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1)

아킬라니아로 여행을 떠난 지인이 책 수 권을 구입해 보내줘서 그 책들을 들춰보느라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최근들어 잠을 깊이 자본 날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고, 이곳 하인놈은 식사를 나를 때 내 방만 깜빡 잊어버리는 것 같다. 식사 때가 한참은 지나서야 멍청한 웃음을 지으며 딱딱해진 빵과 다 식어빠진 수프를 식사랍시고 가져오는데, 한대 후려쳐버리고 싶은 것을 꾹 참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동이 터서야 집필을 잠시 멈추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 새우잠을 자고 있었는데, 노크 소리에 깨고 말았다. 처음엔 식사를 가져온 얼간이 하인놈인줄 알고 썩 꺼지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말끔한 옷을 입은 신사여서 당황하고 말았다.

“당신이 바르삭 씨로군. 전도유망한 사학자라고 들었는데 과연 기백이 남다르구려.”

그는 깔끔한 외모에 값비싸 보이는 옷을 잘 차려입고 있었지만, 방문 외판원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싹싹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로트 필모스라고 소개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왕실의 수완가로서 이름이 높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충견으로도 유명했다.

“누가 나를 보냈는지 벌써 알아챈 것 같구려. 그럼 이야기가 쉬워지지.”

필모스 씨는 손에 들고온 내 연구 기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종이 뭉치를 보는 순간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고 목 뒤로는 소름이 돋았다.

“그분께선 당신의 기사를 읽어보시고 만족하셨소. 훌륭하고 감동적인 글이라고 말이오. 서정적인 문체도, 숨겨져 있는 듯한 교훈도 마음에 들었소.”

다행이었다. 한숨이 다 나왔다. 일단 그분은 내 학자로서의 수명을 조금은 더 누릴 수 있도록 허락을 하신 것이다. 하지만 필모스 씨는 가방 속에서 다른 종이 뭉치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바르삭 씨, 당신은 다른 연구원들이 쓴 기사를 본 적이 있소?”

물론 없었다. 내 글을 쓰는 데도 시간이 촉박했던 것이다. 약간은 흥미가 생겨서 탁자 위에 놓인 기사를 들고 표지를 살폈다. '해적 여왕과의 만남'. 그리고 제목 아래에 써진 그 이름! 나는 이를 갈며 페이지를 넘겼다.

글은 훌륭했다. 아넬리아드의 기록도 흥미로웠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한때 내 모든 존경과 애정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그 사건 이후로 그가 감히 이런 글을 쓸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그의 글을 읽을 것을 알고서도 어떻게 이럴 수가! 이 악당! 위선자! 철면피!

그는 내가 핏발 선 눈으로 기사를 읽는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다 읽은 기사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모습도 눈 한번 찌푸리지 않고 지켜보았다.

“자자, 흥분을 가라앉힙시다, 바르삭 씨. 옳지…그래요, 심호흡을 하고…이제 좀 기분이 나아졌소? 좋아요. 그럼 다시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기사를 읽어본 감상이 어떻소? 노교수가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아서 학계에서는 은퇴를 했다느니, 예리했던 통찰력이 사라진 것이 아니냐느니 말이 많았지. 하지만 그 노인은 다시 글을 쓸 마음이 생긴 것 같구려. 헌데 그분께서도 그 노교수와 그의 기사에 대해 할 말씀이 많은 것 같았소.”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럼 그렇지. 그분이 고작 칭찬이나 몇 마디 전하려고 저런 남자를 보내왔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처형인의 냄새가 난다.

“그분께서는 저 천하고 역겨운 인종인 반트족이 우리 왕국의 통일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이 천인공노할 원고를 읽으시고 화를 내셨소. 당연한 일이지. 사냥꾼이 사냥감을 잡는데 개를 썼다고 개가 사냥을 했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소? 그분은 또한 당신에게도 유감스러워하셨소. 그분이 막대한 돈을 이 연구, 특히 당신에게 쏟아붓는 이유가 뭐겠소? 바로 역사를 정당한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오? 개가 주인인 사냥꾼에게서 사냥감을 빼앗으려고 하는데 당신은 뭐하는거요? 당장 몽둥이를 들어 쓴 맛을 보여줘야하지 않겠소? 이건 전쟁이오! 당신은 당신의 무기-저 펜을 사용해서 역사를 저 더러운 무리들로부터 쟁취해야만 한단 말이오! 칼라인 시대의 위대한 영웅 자비에르 대주교가 말한 것처럼!”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필모스 씨는 가방을 닫고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가기 전에 내게 경고했다.

“앞으로 우리의 적들의 동향에 신경을 좀 더 쓰도록 하시오. 그분께서는 패장을 용서하지 않아요.”

그 날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댓글

로키, %2007/%10/%17 %22:%Oct:

불쌍한 피디아스..ㅠㅠ 출신이 밀리니 학계에 남으려면 별짓을 다해야겠군요. 다음 기사는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네요..+_+

 
백광열, %2007/%10/%20 %14:%Oct:

우옷.. 본편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역시 갈등이 치열해야.. ^^;; 피디아스의 앞날이 참 궁금하군요. 흑. 특히 이번 "반박경매"도 걸렸으니…

 
_엔, %2007/%10/%20 %15:%Oct:

피디아스를 젊은 학자다우면서도 정말 매력적으로 그려내고 계세요. 글도 너무너무너무! 재미있었고요. 글 맛이 좋아서 계속 다시 읽게 되네요.

사냥꾼이 사냥감을 잡는데 개를 썼다고 개가 사냥을 했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소? ← 풋하고 웃었어요. 귀여운 비유!

 
정석한, %2007/%10/%21 %21:%Oct:

그러게요. 사냥꾼이 ~ 있겠소? 는 정말 절묘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_+

백광열// 광열 님의 기사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바쁘시더라도 가끔 업로드 해 주셨으면 합니다.