알았다. 두 요정은 아이의 부모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잠든 아이의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나는 그들이 아이에게 선물을 줄 줄 알았으나 그들은 빈 손이었다. 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한 요정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우리가 빈 손으로 온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구려. 하지만 우리는 이 아이에게 가장 값진 것을 주려고 한다오.”

두 요정은 아이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축복하고는 슬픈 것인지 기쁜 것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위대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아이여, 우리는 너에게 이 나라의 땅과 바다를 선물하노라.”

1) 벨가스트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친척 어른들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선물을 주는 풍습이 있다. 이것은-주로 요정-엘레할 이교 사제의 의복을 연상시킨다.

댓글

오승한, %2007/%10/%16 %19:%Oct:

올려드렸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노스 정교회 입장에서 칼라인 왕의 탄생에 대하여 쓰고 싶은 마음이 근질근질하군요.:)

 
_엔, %2007/%10/%16 %21:%Oct:

와~ “슬픈 것인지 기쁜 것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이 부분이 저의 감상을 마구마구 자극하는군요! 요정들 너무 좋아요.

세인 님이 창조해내신 관습도 매력적이고요. 뾰족한 모자를 쓰고 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과는 다른 눈을 가진 사제들… 나중에 요정들이 칼라누스한테 준 선물 하나하나마다 상징적인 의미를 붙여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로키, %2007/%10/%17 %22:%Oct:

첫 글은 비교적 온화하군요.(?) 벨가스트 풍속 얘기도 나오고.. 설화적인 내용도 마음에 들어요. (저도 상징적 의미를 붙여보려고 이것저것 궁리했죠.) 이게 피디아스가 진짜 쓰고 싶은 글인 것 같지만, 첫 일기에 나온 것처럼 후원자의 강압을 받으면 좀 다른 글이 나오겠군요..;_;

 
오승한, %2007/%10/%18 %20:%Oct:

왕의 탄생에 대한 자료를 (꼭두각시가 사자가 되어)에 인용하였습니다.

 
정석한, %2007/%10/%19 %17:%Oct:

박스의 첫번째 줄에서, 지금쯤 몇몇 영리한 독자들이라면 '필가' 왜 이렇게 기뻐하고 - > “필자가” 의 오탈자로 생각됩니다.

 
백광열, %2007/%10/%20 %01:%Oct:

와와. 멋집니다~~ :D 요정들의 풍속이 디테일하게 그려지니 좋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