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의 재상

초대 집사부 대신이었던 돈울프 공은 여타의 개국 공신들과 비교할 때, 상당히 장수한 편에 속합니다. 마그누스는 암살1)당했고, 세렌 은 숙청2) 당했으며 진 뤠이신은 낙향하여 은둔한 것과 비교하면, 건국왕 전하와 2대 국왕 마나 전하, 그리고 3대 국왕 칼라인 3세 전하를 함께 모신 돈울프공은 이례적인 존재였습니다. 이는 돈울프 공이 여러 개국 공신 중에선 비교적 젊은 편에 속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건국왕 전하의 사후, 벨가스트 반란의 영향으로 대왕대비 이렌가르드는 그 영향력을 상실합니다. 결국 어린 국왕을 보필하여 왕국을 경영하게 된 것은 돈울프 공의 몫이 되었고,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압도적인 정치력을 과시하며 왕국을 반석에 올리게 됩니다.

필자는 이전의 여러 기사를 통해 건국 최대의 공신은 세렌, 건국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우노스 정교회와 아데프치오라는 견해3) 를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창업과 수성의 시대는 또 서로간에 다른 능력과 재능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최대의 공을 세운 것은 단연 돈울프 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전략) 이에 창고를 열어 크게 베푸니 전하의 성덕을 찬양하지 않는 이가 없더라.

다시 돈울프 경이 진언하여, 법조문을 크게 개편하게 되어, 규정을 세분화하고 처벌을 엄격하게 명문화하였다. 재무 대신 아라드 경이 반론하여 “민심이 이제 갓 안정되는데, 이제 다시 법을 엄하게 고치면 원성이 커질 것이다.” 라고 하였으나, 돈울프 경은 “그간의 법이 세밀하지 못해, 각 지방관이 자의로 일을 처리하니 첫째로 권력 농단의 시초이며 둘째로 법이 안정하지 못함이라. 이에 일흔 두 가지의 조항을 들어 이대로 시행하게 하면 위법과 합법, 상벌의 기준이 명확하니 오히려 널리 이를 알아 죄를 짓고 처벌받는 자가 줄어들 것이다.” 라고 하더라. (중략)

돈울프 경이 진언하여 “전 재무 대신 진 뤠이신이 은퇴한 이후 왕국의 세수가 점차 줄고 있음이라. 뤠이신은 장사의 소질이 있어 매 해 기후와 작황에 따라 융통성이 있는 시책을 써서 국부를 극대화했으나 모든 사람이 뤠이신만 같지 못하므로 옛 정책을 그대로 씀은 옳지 못합니다.” 라 하여 매 해마다 재무 대신이 정하던 세무 정책을 명문화하여 일률적으로 처리하게 함이라. 이에 국왕께서 가라사대 “모두 돈울프 경의 뜻대로 행하라.” 하시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돈울프 공의 최대의 공훈은 역시 제도의 확립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법과 세금에 관한 규정을 엄격하게 못박은 것이 기록에 나타납니다. 제국 시절, 폭정으로 탄압받던 민심을 위로한다는 이유로 건국왕 전하께선 줄곧 너그러운 법을 강조하셨습니다.

“살인자와 반역자는 사형에, 도둑질 한 자는 그 두 배로 배상하게 하며 여타의 소소한 범죄는 각 지방관의 판단에 따른다.” 라 하셨는데 이렇게 간소한 법조문은 그를 시행하는 지방관의 역량에 따라 그 경중과 올바름이 판가름나기 마련입니다. 이에 돈울프공은 72가지의 조문을 마련하여, 각 지방관의 판단할 부분을 축소한 것입니다.

한편 재무 대신 진 뤠이신이 건재했을 때는 재무 정책과 세금 정책이 매 해 재무 대신의 판단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뀌었는데, 돈울프 공은 그 부분도 일괄적으로 못을 박았습니다.

이러한 정책의 명문화는, 비록 유능한 인재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입지를 잃는다는 결점도 있지만, 반대로 유능치 못한 인물이 정책을 시행하게 될 때도 최악의 결과는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갖습니다. 특히 왕국 재무부는, 초대 재무 대신 진 뤠이신 이래 역사에 길이 남을 정책가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4) 이므로, 진 뤠이신이 시행한 것과 같이 재무 대신 개인의 역량에 전적으로 기대는 규정은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여러 업적을 쌓으며, 돈울프 공은 점차 권력의 핵심으로 부각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 시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돈울프 공의 방식은 자칫 월권으로 보이기 쉬운 것이었고 이 점이 여러 사람들의 불만을 부르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오랜 친우였던 아라드 공과도 결별하게 됩니다.

