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녹 요새 공방전

유테리아의 베녹 요새는 반도 내에서도 손꼽히던 견고한 성채였습니다. 라겐하임, 라인부르크와 함께 흔히 “3대 견성” 으로 불리던 성채이지만, 다른 두 성채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관광 명소이자 역사적 유적지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과 달리, 베녹 요새는 옛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어, 지금은 그 모습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베녹 요새는 이중의 해자를 가진 인공 요새입니다. 주위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였던 라겐하임과 달리, 베녹 요새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인공적으로 지어진 요새였습니다. 이는 베녹 요새가 유테리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국 시절의 방어는 각각의 영지 단위로 이루어졌는데, 유테리아의 초대 영주는 비옥하지만 언덕과 구릉이 없이 평평한 평야 지대인 유테리아를 지키기 위해서는 야전과 농성을 병행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렇기에 영내의 어느 곳에서 적의 침공을 받더라도 즉각 출동하여 격퇴할 수 있도록, 위치상 유테리아의 중심에 요새를 두고 그곳에 병력을 배치해온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새는 평야 지대의 한복판에 지어졌으며, 주위의 지형은 지키기에 불편한 것이었지만, 유테리아의 풍부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한 압도적인 경제력과 초대 영주의 굳은 의지로 반도 내에서도 손꼽히는 성을 완성시킵니다. 특히나 베녹 요새는 단순히 수비용이 아니라, 유테리아에 침공한 적을 공격하는 거점의 역할도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그렇기에 적에게 포위당한 상태에서도 주둔군을 출격시킬 수 있도록, 성채는 'ㅂ' 자 형태로 지어졌습니다. 성문 양 옆에 날개를 두어, 주둔군이 출격할 동안 양 날개에서 성문을 지킬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중 격자와 이중의 해자. 그리고 양 날개를 가진 유테리아의 베녹은 실로 반도 3대 견성으로 불리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베녹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듀리온 왕국은 “꽃의 마법사” 라 불리는, 왕의 조언자 마그누스, 그리고 “요정의 기사” 라 불리는 세렌을 파견합니다. 이 두 사람의 파견은 당시 서남부 전선의 총 지휘관이던 브레넌 장군이 큰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에 의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이렌가르드 여왕과 건국왕 전하의 혼례를 추진하기 위한 아데프치오 세력의 모략이기도 했던 것입니다.1)

“정체불명의 마법으로 병사의 사기는 떨어지고, 그 지휘관은 중상이라.”

저 멀리 보이는 성채를 바라보며, 마그누스가 나직히 중얼거렸다. 선홍빛의 머리칼과, 그 머리칼과 같은 빛의 옷을 입고, 오른손은 소매 속에 감추고 있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잔잔했다.

그를 두려워하는 자는 적 뿐만이 아니다. 돈울프나 진 뤠이신 같이 대범하고 이성적인 사람조차, 그 붉은 머리칼 앞에서는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다. 언젠가 돈울프가 말하기로, 저 남자는 격정과 이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어 속을 읽기 어렵다 했다.

마법사라는 존재에 대한 편견을 제외하더라도, 그는 무척이나 이질적인 존재였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그는 감정이 풍부한 인간이다. 술과 노래, 음악과 시를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고, 스스로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발하는 감정의 격함이나, 고집이 센 점은 돈울프와도 닮아 있다. 그 열정 속에서, 가끔씩 드러내 보이는 지적 심오와 냉정의 편린은 그를 알기 어려운 인간으로 만들어 낸다. 마치, 여러 개의 영혼을 동시에 갖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내일부터 바로 공성에 들어가겠어. 이런 곳에서 질질 끌고 있을 시간은 없어.”

“세렌. 적의 마법사가 아직 노출되지 않고 있어. 그 정체를 파악할 때까지는 신중하게 가자. 자칫하면 너도.”

“괜찮아 마그누스. 나는 마법에 당하지 않아. 막아 줄 거잖아?”

저 고귀한 벨가스트의 여왕처럼 우아하지는 않지만, 그녀보다 훨씬 더 생기가 넘치는 얼굴로, 세렌은 웃고 있었다. 평소의, 아주 작은 감정조차 드러내지 않는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깜짝 놀랄 만한. 그리고 누구나 반할 만한 표정으로.

“글쎄. 어떨까.”

마그누스는 왼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이 있어. 열흘 이내에 성을 열도록 하지. 그 때까진 팔이 근질거려도 조금 참으라고. 말괄량이 아가씨.”

