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

이 익명의 수기를 손에 넣은 것으로 지난 며칠 동안의 지겨운 수색이 단번에 의미 있는 일로 바뀔 수 있었습니다. 이 익명의 화자가 아니었더라면 대마법사 마그누스는 우리 곁에 생생히 살아 숨쉬는 인물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그누스는 왕의 친근하고도 현명한 조언자1)자비에르와 아데프치오를 필두로 한 개혁 세력의 반대자2)로써 역사책에 입이 닳도록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가 무슨 이유에서 자신의 동지인 마법사와 요정들이 하나하나 처단되어 갈 때에도 친우 칼라인 듀리온의 곁을 지켰는지, 신비로울 정도로 모든 이성적 선택지에 반하는 그러한 결단의 가능한 근거를 제시해주려고 시도하는 서적은 어린아이들의 설화를 제외하고는 제가 지금껏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무엄하게도) 대부분의 역사가 분들이라면 설령 이 일, 마그누스의 결단에 근거를 지어주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진실에는 한 발짝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으리라고 확신하며, 이 수기를 그 증거로 들고 싶습니다. 대마법사의 선택은 사회정치적인 관계에 기반을 둔 합리적인 이해득실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이고 오직 개인적인 것들, 굳이 말하자면 성격과 신념에 기초하고 있었음, 그 사실을 이 수기가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의 복잡하고도 고상한 성격과 친우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에요. 그러나 우리들의 역사에 길이길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는 선택이 거시적이거나 물질적인 이해 관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한 사람의 순전히 개인적인, 거의 정신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결단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들의 이 시대, 붉은 꽃이 지고 영웅들이 떠나버린지 삼백 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대에 얼마나 남아있을 수 있을까요? 당신은,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입니까?

마법사가 그의 얼굴보다 더욱 잘 알려진 붉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돔 아래로 들어서자 날개 형상의 대리석 부조들로 가려진 서늘한 구석 여기저기에서 차가운 금속음이 울렸다. 마그누스는 잠시 멈칫했으나 멈춰서지는 않았다.

꿈결 속에서처럼 내 안이 아닌 어느 먼 나라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내 목소리가 법당을 울렸다. “멈춰서세요, 마그누스. 꽃의 마법사여.3) 당신을 폐하에 대한 반역의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순순히 왼팔을 내밀고 오라를 받으시지요.”

그는 천천히 얼굴을 들어올렸다. 2층의 새하얀 시계 장식 뒤에 숨어있던 나는 입고 있는 옷에 반사되어 붉게 반짝이는 그의 눈과 젊은이처럼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볼 수 없다. 철과 대리석으로만 된 우노스의 미로의 천사들이 그들의 새하얀 깃털로 우리를 겹겹이 덮어주고 있었으니, 드넓은 평원을 말을 타고 달리는데 익숙한 그의 눈이 분간해낼 수 있는 것은 까마득한 돔에 눈이 보이지 않는 천사들이 서로의 날개에 잇닿아 끝없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 뿐이었을 것이다.

이제 날짐승의 발이 닿는 모든 땅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려하는 우리 신의 신전을 바라보는 그 마법사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계속 말했다. 평생 동안 그 이야기를 먼 옛날의 설화를 듣듯 들어오거나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왔던, 강력하고 나보다 아주 오래된 존재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잔혹한 승리의 기쁨인 동시에 비참한 패배의 자포자기였고 모두가 장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비현실성과 동시에 견뎌내기 어려울만큼 진지한 비극이 존재했다. “아무리 도성에서 떨어져 있었다 해도 뤠이신 각하가 타이샨에서 들여온 신무기의 이야기는 들으셨겠지요. 백 걸음 떨어진 곳에서도 표적을 맞출 수 있고 그 총탄이 가하는 해는 요정의 몸으로도 결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독한 것입니다. 군대에서는 이것을 마법사에게 시험해보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 시험 대상이 되고 싶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당신이 마법을 사용하려고 하는 가장 작은 낌새라도 보이는 순간 이 법당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총구들이 전부 당신의 왼팔을 향해 발사될 것입니다.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팔이 없어지는 데에야 별 수 없겠지요. 그러니 순순히 포박을 받으면 돌이킬 수 없는 해가 가해지는 일 없이 끝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 아무 말도 없이, 눈길조차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멈춰서 있었다. 불 같은 성격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 어린 활기를 지닌 것으로 유명했던 꽃의 마법사가.