존경하는 돈울프 공에게.

공이 제이피리스에서 거병하신 건국왕 전하를 섬겨, 그간 공이 컸음을 모르는 이가 없소이다. 이 아라드 역시 공과 오래 알고 지내며, 공의 인품과 식견에 늘 감탄해온 바이기도 하오.

그럼에도 저는 최근 공의 행적에 의문을 품지 아니할 수 없소이다.

법무 대신과 재무 대신이 건재함에도 공이 왕국의 법률과 재정에 대해 왈가왈부하여, 마침내 대신들의 뜻을 무시한 채 공의 의견대로 정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소. 이에 부족한 몸으로 대신의 자리에 오른 나 같은 사람은 아랫사람을 통솔할 명분이 없게 되었소이다.

이에 무능하고 부족한 이 아라드는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여 여러 차례 표문을 올렸으나 이를 공이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는 어찌 된 일이오.

신하의 진퇴는 국왕께서 결정하실 일인데 공께서 중간에 표문을 가로채어 마음대로 처리하니 저잣거리의 풍문이 허튼 말이 아니로소이다.

아라드 같은 이는 물에서 물고기를 건지듯 쉽게 구할 수 있는 인물이니 다시 말할 것이 없으나, 공은 천하의 기재인데 그 처신에 신중함이 없어 스스로의 수명을 깎고 있으니 실로 안타깝소이다.

부디 공이 세렌 장군이나, 저 만고의 역적 루오르 아마란타의 전철을 밟지 않기만을 손 모아 기원하며 이제 이 아라드는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오이다. 부디 금번에 아라드가 올린 표문은 전하의 손에 무사히 전달되길 바랄 뿐이외다.

그간의 여러 수기가 보여준 것과 같이, 아라드 공은 돈울프 공과는 사적으로 오랜 친우 사이였고, 그 사이가 각별했던 인물입니다. 그러한 아라드 공이 돈울프 공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특히 이전에 시종일관 “돈울프” 라는 표현을 써오던 아라드 공은 돈울프 공을 “공” 이라고 지칭하였는데, 그 두 표현 사이의 거리감이 곧 두 사람의 마음의 거리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당시의 돈울프 공은 그 위세가 드높아, 국왕 못지 않은 권세를 휘두른다는 평이 자자하였는데, “저잣거리의 풍문” 은 그를 비꼰 것으로 여겨집니다.

친우 아라드 공과 결별한 돈울프 공은 점점 더 과감한 시책을 내놓게 됩니다. 특히 그는 “국왕은 국가의 아버지이자 제일 웃어른으로서 태산같은 위엄으로 자리를 지키고, 아래에서 신하들이 그 재능과 소임에 맞게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주장하며,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권한을 맡겨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돈울프 공을 줄곧 중용하였던 제 3대 국왕 칼라인 3세 전하는 성인이 되어 스스로 정국을 주도하길 원하시게 됩니다. 이에 두 사람이 충돌함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이에 돈울프 공이 표문을 올려 “재무 대신 로웬과 외무 대신 그웨나라르크는 모두 유능한 인재로 이들을 경질하고 전하의 독단으로 인물을 등용하니 이는 크게 옳지 못한 일입니다.” 라 하자, 전하께서 “그들의 일이 내 뜻과 합치하지 아니한다.” 며 그대로 재무 대신과 외무 대신을 교체하라는 영을 내리셨다. 다시 돈울프 공이 각 대신들을 자택에 초대하여 사흘 밤 사흘 낮동안 출사를 거부하니 다시 전하께서 영을 내리시어 “로웬과 그웨나라르크를 유임한다.” 고 하시었다.

실제로 로웬 공과 그웨나라르크 공5) 은 칼라인 3세 전하의 치세 동안 줄곧 기용된 유능한 인재였습니다. 당시 칼라인 3세 전하께서 내리신 이들의 경질은 분명 전하의 실책이었던 것이고, 따라서 돈울프 공이 이를 제지한 것은 올바른 판단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신을 모아 등청을 거부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고, 전하 뿐 아니라 여러 대신들의 불만을 사게 됩니다. 목적은 좋았으나, 그 수단이 올바르지 못했다 할 것입니다.

