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여름과 사라진 역사서

50년 전, 반트족들과 천민들이 모여사는 수도 남쪽 지구에서 머지않아 일어날 음모와 반역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오물로 더러운 골목과, 값싸고 독한 술을 파는 지하의 술집, 할 일 없는 건달들이 모이곤 하는 광장에서 은밀히, 그리고 조용히 퍼져나갔다. 무심코 남쪽 지구에 발을 들여놓고만 사람은 그를 경계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수상한 그림자들과 마주치고 황급이 발길을 다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소문이 돌기 시작한 발단은 간단했다. 반트족 출신의 악명 높은 범죄자 중 한 사람인 '성난' 아벨이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아벨은 그 동안 왕국 내에서 암살과 방화, 파괴와 같은 범죄 행위를 수없이 저질러 선량한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대악인이었으므로, 그 선고는 더없이 정당하다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반역자의 피가 그 혈관 속에 흐르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는 반트족은 그들의 사악한 우상이 처형된다는 소문에 흥분했고, 존엄하신 국왕이 계시는 수도에서 폭동을 일으켜 그를 구출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멀리서 소문을 들은 반트인들과 천민들 중에서도 그들의 무지함 때문에 반역자들의 감언이설에 속아넘어가 폭동에 참여키로 한 자가 수없이 나왔다.

마침내 '붉은 여름'이라고 불리게 될, 그 끔찍한 사건이 시작된 것은 그 해 여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무렵이었다. 야음을 틈타 행동을 개시한 폭도들은 만나는 자들을 족족 살해하며 아벨이 수감된 감옥이 있는 서쪽 지구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이 워낙 은밀하였기에 당시 치안 대장이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이미 감옥이 폭도들에 의해 거의 점령되기 직전이었다. 폭도들은 감옥을 지키던 병사들을 모조리 죽이고 아벨과 수감된 범죄자들을 해방시켰는데, 감옥에서 죄를 뉘우치기는 커녕 배은망덕하게도 국왕 폐하를 향해 복수의 칼을 갈던 그들의 흉악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수괴들의 지시를 받은 폭도들이 뿔뿔히 흩어져 살인과 방화와 약탈을 시작하면서 서쪽 지구에 혼란이 퍼져나갔다. 치안 대장이 치안대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나, 몇 주나 계속 된 무더위로 인해 건물들이 메말라있던터라 번져나가는 불길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폭동이 대충이나마 진압된 것은 사흘 뒤였다. 폭도들 대다수가 스스로가 지른 불길 속에 갇혀 타죽었고, 나머지는 치안대에게 체포되거나, 반항 끝에 살해되었으나, 아벨을 비롯한 몇몇 주동자들은 끝내 잡을 수가 없었다.

반역 기도가 실행된 날 밤에만 수도에서 모두 육십여 명이 죽거나 다쳤고, 백여 채의 유서깊은 건물들이 불타 사라졌다. 그 가운데에는 왕립 도서관이나 옛 글렌 포드 대학 같은 지식의 보고들도 있었으니, 반역자들은 어리석음이라는 독을 품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독으로 진리를 좇는 후손들의 눈까지 멀게하는 참으로 파렴치한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역모가 벌어지기 전까지 건국사에 대해 다룬 모든 역사서들의 조상이라고 할 만한 책은 칼라인 대왕 시대의 전설적인 사학자 멜리아도르가 집필한 '연대기'였다. 멜리아도르는 칼라인 대왕이 반도의 통일을 눈 앞에 두고 있을 무렵 태어났다는 것만이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한 연도나 출신은 알 수가 없다. 그가 출사한 해에 이미 대왕의 치세는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왕이 서거한 이후 멜리아도르는 어떤 이유로 모함을 당해 좌천되었고, 사료 보관소를 관리하는 한직을 맡게 되었으니, 신의 섭리는 이처럼 오묘한 것이어서 그의 위대한 역사서는 그 곳에서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명색은 사료 보관소였지만, 그곳은 요정들의 문자로 된 책들에서부터, 칼라인 대왕과 그의 측근들이 주고받은 편지, 그리고 온갖 허섭쓰레기들을 모아놓은 곳에 불과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멜리아도르는 난잡하게 세워진 서간들 사이를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속에 숨겨진 어떤 보물같은 사료가 그에게 역사서 집필의 영감을 불어넣었던 것일까(그 당시 사료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던 대다수의 자료들이 이후 글렌포드 대학에 기증되었고, 그 자료들 역시 아벨과 그의 일당들의 만행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멜리아도르는 끝내 자신의 역작이 완성되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의 충실한 조수이자 늙은 그의 눈과 손을 대신해 주었던 그의 세 아들들이 아버지의 유작을 물려받아 집필을 계속해 나갔는데, 결국 멜리아도르가 죽은 지 11년 째 되던 해에 '연대기'는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들들은 우리 민족의 자랑거리요 보물이 될 역사서를 칼라인 대왕의 손자 칼라인 3세에게 바쳤는데, 왕께서는 친히 그 역사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시고 그들 부자의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서 왕립 도서관을 설립하기로 마음먹으셨다고 전해진다.

여름을 붉게 물들였던 반역의 밤에, 왕립 도서관이 불길에 휩싸였다는 소식을 접한 많은 학자들이 '연대기'를 비롯한 많은 귀중한 서책과 자료들을 구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들었으며 대다수가 숭고한 죽음을 맞이했다. 권위있는 사학자들과 수많은 사료들이 이 날 하루 밤 동안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오늘날 왕국의 국민이 우리 나라의 역사를 알고자 하여도 온갖 허섭 쓰레기들과 돌팔이 사학자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를 안타깝게 여기신 국왕 폐하께서 왕국 안의 모든 사학자들을 모아 새로운 '연대기'의 편찬을 명하셨으니, 이는 학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의 복이요, 기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연대기'라는 보배로운 성배를 재 속에서 복원해내야하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어찌 내가 감히 멜리아도르의 위업을 다시 이뤄보겠노라고 장담하겠냐만은, 그러나 자비롭고 선한 주님, 당신의 종을 단단히 붙드시어 저의 눈을 근시와 백내장에서 구하시고, 저의 손을 마비와 수전증으로부터 막아주시며, 온갖 잡동사니들로 혼란스러운 머리 속을 맑게 해주시어 똑바로 나아가게 해주시기를…

-피디아스 바르삭, [잃어버린 성배] 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