마법사들이 으레 그렇게 하듯 여러 겹의 소매 속에 칭칭 감아둔 그의 오른손이 문득 움직였고 무기를 겨누고 있던 우리들은 모두 바짝 긴장해 자세를 새로이 했다. “섣부르게 행동하지 마세요” 내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건국 전쟁이 끝난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서서히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고 있었고 우리들은 옛 시대의 지배자였던 이들을 거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요정의 피를 이어받은 위대한 인간 마법사들4) 가운데 거의 마지막 남은 인물인 이 사람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우리들의 눈에도 그렇게 비칠 수 있을만큼 분명히 초자연적인 존재였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친우들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아이들을 낳은 지금에도 여전히 열정적인 젊은이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내 눈으로 마법을 보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그가 젊은이의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늙은이의 경험 또한 가지고 있는 초현실적인 존재라는 것을 모든 감각으로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왕… 칼라인의 의지인가?”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지만 동시에 젊은이처럼 아주 맑은 그의 목소리가 새하얀 날개들 사이로 몇 번이고 메아리를 남기며 울려퍼졌다. 그 목소리만으로는 그가 떨고 있는지 분노하고 있는지 혹은 조롱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붉은 머리카락에 속아서는 안 되었다. 그는 아주 복잡하고 알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명령받은 대로 대답했다.

“아니, 그는 사람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자신을 사랑한 자들을 배신했지만… 마침내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이려는 데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그는 무언가 자신을 내리누르는 아주 강력한 힘에 거역하려는 듯 팟 하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제이피리스 시절이라면, 우리가 자비에르를 만나기 전이라면, 그가 나의 많은 친구들을 죽이기 이전이라면 너 같은 보잘 것 없는 자가 그에 대한 나의 믿음을 깨고 그의 목소리를 대신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거야. 그렇지만 지금은 그의 무엇을 믿어야 할지, 나는 그것조차 잘 알 수 없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나의 친구들의 운명을 방관하면서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던가? 나 자신의 미래조차 예언할 수 없을만큼 그를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던가?” 내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마그누스는 아주 나이든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시니컬하지 않은 열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는 자비에르처럼 대중 연설가로 알려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일 대 일로 대면했을 때 상대를 감동시키는 그런 진심이 있었다고 나는 짧은 만남의 경험에서나마 확언할 수 있다.

붉은 마법사는 그들의 종족을 멸망시킨 아름답고 차갑고 하얀 법당의 한가운데 수많은 쇠 총구에 둘러싸인 채로 혼자, 양손을 늘어뜨린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위협적으로 거대한 마법의 힘이 있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결코 무력해보이지 않았다. 그의 고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의 고뇌 때문에.

마침내 그가 천천히 한 손을 들어올렸다. 우리들은 숨을 들이쉬면서 총구를 겨누었고 나는 급히 소리쳤다. “마그누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그가 아주 친근한 인물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책이나 어릴적 삽화 속에서 만났던 인물이 아니라 내 바로 옆에서 숨소리를 내며 살아 있는 듯한. “여기서 개죽음 한다면 당신의 의문을 풀 기회도 갖지 못할 겁니다! 포로가 된다면 다음 기회를 노려볼 수 있어요!” 빛이 명멸하기 직전의 한 순간, 그가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들어온 말이 떠올랐다. 요정과 마법사들은 고상한 존재,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무 수단이고 동원하지는 않는다. 그들을 손 안의 것으로 한다는 것은 아주, 아주 어려운 일.

“그러나 나는 그를 믿지 않을 수 없어. 그가 나를 배신하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그것은 내가 평생을 그 신뢰에 바쳐왔기 때문이고 이제는 그 신뢰가 나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 마그누스는 앞으로 당당히 걸어나오면서 왼손을 높이 들어올려 수많은 빛을 한 손에 모았고 나의 외마디 명령에 따라 부하들은 총구를 그 손에 겨누었다. 바깥은 빛으로 박제된 것 같은 나무들이 출렁이는 아름답고, 밝은, 겨울의 날일 터. 마그누스가 가장 환히 피어나는 계절. 마법사는 이 문을 걸어들어오면서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햇빛 아래 서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모든 것이 한 곳으로 모이는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숨쉬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빛나는 먼지들만이 흩날리고 있었지만 데우스의 신전은 전혀 상처받지 않은 고요함 속에 동일하게 위대했다.

3) 마그누스는 반도의 북쪽 아킬라니아 지방의 산과 들에 피어나는 붉은 꽃의 이름이다. 겨울의 황폐한 들판에도 꿋꿋이 피어 만발하기 때문에 옛날 아킬라니아 사람들은 (그 지방에는 드물지 않은 일이지만) 기근이 닥쳐오는 겨울이면 그 꽃을 따먹고 연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아름답기로 유명한) 북방의 여자들은 그 꽃으로 옷과 머리를 장식하기를 좋아하니, 아직도 반도의 다른 지방들과는 풍습이 많이 다르고 정서적으로도 가깝지 않은 이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꽃이다.
4) 마법의 힘은 요정의 것이다. 즉 마법사들은 전부 요정의 피를 이어받은 이들이다.

댓글

정석한, %2007/%10/%22 %01:%Oct:

마그누스의 최후가 암살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교토사양구팽 (狡兎死良狗烹)에서 참조했습니다.

