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렌 - 기억의 파편

가끔 그녀는 뭔가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아주 중요하고 소중하고 아팠는데 이제는 사라진 것… 가끔, 강행군에 지쳐 자리에 누우면 그녀는 흙과 습기 냄새 가득한 동굴에 누워있다. 모닥불 너머로 장로들의 얼굴이 일렁인다. 그대는 엘레할, 그 축복받은 대지와 혼인한 예언의 왕… 우리는 그대를 축복하고 그대를 돕나니, 우리에게 맹세하라… 맹세하라… 맹세하라… 얼굴 없는 연인, 육체를 충동질하던 대지의 맥박. 날카로운 아픔마저 두 팔 벌려 환영했었는데.

하지만 세렌은 결혼한 일이 없다. 그건 그녀의 혼인식이 아니었다. 그건 그녀의 기억일 수가 없다. (그리고 색채의 소용돌이와 박자 없는 춤, 환한 대낮의 하늘에 흐르는 별들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눈쌀을 찌푸리며 고개를 젓는다. 머리가 아프다… 요정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은 정신과 기억을 두고 하는 도박이라고 누군가 말했었다. 그녀가 뭐라고 대꾸를 하자 그 사람은 웃었었고, 그 웃음소리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맑고 달콤했었다. 그런데도 다시 틸위스 숲에 등을 돌리고 손에 칼을 잡은 것은 뭔가 중대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는데,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수레바퀴에 깔리는 것 같은 고통과 얼룩진 피, 죽음과 삶이 만나는 진창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공포가 있었는데, 그리고 눈물과 웃음과 갓난아이의 가느다란 울음소리… 젖을 빨던 조그만 입과 그 작고 사랑스러운 온기는 꿈이었을까? 몸을 씻을 때면 출산이나 수유의 흔적이 없는 탄탄한 육체가 가끔 낯설다. 그리고는 그 낯설음이 더욱 낯설다. 인간이 알고 느끼는 모든 것이 그렇듯 이 몸도 그저 환상과 착각의 아슬아슬한 균형이라는 건 알지만,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을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돌려주세요…”

막사 입구의 틈새로 비쳐드는 달빛 한 줄기에 손을 뻗어보지만 어둠은, 그리고 달빛은 아무 대답이 없다. 무엇이 그렇게도 그리운지, 무엇이 삶에서 오려내듯 사라졌는지 생각하려 애쓰다가 세렌의 정신은 다시 연약하고 불완전한 육체가 필요로 하는 잠의 검은 물 속으로 빠져든다. 속눈썹이 달빛에 그림자를 드리운 갈색 뺨에는 눈물 자국조차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