이에, 마침내 칼라인 3세 전하는 재위 7년째, 다섯 가지 죄를 물어 돈울프 공을 처단합니다. 그 죄목은 “개국 공신 세렌을 사사로운 정권 다툼으로 처형한 죄. 건국왕 전하의 친우 마그누스 를 살해한 죄. 제이피리스에서 탈옥하여 국가의 질서를 문란하게 한 죄. 사사로이 무리를 지어 등청을 거부한 죄. 권력을 탐하여 정권을 농단한 죄.” 가 그것입니다. 마그누스 암살의 책임을 돈울프공에게 돌리는 것은 근거가 희박한 일입니다. 게다가 세렌을 제거한 부분은 30여년, 제이피리스 탈옥은 40여년이 지난 죄목이며, 특히 제이피리스 탈옥은 이미 건국왕 전하의 사면을 받은 일입니다. 실제의 죄는 뒤의 두 조목이며, 그 두 가지가 돈울프 공을 제거하게 된 원인이 된 셈입니다. 돈울프 공은 사형을 언도받지만, 실제로 사형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섯 가지 죄목을 지적당한 그날 밤, 분기를 못 이겨 피를 토하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 한 가지만 보더라도 그 억울한 심정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는 개국의 시대에는 유능한 책략가이자 외교관이었고, 치세의 시대에는 유능한 정치가였지만, 그의 영혼은 시대를 잘못 만났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재능을 가진 자가 나라를 경영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그는 실로 시대의 선각자라고 할 수 있겠으며, 국가의 여러 제도의 기틀을 잡은 점은 전무후무한 공적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정부의 여러 정책 중 그 기본을 돈울프 공이 입안하지 아니한 것이 없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당시의 돈울프 공은 검은 옷을 즐겨 입어, “흑의 재상” 이라 불리웠는데, 혹자가 그 이유를 묻자 검은 옷이 때가 덜 타서 오래 입기 때문에 비용이 절감되고 또 귀가하지 않고 그대로 밤새 정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 답했다 합니다. 그런 돈울프 공이었으니만큼 그 스스로의 권력욕이나 재물욕이 없었음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시대에 걸맞지 않게 지나치게 급진적인 주장으로, 입헌군주제의 기틀을 열려고 한 것은 실로 무리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특히나 민중의 지지를 받은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특정한 인물 한 사람의 주도로 행해진 위로부터의 개혁은 그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

왕국의 진정한 사상적 혁명까지는, 돈울프 공의 사후에도 다시 백 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1) 붉은 꽃의 견해를 따름
3) 이는 통일왕국으로 가는 길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며, 필자는 해당 견해를 전면적으로 지지하는 바입니다.
4) 필자는 감히 이렇게 주장해 봅니다. 만일 현직 재무 대신과 관료들이 이 기사에 유감이 있다면, 그 불만은 초대 재무대신을 뛰어넘는 시책을 발표하여 풀어야 할 것입니다.
5) 최근, 명문가 그웨나라르크 가는 그 재능과 실적이 옛 선조에 미치지 못하는데, 선조의 은혜로 세도를 누리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댓글

_엔, %2007/%11/%04 %17:%Nov:

올리셨군요, 돈울프의 죽음! 제 개인적인 목표는 주요 인물들의 죽음을 전부 쓰거나 보는 것인데 벌써 어느 정도 진척이 있어서 기쁩니다. 돈울프가 반기를 들어보지 못하고 죽었다는게 조금 마음 아프긴 하지만… 역시 문관이었으니 이 정도가 한계였으려나요? 얼핏 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이상주의자인 돈울프의 모습 즐겁게 보았어요~

 
로키, %2007/%11/%05 %02:%Nov:

로마 시대 그라쿠스 형제도 그렇고, 조선시대 조광조도 그렇고, 역사적으로 급진적인 개혁가들은 끝이 좋지 않았죠. 돈울프도 마찬가지였군요..;ㅁ; 법을 엄격하게 정립하고 역사의 큰 인물들이 죽거나 떠나는 과정에서 영웅의 시대가 끝나는 과정을 엿볼 수 있어서 재밌네요. 돈울프가 피 토하고 죽은 건 암살이었다고 해도 재밌을 듯! 그가 불복할 것을 염려해서 말이죠.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