 
오승한, %2007/%10/%22 %12:%Oct:

한 시대의 거물에 걸맞는 아름답고 장렬한 최후로군요;

 
_엔, %2007/%10/%22 %17:%Oct:

혼자 너무 감정에 휩쓸려가버린게 아닌가 걱정이에요;

 
로키, %2007/%10/%22 %12:%Oct:

우와… 장난 아닌데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우선 마그누스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생생해서, 그와 직접 마주치자 강하고 순수한 인간적 끌림을 느끼면서도 제거해야 하는 서술자의 딜레마가 정말 잘 와 닿았어요. 그런 인상을 표현하는 데에 눈까지 붉게 비칠 정도로 붉은 옷과 젊은이같이 열정적이고 냉소 없는 태도는 더없이 효과적이었고요. 흐트러진 머리칼처럼 작은 터치에서 이미 숨막히도록 와닿는 작은 불완전이랄까, 부족함이랄까 하는 데서 시작해서 정신없이 빠져드는 매력이 느껴져요.

어쩌면 이 글이 정말로 감동적인 건 요정이란 어떤 존재인가 더없이 강렬하게 보여준다는 점일지도요. 제가 쓴 세렌 - 기억의 파편, 자비에르 - 와일드 헌트, 승한님이 쓰신 정사(情事)후, 석한님의 교토사양구팽 (狡兎死良狗烹), 엔님의 요정의 작별인사… 요정을 다룬 모든 글에 어떻게 보면 공통되는 주제였지만 이 글이 일거에 정리하고 있는 요정의 속성이라면 그들은 결코 '타협을 모르는 존재'라는 점이에요. 욕망하는 것, 느끼는 것에 너무 순수하고 충실해서 인간이 생각하는 이익이나 손해도, 안정이나 불편도, 심지어는 생과 사도 생각할 수 없이 오직 원하는 바를 향해 질주하는 거죠. 그러니 도덕도 관습도 속박이 없을 수밖에요. 어쩌면 그들의 마법도 그들이 욕망 그 자체인 존재이기에 그 욕망을 외부 세계에 각인시키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그런 요정과 마주치는 건 인간에게는 강렬한 매혹이고, 불편한 경험이고, 비할 데 없는 공포와 비탄인 것 같아요. 인간이 요정을 몰아내는 건 인간이 이성의 시대를 만들려면 필연이었지만 한편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겠죠. 자신 안의 가장 순수하고 위험한 부분을 죽여버렸으니까요.

그런 요정의 속성을 표현하는 이미지 대비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눈에 안 띌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존재 그 자체로 솔직하게 부딪치는 마그누스의 붉은색 대 하얀 날개깃털로 표현한 초월적 섭리와 권위 뒤에 숨은 서술자. 오른손 (관행, 관습, 범용성, '바름')을 겹겹이 묶고 심장과 바로 통하는 왼팔로 마력을 모으는 마법사의 이질적이고 특색 넘치는 모습 대 과학과 이성의 원리로 멀리서 죽이는 총기. (대체 저 오른팔 왼팔 상상은 어떻게 하셨어요오..;ㅁ;) 우정과 배신, 양보할 수 없는 자아의 언어를 말하는 마그누스의 대 사회와 법도와 논리를 말하는 서술자. 수없는 세월을 살아오고도 붉은 꽃처럼 생생하고 덧없는 마그누스의 열정 대 마그누스에 비하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젊으면서도 차갑고 기계적인 (그러나 강렬한 감동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는) 서술자의 모습. 이 모든 게 황량한 추위 속에 피어난 붉은 꽃의 이미지하고 겹치면서 굉장히 감동깊더라고요..;ㅁ;

너무 잘 읽었고요, 참 혹시 아켈라니를 요정의 소굴로 만드실 계획인가요? +_+ 이거 보고서 듀아라르크 (대기중)에 아켈라니의 비밀 호수 루크두 추가했어요!

 
_엔, %2007/%10/%22 %17:%Oct:

로키님 댓글에 감동받아서 뭐라고 대답드리고 싶은데 할 말이 잘 생각이 안나네요; 일단 실질적인 것부터 말씀드리자면 "꼭두각시가 사자가 되어"에서 '요정들이 더럽고 추하다하여 접근하지 않은 북부 황무지'라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에 아킬라니를 요정의 소굴로 만드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아요. 저는 그냥 마그누스가 황폐한 지역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거죠. 개인적으로는 루크두는 아킬라니에 있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좀 더 좋은 지역에 있었으면… : )

 
왕재필, %2007/%10/%22 %18:%Oct:

전 마그누스가 지금까지도 살아있다고 할 생각이었는데[..]

 
오승한, %2007/%10/%22 %19:%Oct:

이 때야말로 반박기사가 필요한 것이죠 :)

 
백광열, %2007/%10/%23 %22:%Oct:

폭발 직전에 어디론가 몸을 피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분신이었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출처 자체를 반박하지 않고, 해석만 반박해도 충분할지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