아스파의 수기에서 장담한 것처럼, 마그누스는 후대에 길이 남을 묘책을 발휘합니다. 이 때 그가 사용한 전법은 지금도 사관학교에서는 요새 공격의 두 가지 왕도 중 하나2) 로 부르고 있습니다.

우선 성을 포위하되, 성에 접근은 피하고 적의 출입을 봉쇄합니다. 동시에 브레넌의 상세가 위중하다는 정보를 흘립니다. 이후, 3일 후에 포위망을 풀고 일제히 철수를 개시한 것입니다. 한편 세렌은 포위에 참가하지 않고, 직속 부대만을 이끌고 우회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기간동안의 농성으로 쌓인 불만과 반감, 그리고 마침내 침략군을 철수시켰다는 안도감이 베녹 요새를 지배했고, 특히나 침공한 적은 반드시 격퇴한다는 유테리아의 오랜 방어 전략에 따라 베녹 군은 일제히 퇴각하는 왕국군을 습격합니다. 퇴각전은 가장 어려운 전투이고, 그러기에 퇴각하는 적의 후위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주는 것은 전술의 기본중의 기본이기에, 당시 베녹 요새의 지휘관이었던 세르게이의 판단을 비난할 수는 없겠습니다. 게다가 당시 서남부 전선의 총책임자였던 브레넌 장군이 부상을 입은 것은 사실이었고, 세렌은 별동대를 이끌고 이탈하였기에, 그녀의 가세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적장이 부상을 입고 퇴각하는 것을 기습한다는 세르게이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마그누스의 교묘한 책략이었고, 서전에서 우위를 차지한 베녹 요새군은 왕국군의 후위를 맹렬하게 공격했으나, 세렌이 이끈 별동대가 우회해서 그 배후를 끊으니, 일거에 무너지게 됩니다.

이 패배로 베녹 주둔군은 7할 가량의 병력을 잃고 성에 칩거하게 되었고, 기세가 오른 왕국군은 틈을 주지 않고 연일 맹공을 펼쳐, 마침내 베녹 요새를 함락시키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최대의 공을 세운 마그누스의 이름은 논공기록에 오르지 않았으며, 또한 그는 성을 점령한 직후 급히 수도로 귀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미리 사과하도록 하지. 브레넌.”

영문을 모르는 브레넌에게 고개를 숙인 후, 마그누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당신이 보고한 대량의 마법사 말인데. 유인책에 걸려서 자군이 궤멸당하는 동안 낮잠이라도 자는지 줄곧 보이지 않던데 말야.”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침상에 누워, 자신을 올려다보는 브레넌을 바라보던 마그누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봐. 당신은 검상과 창상을 구분하지 못하나?”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당신은 내가 마법에 의한 상처와, 단순한 화상도 구분하지 못할 거라 믿었나?”

그렇게 소리치며 그가 왼손을 쳐들었을 때, 나는 눈을 감아버렸고, 세렌은 뛰어나가 그의 팔을 붙잡았지만, 우리의 예상과 달리 그 왼손은 가볍게 떨릴 뿐, 빛을 발하지는 않았다. 뒤이어, 붉은 머리카락이, 그리고 폭이 넓은 붉은 옷자락이 펄럭이고, 막사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후 마그누스는 수도로 급행합니다. 마침 수도에서는 결혼식이 막 끝난 참이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난입한 그를 병사들이 제지하려 했으나, “누가 조언자의 길을 막는가.” 라는 그의 말에 병사들 역시 물러났다고 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아라드 공이 남긴 수기를 인용합니다.

돈울프의 예상과 다르게, 눈 앞에 나타난 것은 세렌이 아니라 마그누스였다.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했는데, 어떻게 그가?

“아주 재미있는 수를 썼더군.”

마그누스가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나의 등에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웃고 있지만,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의 눈초리는 그 환한 미소와 대조적으로 싸늘했다.

“아무도 드나들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이름을 댔지.”

병사들이 그 이름에 겁먹고 물러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그것은 관례였을 뿐이다. 저 남자와 세렌 장군은, 심지어는 한밤중에도 전하의 침소에 드나들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세렌 장군과 전하가 내연의 관계라는 소문이 자자했고, 마그누스가 왕의 신의를 믿고 오만하다고 불평하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앞에서 그 소리를 내뱉은 이는 없었다. 해꼬지를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저 나는 연민했을 뿐이다. 저 아름다운 여성이, 떳떳하게 한 남성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나는 마그누스를 질투하고 있었다. 신하로서 그는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위치 - 왕의 조언자 - 에 올랐다. 아니, 그는 처음부터 전하의 신하가 아닌 몸으로 이 궁정에 머문 유일한 존재였다. 그는 전하와 침식을 같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고, 그의 말은 지금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 - 마그누스의 존재가 특별하다는 것 - 은 신하로서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도 “이겼다.” 그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돈울프의 명령보다도 그의 의지가 우선했으니.

그러나 이미 혼례는 끝났다. 제 아무리 조언자 마그누스라도 이미 이루어진 혼례를 무효로 할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 모양인지 돈울프는 웃었다.

“부족한 솜씨입니다만. 어떠셨습니까? 유테리아의 경치는 아름다웠지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돈울프는 마그누스를 도발하고 있다는 것을. 전하의 혼례식과 같은 경축일에, 전하의 중신에게 해를 끼친다면 제 아무리 전하의 친구이자 조언자인 마그누스라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넘어갈 리가 없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그누스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돈울프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그누스! 와 주었는가!”

정적을 깨트린 것은, 이제 막 식을 마친 새신랑, 칼라인 전하셨다. 전하의 모습을 본 주위의 일동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마그누스는 여느 때처럼 똑바로 선 채 전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좋은 날, 자네가 없어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르네. 이 친구. 왔으면 나부터 찾을 것이지 밖에 서서 이게 뭐 하는 건가. 자, 안으로 들어가세. 여왕도 자네를 무척 보고싶어 한다네.”

“이번 결혼은.”

그의 목소리는 침중하게, 낮게, 무겁게, 그러면서도 맑게 울렸다.

“자네의 의지인가?”

짧은 정적이 지나고, 전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셨고, 마그누스는 의례적인 축하의 말을 몇 마디 나누고, 피곤하다며 몸을 돌렸다.

베녹 공성전의 일등 공신은 세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브레넌 장군이나 아스파 엔듀리온의 이름이 있지만, 마그누스의 이름은 줄곧 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아스파의 수기에 의하면, 해당 전투를 승리로 이끈 최대의 공신은 마그누스인 셈이지만, 그는 논공행상의 자리에 모습조차 비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편, 이 날을 계기로, 마그누스가 밤에 전하를 방문하였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이후의 여러 회의 자리에서 그는 극도로 발언을 아끼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훗날, 건국 전쟁이 끝난 이후, 건국왕 전하는 영을 내려 베녹 요새를 철거하라는 영을 내리시게 됩니다. 일설에는 유테리아를 시찰하시던 중에 베녹 요새를 본 전하께서는, “이 물건이 내 벗을 앗아갔으니, 보고 있기조차 불쾌하구나!” 라고 말씀하셨다고도 전해집니다. 그러나, 비록 두 사람의 사이가 예전같지 않았다 하더라도, 건국 전쟁 내내 마그누스는 전하의 친우였으며, 세렌 탄핵 사건의 전까지는 변함없는 신의로 전하를 대하게 됩니다.

2) 다른 하나는 아스파 엔듀리온의 대규모 포위전법입니다. 당시에는 “겁쟁이” 로 불릴 정도로 심한 매도를 받았으나, 그의 전술적 식견은 매우 뛰어났으며, 공성전에 있어서는 교과서적인 것으로 평가됩니다. 한편 필자는 아스파 엔듀리온이 이후 사용하게 된 공성 전략이 이 때의 마그누스의 작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성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하책 중의 하책이라는 확고한 인식에서 두 사람의 전법은 닮아 있으니까요.

댓글

정석한, %2007/%11/%07 %19:%Nov:

조만간 재무부에서 국방부로 전근갈 것 같은 아이덴이었습니다 (…)

 
로키, %2008/%03/%19 %03:%Mar:

와~ 한참 늦어서야 제대로 읽어봤는데 마그누스의 모습이 정말 멋지군요. 계략에 속아 베녹으로 달려가고 나서도 단숨에 전투를 승리로 이끈 묘책이라든지,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감이라든지. 왼손을 들었을 때는 브레난 장군 정말 죽는 건가 하고 순간 덜컥..(..) 마그누스와 세렌에 대한 다른 신하들의 복잡한 심경도 인간적이고, 이후 그 둘의 최후를 암시하는 면도 있어서 재밌었어요. 돈울프와 마그누스의 미묘한 알력도 그렇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